전주 최씨에 대하여 


최씨 득성 사적

최씨 상 계보

전주 최씨 시조 

전주 최씨 원류분파도

구수세보 분파 배편도

전주 최씨  세계표

문열공 26세손위시 세행도

최씨에 대하여

 

 

 

 

 

  

최씨의 득성한 사적(崔氏의 得 姓한 事蹟)

단군 朝鮮의 백성이 동해 가에 흩어져 살며  그때는 임금이 없었고 六村의 長이 다스렸다. 漢나라 선제임금 지절 元年때 六村의 長이 알천(閼川)언덕에서 모이어 놀다가 고허촌(高墟村)의 長 소벌공(蘇伐公)이 楊山기슭 나정(蘿井) 숲속에 이상한 기운이 있음을 바라보고 찾아가니 하나의 큰 알이 있는지라 아를 깨어 어린 아해를 얻으니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東川에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며 새와 짐승이 모두 춤을 추었다.六村의 長은 그 出生함이 신기하다고 해서 기른지 十三年에 임금으로 삼고朴氏로 姓을하고 혁거세(赫居世)라 이름하니 이분이 신라의 始祖이다.五年이 되던 무진년(戊辰年)에 六村을 六部로 개칭(改稱)하고 大人을 봉(封)하였으며 또 六姓을 사(賜)하니 李崔孫鄭벽裵라고도  하고 혹자는 安鄭朴李金崔이라고 한다 이때의 六部에는 회소곡(會蘇曲)이라는 노래가 있었으니 소벌공이 알천 위에 놀다가 기운을 바라보고 알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최씨에 대하여

우리나라 성씨(姓氏)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歷史)를 지닌 씨족(氏族)의 하나인 최씨(崔氏)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人才)들을 배출한 전통(傳統)있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과 체험(體驗) 속에서 많은 특성(特性)을 남겼으며, 역사상 선현(先賢) 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業績) 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特有)의 기개 (氣槪)·강기(剛氣)·신념(信念)·절조(節操)등으로 Γ 최고집 혹은 최씨 앉은 자리 풀도 안난다.
등 많은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최씨의 원조(元祖)는 신라(新羅) 건국(建國) 의 전신(全身)인 사로(斯盧):서라벌)의 육촌(六村)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虛村)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 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여러산꼴 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 봄,육부를 개정하고,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梁部)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沙梁部)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部)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취산진지촌장(취山珍支村長:本彼部) 지백호(智伯虎) 에게는 정씨(鄭氏),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漢祗部) 지타(祗陀)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설씨(薛氏)의 성(姓)을 내려 주었다고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國遺事)에는 위의. 6부 촌장들이 모두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기록(記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始祖)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며 신라(新羅) 말기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인 최치원(崔致遠)을 주측으로하여 선대(先代) 및 후대(後代)에서분파(分派) 되었다고 보면 정확(正確)하다.문헌(文獻)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地名) 이고 실제 조사가분명(分明)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分派)된 본관(本貫)으로 개성(開城)·삭영(朔寧)·동주(東州:철원)·전주(全州: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後代)에서는 하양(咸陽)·청주(淸州)·영흥(永興)·충주(忠州)·용강(龍崗)·수원(水原)·부안(扶安)·강릉(江陵)·강화(江華)·화순(和順)·통천(通川)·양천(陽川)·원주(原州)·해주(海州)·진주(晋州)·탐진(耽津)·전주(全州:순작,균)가 분파(分派)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를 원조(元祖)로 하여 소벌도리와 최치원(崔致遠)을잇는 같은 후예(後裔)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이렇게 신라(新羅)시대에웅기(雄起)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최언휘(崔彦 ) 등 세 사람이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서 1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웠으며 특히 문창후(文昌候)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대문장가(大文章家)는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東洋)의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 (由來)를찾아보기 힘든 명현(名賢)으로 그가남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동양최고(東洋最高)의 지성(至聖) 이고 한문학(漢文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追仰)받고 있으며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최고(最高)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수많은 최씨(崔氏)들이 역사를 수(繡) 놓았으며 서기 1196년(명종 26)∼1258년(고종45)까지60여 년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 왕국(崔氏王國)을 방불케 했다.충절(忠節)의 명장(名將) 최영(崔塋)은 수많은 국내외(國內外) 침입과 반란이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현(貢獻)했으며, 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민족(民族)의얼이요, 최씨의 특성(特性)이다. 그외 고려 때 문신(文臣) 최유청(崔惟淸)·최윤의(崔允儀)·최유엄(崔有 )·최재(崔宰)·최항(崔沆)·최충(崔 ) 등이 유명했으며 무신(武臣)으로는 최충(崔忠獻) 이 있다.조선(朝鮮) 때 와서 명신(名臣) 최명길(崔鳴吉), 양명학(陽明學)의 대가 최석정(崔錫鼎), 학자(學者), 최수성(崔壽), 문신 최응현(崔應賢)·최항(崔恒)·최만리(崔萬理)·최익현(崔益鉉), (東學)의 시자 최제우(崔濟愚),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崔南善), 항일투사 최재형(崔在亨), 동학의 제2교주 최시형(崔時亨)등 많은최씨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한 씨족(氏族)의 가문(家門)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문과(文科)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를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이조사회(李朝社會)에서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 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많아 견식과 인격(人格)을 겸비하고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최시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으므로 신라와 고려에서 명성(名聲)을 날린 최씨가조선(朝鮮) 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경주시 고동에 자리한  최부잣집(崔富者家) 은 12대 만석(十二代萬石)과 10대 진사(十代進士)로 유명하여 문공부가1969 년에  신라의집 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여 선대(先代)및 후대(後代)에서분파(分派) 되었다고 보면 정확(正確)하다.문헌(文獻)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地名) 이고 실제 조사가 분명(分明)하게 확인된 것은43본이다.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分派)된 본관(本貫) 으로 개성(開城)·삭영(朔寧)·동주(東州:철원)·전주(全州: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後代)에서는 하양(咸陽)·청주(淸州)·영흥(永興)·충주(忠州)·용강(龍崗)·수원(水原)·부안(扶安)·강릉(江陵)·강화(江華)·화순(和順)·통천(通川)·양천(陽川)·원주(原州)·해주(海州)·진주(晋州)·탐진(耽津)·전주(全州:순작,균)가 분파(分派)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를 원조(元祖)로 하여 소벌도리와 최치원(崔致遠)을잇는 같은 후예(後裔)임은 틀림이 없다고본다. 이렇게 신라(新羅)시대에웅기(雄起)한 최씨는신라에서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최언휘(崔彦 ) 등 세 사람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서 1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웠으며 특히 문창후(文昌候)최치원(崔致遠)과 같은대문장가(大文章家)는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東洋)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 (由來)를 찾아보기 힘든 명현(名賢)으로 그가남긴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동양최고(東洋最高)의 지성(至聖) 이고 한문학(漢文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追仰)받고 있으며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최고(最高)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수많은 최씨(崔氏)들이 역사를 수(繡) 놓았으며 서기 1196년(명종 26)∼1258년(고종 45)까지 60여 년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 왕국(崔氏王國)을방불케 했다.충절(忠節)의 명장(名將) 최영(崔塋)은 수많은 국내외(國內外) 침입과반란이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현(貢獻)했으며, 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민족(民族)의 얼이요, 최씨의특성(特性)이다.
그외 고려 때 문신(文臣) 최유청(崔惟淸)·최윤의(崔允儀)·최유엄(崔有)·최재(崔宰)·최항(崔沆)·최충(崔 ) 등이 유명했으며 무신(武臣)으로는 최충헌(崔忠獻) 이 있다.조선(朝鮮) 때 와서 명신(名臣) 최명길(崔鳴吉), 양명학(陽明學)의 대가 최석정(崔錫鼎), 학자(學者), 최수성(崔壽 ), 문신 최응현(崔應賢)·최항(崔恒)·최만리(崔萬理)·최익현(崔益鉉), (東學)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崔南善), 항일투사 최재형(崔在亨), 동학의 제2교주 최시형(崔時亨)등 많은 최씨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한 씨족(氏族)의가문(家門)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문과(文科) 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가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 이조사회(李朝社會)에서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 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 많아 견식과인격(人格)을 겸비하고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최시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으므로 신라와 고려에서 명성(名聲)을 날린 최씨가조선(朝鮮) 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않는 사람이 많았다. 경주시 고동에 자리한  최부잣집(崔富者家) 은 12대 만석(十二代萬石)과 10대 진사(十代進士)로 유명하여 문공부가1969 년에  신라의집 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기로 했다. 이조(李朝) 때 명종(明宗)·선조(宣祖)·인조(仁祖)임금은“선현(先賢)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적서(嫡庶)를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고전교(傳敎) 하였으며, 정종(定宗)은“태강(汰講:서원을 도퇴시킴 ,즉파면 )의 예(例)에넣지 말고범하는 수령은처벌하라 ”고 전교 하였다. 이렇게 신라 (新羅)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씨(崔氏)들이 등장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구국(求國)의 대열에 앞장섰던항일투사(抗日鬪士)와 의병(義兵) 및 근대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최씨(崔氏)들의 거룩한발자취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名門)인최씨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崔氏上系譜(최씨 상 계보)   (청록색 전주 최씨 직계입)

   一世(일세)

蘇伐都利(소벌도리)

   十五世   (십오세)

殷義(은의)

   二世(이세)

大伐利(대벌리)

   十六世   (십육세)

瑞鳳(서봉)

   三世(삼세)

小伐利(소벌리)

   十七世   (십칠세)

惠陽(혜양)

   四世(사세)

大平(대평)

   十八世   (십팔세)

太壬(태임)

   五世(오세)

昊彬(호빈)

   十九世   (십구세)

東雄(동웅)

   六世(육세)

광允(광윤)

二十   世   (이십세)

享公(향공)

享一(향일)

   七世(칠세)

조(조)

二十一世(이십일세)

林芬(림분)

   八世(팔세)

서(서)

二十二世(이십이세)

桂陽聖(계양성)

桂陽賢(계양현)

   九世(구세)

공(공)

二十三世(이십삼세)

山允(산윤)山斗(산두)

利貞(이정)

   十世(십세)

局(국)

二十四世(이십사세)

致遠(치원)棲遠(서원)

十一世(십일세)

茂(무) 東之奈(동지나)

二十五世(이십오세)

慇含(은함) 道含(도함)

十二世(십이세)

비(비)

二十六世(이십육세)

添老(첨노)

十三世(십삼세)

개(개)

二十七世(이십칠세)

鈞(균)

舜爵(순작;전주최씨 始祖)

溫(온)

十四世(십사세)

敞(창)

 

 

     

 

  전주최씨(全州崔氏)
                   

                  시   조 ; 최순작(崔純爵)
             
                  집성촌 ;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

전주, 최씨(全州 崔氏)는 비교적 세계(世系)가 복잡하다.문헌에의하면고려 정종(靖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 (門下侍中)으로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에 봉해진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일파(一派)와, 고려 때 동북로도지휘사 (東北路都指揮使)가 되어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순졀하고 완산군(完山君)에 추 봉된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일파 (一派)가 있고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 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 (崔群玉)을 시조로 하여세계(世系)를 이어 오는  파가 있다.  최씨 상계세보(崔氏 上系世譜)에 기록된 것으로는 최순작(崔純爵)파와  최균(崔均)파는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고 최군옥 (崔群玉)은 동주(東州;철원)최씨 의 시조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그러므로 전주 최씨는 경주 최씨와 도원(同源)이라고 할 수있다.전주 최씨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비교적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특히 고려 때에많은 업적을 남겼다.  

                                                                                  
최순작(純爵)의 후손으로는 순작의 아들 숭(崇)이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예종 때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처 인종 때 호부(戶部) 및 예부(禮部) 상서를 지내고 예문관 제학( 文館提學) 등을 역임했스며, 그의 아들 남부(南敷)는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문종(文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수문전 태학 겸 대장군(大將軍)을 영임하여 전주백(全州伯)에 봉해졌다. 당대 권력 가의 세도에 개탄하여 현랑 및 비서소윤(秘書少尹)을 지내다가 병을 핑계로여 벼슬에서 물러난 전(佺)은 남부의 아들이고 전(佺)의 아들 정신(正臣)은 1226년(고종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전중어사(殿中御使)를 거처삼사부사(三司副使)로  있을 때 좌간의(左諫議) 유경탄(柳璥彈)과 최항(崔沆)의 참담한 실례(失禮)를 탄핵하다가 북방으로 귀향갔다.
다음해 풀려나와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고 원종(元宗) 때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로서 다시 삼사(三司)에 들어가 임연(林衍)의 권리남용한 죄를 논(論)하다가 다시 남방(南方)으로 귀향을 가니 세인(世人)들이 감탄하여 최시랑(최정언)의 정직함은 그 이름과 다르지 않다고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득평(得枰)은 청렴과 정직으로 모든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으나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여러 차레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조정의 참소를 당하니 지방관(지방관)으로만 재임했으나 사직하고 물러났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냈다.
득평의 아들 재(宰)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중부령(中部令)을 거처 감찰지평(監察持平)이 되었고 1347년 (충목왕3) 정치도감(整治都監;전담 개량을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 설치되어 각 도의 양전(量田 ; 토지를 측량함)이 실시될 때 판관에 임명되었으나_“전왕 때에 잘못을 그 당시의 실무자가 다시 파혀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개탄하며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충정왕 때 지양주사(知襄州事 ; 양주군수)로 나갔다가 원나라 강향사(降香使 ;불사로 향을내리는 원나라 사신)가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욕보이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가했다.1362년 (공민왕11) 상주목사 (尙州牧使)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으로 피난하는 왕(王)을 호종(扈從)하는 관리들을 푸대접하여 한때 파직, 뒤에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뒤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전임, 1377년 (우왕3) 완산군(完山君)에 다시 봉해졌다.최아(崔阿)는 득평(得枰)의 형인 입평(立枰)의 아들이다 고려 말 평장사(平章事)로 있으면서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당시의 복잡한 국내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완산군(完山君)에봉해졌다.
전주 최씨(全州崔氏) 중흥의 시조로 역사의 흐름속에 가문의 번성을 이룩해온 후손들을 많이 배출시킨 최유경(崔有慶)은 충숙왕 때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낸 재(宰)의 아,들로서 1372년(공민왕21) 판도좌랑(判圖佐郞)에 이어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있을 때 충렬과 의협심 으로 의(義)를 중요시하여 환자(宦者 ; 내시) 윤충좌(尹忠佐)의 교만 방자함을단호히 탄핵최씨의 기개를 나타내었다.
1375년(우왕1) 전법총랑(典法摠郞),우왕14년 양광도 안렴사(楊廣道 按廉使)를 거처 요동정벌 때에는 서북면 전운사 겸 찰방(西北面轉運使兼察訪) 이 되고 최영(崔塋)이 실각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으며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외 여러 벼술에 올라 왕조에 공헌 했으며 청렴결백 (淸廉潔白)을 일생의 지표로 삼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청주(淸州)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 그의 여섯 아들도모두가 나라에 충성했음으로 전주 최씨 최순작(崔純爵)의 후손 양도공파 (襄度公派)의 중시조(中始祖)로 섬기고 있다.
                                                                                                
유경의 장남 사위(士威)는 항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차남 사의(士儀)는 1424년(세종6) 상호군(上護軍)을 거처 태종 때 판돈령부사(判敦寧部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삼남 사규(士規)는 중백부(仲伯父) 최덕성(崔德成)에게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도판관(都判官)에 천거되었고 도관좌량(都官佐郞)·영평군수(永平郡守)를 거처 1405년(태종5) 24세 때에 사헌부 남대지평(南臺持平)을 지냈고 사남 사강(士康)은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두루 역임하여 그 명성을 높혔으며 두딸은 성녕군(誠寧君 ; 태종의 아들)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여섯째 아들)에게 ,손녀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 ; 세종의 네째 아들)에게 출가시켰다.다섯째 사용(士庸)은 세종 원년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내고 실록청당랑(實錄廳堂郞)에 뽑히어서강원(書講院)에 들어갔다가 1423년(세종5)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중추부 상호군(中樞府上護軍)을 지냈다. 이렇게 문신(文臣)의  가문에서 충절의 맥을 이어온 선조들의 기개를 어 효(孝)로써더욱 빛을 낸 유경(有慶)의 여섰재 아들 사흥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효심(孝心)이 극진 하였다모친의 환후가 위중하므로 백약이 무효라 하늘에 기도하고 다리의 살을 베어 탕약을 대신하고 지성으로간호하여 회복킴으로 성조이 정여(旌閭 ; 충신,효자,열녀들을 표창하기위해살던 동네에 정문을 세워기리던것)을 충북 진천군 문맥면에 세웠다.
그후 전주 최씨 (全州崔氏)의 충절과 기개를 이어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일등공신 최명길(崔鳴吉)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최기남(崔起南)의 아들로 일찍부터 당대의 명망높은 문신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명문의 긍지를 남겼다.16세 때에 성균관 유학생이 되어 1605년 (선조38) 사마시를 거처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직· 공조좌랑·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1612년 (광해군4)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하여 파직을 당하고 가평(加平)으로 내가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 등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交遊)하며 문학에 정진,정치적 변혁으로당시 이단시(異端視)되었던 양명학(陽明學 ;중국 명나라) 왕수인이 주자학을 반대하여 주창한 철학)연구에 몰두했다.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귀(李貴) 등과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로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정랑·참의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 ,1623년(인조3)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호패법( 牌法 ; 이조 때 16세 이상된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의 실시를 주장, 호패청당상( 牌廳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하였다. 1627년 (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떼에는 왕을 강화로호송 하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있을 때 1636년(인조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청진(淸陳)을 왕래하여 강화(講和 ; 싸우던 나라끼리 평화를 론함 )의 조건을 타진했으며 1637년(인조15) 우의정(右議政)을 거쳐좌의정이 되어 사은사 (謝恩使;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러가는 사신)로심양(瀋陽)에 갔다가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斥和臣 ;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극력 배척하던 신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가 유명함)의 귀환을 교섭,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1643년(인조21) 명(明)나라와 내통한 관련자라 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인조23년에 풀려나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되고 어영청 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그는 특히 학문과문장에 뛰어났으며 서예(書藝)는 동기창체(董其昌體 ; 글씨의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함)를 잘 썼다.저서에는 지천집(遲.川集)·경서기의(經書記疑) ·병자봉사(丙子封事) 등이 있다.) 그의 형 내길(來吉)과 동생 혜길(惠吉)도 명문의 맥을 이어온 가문의 인물들이다. 동생 명길(鳴吉)과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이 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1624년(인조2) 부원사(府院使) 이괄(李适)이반란을 일으켜 조정이 혼란하자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하고 형조와 공조참의를지내고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  졌다. 그 뒤 경기도 관찰사· 공서판서를 지내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추증 되었다. 명길의 동생 헤길(惠吉)은 1613년(광해군5) 사마시에 합격,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공조좌랑·익찬 등을 지내고 1625년(인조3)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사서(司書)를지내고 1626년(인조4)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이유도(李有道)를 틴핵하다가 송화 현감(松禾縣監)으로좌천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승지(承旨)·병조참의(兵曹參議)·대사간(大司諫)을지내고 1644년(인조22) 세폐사(歲幣使 ;해마다 음력 10월에 중국에 곡물을 바치러가던 사신)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도승지·경기도 관찰사·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등을 지냈다.

성품이 온화하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는 매서운 충절의 절개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했으나공신에 책록됨을 사양했다.혜길의 아들 후량(後亮)은 영의정 명길(鳴吉)에게 입양하여 1637년(인조15)병자호란(丙子胡亂)이 강화(講和 ;싸우던 나라끼리 평화를 논함)되자 대신들의 아들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갈 때 잡혀 갔다가 1645년(인조23)에 귀국,효종 때 생원(生員)이 되어 음보로 청풍부사(淸風府使·한성부 좌윤(漢城府佐尹)이 되었으나 사퇴했다. 그의 아들 석정(錫鼎)은 후상(後尙)에게 입양(入養)하여 당대의 명신의로 명성이 높은 박세채(朴世采)·남구만(南九萬)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666년(현종7) 진사가 되고 1671년 (현종12)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설서·봉교·교리를 역임 ,1685년(숙종11) 부제학(副提學)으로윤중(尹 )을 변호하고 당시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논척(論斥)하여 파직되었다. 그후 1687년(숙종13년) 선기옥형(璿璣玉衡 ;혼천의라고도 하며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기구)을 수립하는 데 참여 , 이조참판·한성부 판윤·이조판서를 지내고 1697년(숙종23) 우의정(右議政)으로주청사(奏請使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수시로 보내던 사신)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699년(숙종25)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여 국조보감(朝 鑑 ;이조 역대의 사적을 적은 책)의 속편 편찬과 여지승람( 地勝覽 ; 8도 지리지)의 증보를 주청, 그를 실현켜 하므로역사적 중요한 기록을 남겨 하였으며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당쟁 속에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전후 여덟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당시의 크고 작은 정치적 변혁에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성실히 개발하여 타인들에게 명문의 혈족임을다시 한번 확인 시켰다.
1710년(숙종36) 영의정으로 내의원 도제조 (內 院都提調)를 겸하다 왕의 병환 때 시약을 잘못한책임으로사직을 하였다가 이듬해 복관 되엇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조부(명길)의 학문을 계승, 정제두(鄭薺斗)와 함께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 발전에 힘썼으며 경세정운 도설(經世正韻 說)을저술하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 저서에는 명곡집(明谷集) 편서로는 좌씨편선(左氏編選)·운회전요(韻會箋要)·전록통고(典錄通考)·례기유편(禮記類篇)외 많은 필적을 남겼다,그외 1680년(숙종6) 급제,1684(숙종10) 정언(正言)으로 이익(李翊)을 탄핵하다 파직당한 석정의 동생 석항(錫恒)은 1687년(숙종13)에 정언(正言)에 복직되고 부수찬(副修撰)·경상도 관찰사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거쳐 1708년(숙종34) 형조판서, 1721년(경종1) 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이 되어노론(老論) 측 세제(世弟;영조)의 대리청정을 소론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등과 함께 반대하여 철회켜하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1725년(영조1) 신임사화(辛壬士禍 ;왕위의 계승문제를 둘러 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이러난 당쟁)의 원흉이라 하여 관작(官爵)이 추탈 복관을 여럽번반복 하다가 결국 추탈되고 말엇다. 석정의 아들 창대(昌大)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국 고대 여러 학파와 그들 저서의 총칭) 와 경서(經書)에 밝아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곤륜집(昆侖集)을 저술했다.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최씨 가문의 긍지를 후세에 전해준 인물이라 하겠다. 1694년(숙종20) 문과에 급제검열(檢閱)·설서(說書)· 부수찬(副修撰)·을 거처 1698년(숙종24)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전국을 돌며만백 성들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였고, 이어 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헌납(獻納)·응교( 敎)를 거처 1704년(숙종30) 사서(司書)·이조 정랑(吏曹正郞),1706년(숙종32) 겸사서(兼司書)·보덕(輔德 ; 세자 시강원에서 경사와 도의를 가르치던 정3품 벼슬)을 지낸 후 1711년(숙종37) 대사성(大司成)에 승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아 파면당했다. 그외 숙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관(寬)은 사의(士儀) 의 10 대손이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충절과 기개를 이어 가문의 번영을 이룩한 또 다른 일파의 시조 최균(崔均)은 고려 시대의충신으로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재상 최윤의(崔允儀)의 천거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명종(明宗) 초에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으로 전임, 1172년(명종2) 금(金)나라에서사신을 보내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경위를 조사하자 접반사(接伴使)로서 잘 해명했다1174년(명종4)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의 토벌을 내세워 반란을 이르키자 이를 정벌하러 동북노 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가 되어 화주(和州)에 들어가며 “내가 보건대 여러성(城)은 위총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 모두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적병이 도착한다면 주군(主軍)의 향배(向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회피할 수야 있읍니까”하고 주영(和州營)으로 들어갔다.그 날 밤 적장 김박승(金朴升) 조관(趙冠) 등이 와서 공격을 하니 낭장 이거(李 )가 문을 열어 주어병마사 대장군(兵馬使大將軍) 이의(李儀) 어사(御史) 지인정(智仁“挺)과 함께 붙잡혔다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죽음을 직면하여 불의를 참지 못한 그의 강직한 충절은 적으로하여금 더욱 가혹한 대우를 채찍질했다.  “너희 역적의 괴수 위총은 한낱 군졸로서, 지위가 팔좌(상서복야의 계급)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은혜가 더 클 수 없는데 이에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여 군사를이르켜 영모를 꾸미거늘 너희들이 어디로 도망할 것이냐? ”하며 꾸짖다가 이의(李儀)와 막료 군교(軍校)들과 함께 순절했다.그는 문장에도뛰어났으며 글씨를 매우 잘 썼다. 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고 아들 보순(甫淳)은 문과에 급제한 후 황주(黃州)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처 소부감(小府監)이 되어 1208년(희종4)금나라 황제의 즉위 축하문을 지었다가 문장(文章)이금나라 황제의 뜻에 거슬려 파직당헸다가 후에이조시랑(吏曹侍郞)이 되고 1222년(고종9) 참지정사(參知政事 ; 고려 때 종이품 벼슬)로서지공거(知貢擧 ; 고려, 때 과거의 시험관)을 겸했으며 중서시랑·평장사·판병부사, 이듬해 수문전 대학사·동수국사를 역임 1226년(고종13) 감수국사(監修國史 ; 춘추관의 최고 관직,종1품)으로 수찬관(修撰官 ;정이품벼슬)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했다.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문신의 절조를 지킨 윤개(尹愷)는 보순(甫淳)의 아들로 당대의 집권자 최의(崔儀)가 현량한 선비들을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무리들의 참소에 현혹되어 무모한 살육을 함부로 하여 이를 개탄,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최의가 죽자 1258년(고종45) 좌부승선(左副承宣)에 발탁, 이병부(吏兵部)의인사권을 장악하다 1263년(원종4)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병부상서(兵部尙書)·태자빈객(太子賓客)이되고 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그의 첨의찬성사(僉議成事)를지낸 비일(毗一)의 아들 성지(誠之)는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계림의 관기(管記 ;임관된 관리들에게주는 사령서)를 거처 사한(史翰)이 되어 춘궁에 속해 있었다. 충선왕 (忠宣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원나라 무종이 내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충선왕과 함께 귀국하여 동지밀직사사·대사헌이 되고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거처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원나라에서 배워온 역수(易數)의 학(學)은 그 뒤 고려의 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 성지의 아들 문도(文度)는균(均)의 6세손으로 1292년(충렬왕18) 출생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했으며 일찍이 원나라에 갔다와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처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다.그외 균(均)의 후손으로 을의(乙義)가 고려 공민왕 때 사헌부사(司憲府事)로 있다가 밀직사(密直使)를지냈다. 삼중대광(三重大匡)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은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郞平章事)를 지내고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그의 후손 송년(松年)은 고려 명종(明宗) 때 완산(完山)의 명사(名士) 최척경(崔陟卿)·최균(崔均) 등과 더불어 완산의 삼최(三崔)라 일커어 졌으며 문장으로도이름이 높았다. 문신(文臣)들의 압도적인 권력투쟁 속에 혈전의 공으로 가문을 빛낸 무신 칠석(七夕)은1381년(우왕7) 해도(海島)의 만호(萬戶 ;무관직,정사품 벼슬)가 되고, 1388년(우왕14) 밀직부사로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 소탕에 공을 세우고 창왕(昌王) 때 박위(朴 )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조선이 개국되자 경기우도 수군절제사를 역임하였다.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로 세상과는 등을 돌리며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굳건한 절개로먼 후대의 자손들에게까지 명문의 긍지를 남기고 간 자랑스런 인물,양(瀁)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생질로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1392년 고려가 망하자 사직하고 전주 대승동 봉강리에 퇴거하였다. 조선 태종이 친구로 우대하며 전(田祿)을 하사했으나 끝내받지 않았다.개성 두문동 72현(杜門洞七二賢 ;고려가 망하자 유신 72명이 끝까지이조의 록을먹지 않고 절의를 지키다가 수절함)에 포함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조선의 유지를 쫓아 끝까지 벼슬길에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역 ( )의 아들 철견(鐵堅)은 1585년(선조18) 참봉(參奉)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여러 버슬을 역임한 후 1591년(선조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다녀왔고 1592년(선조25)임진왜란 때는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전주(全州)를 방어했으며 내자시정(內資寺正)·장령·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601년(선조34)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죽음으로서 매운 절개를 지켰던 조선의 의사(義士) 기필(琦弼)은 1593년(선조26) 진주(晋州)가 왜군에게포위되자 6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성(城) 중에 들어가 군량 공급을 돕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여 나라에서 사당을 세워 창렬사(彰烈祠)라 명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외 전주 최씨의 인물로는,조선의 무신(武臣) 강(堈)이 수군절도사·오위도총부 부 총관을 지내고 광해군(光海君)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의 혼란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퇴,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고, 그의 형균(均)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름난 의병장(義兵將)강(堈)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가칭 풍운장(風雲將)이라  하고 고성(固城)·사천(泗川)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않았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형제가 함께 무고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 안(安)과 함께 의병을 모았던 경행(敬行)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의거(義擧)했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벼슬에 오르지않고두문불출 했다 이렇게 고려의 흥망과 조선의역사속에 문신(文臣)과 무신(武臣)혹(或)은 선비로서 전주최씨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이 없었고, 벼슬 보다는 문장(文章)과 충의(忠義)로서, 문무(文武)의 영화(榮華)보다 효(孝)로서 명문의 긍지를 가졌고, 때로는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 자신의 능력을 실하게 개발하여 선비로서 만족하고 한 세상을 아쉬움없이 살다간 전주 최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나라에 공헌했다.

 

全州崔氏九修世譜源流分派圖(청록색;판윤공직계임)

始祖一世

純爵 (完州伯 文烈公)

ㅣ

崇 (상서)                        공

ㅣ

南敷 (文康公)

ㅣ

佺(少尹)                   選                       健

ㅣ

正臣

ㅣ

得枰(典書)      直枰              立枰

ㅣ                                        ㅣ

宰                                        阿

ㅣ                                        ㅣ

思美(判書) 德成.有慶(平度公)             龍生(按廉使公)  龍角(판서)  龍甲    龍鳳

ㅣ             ㅣ     ㅣ                         ㅣ                   ㅣ              ㅣ          l

恕 愿 懿     ㅣ    士 士 士 士 士 士    君 田            邕 哲            濚 福     乙 의 단

                ㅣ     威 儀 規 康 庸 興    甫 雨              ㅣ                  生     仁 ㅣ

按 重         ㅣ     ㅣ ㅣ ㅣ ㅣ ㅣ ㅣ     按                 ㅣ                         ㅣ 檢

廉 郞 別    좌     判 襄 持 敬 僉 監      廉                 文                         同 漢

使 將 將    윤     尹 度 平 節 柩 務      使                 間                         正 城

公 公 公    공     公 公 公 公 公 公      公                 公                         公 公

派 派 派    파     派 派 派 派 派 派      派                 波                         派 派

 

전주 최씨 구수 세보원류 분파도(청록색 판윤공파직계임)

시조일세

순작

 ㅣ

숭(상서)                     공

 ㅣ

남부(문강공)

ㅣ

전(소윤)                 선                        건

ㅣ

정신

ㅣ

득평(전서)      직평          입평 

ㅣ                                  ㅣ

재 (판서)                                 아

ㅣ                                             ㅣ

사미(판서)  덕성   유경(평도공)              용생(안렴사)   용각  용갑(판서) 용봉(중랑장)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서 원 의       ㅣ      사 사 사 사 사 사    군 전             옹 철     영 복       을 의 단

ㅣ ㅣ ㅣ       ㅣ      위 의 규 강 용 흥    보 우                 ㅣ         생        인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안 중 ㅣ       ㅣ      ㅣ                          안                   ㅣ                    ㅣ 검

렴 랑 별       좌      판 양 지 경 첨 감      렴                   문                    동 한

사 장 장       윤      윤 도 평 절 구 무      사                   간                    정 성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공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파

 

 

全州崔氏九修世譜分派排編圖

     (전주 최씨 구수세보 배편도)  청록색 판윤공파임

.漢城判尹公派(한성윤공파)

士威(사위)

   處士肇派             (처사조파)

   學生啓派        (학생계파)

   禮判達派             (예판달파)

   學生啓派             (학생계파)

.

判敦寧公派(판돈영공파)

사의(사의)

   僉知厚派             (첨지후파)

   司諫근派             (사간근파)

   奉禮포派              (봉예포파)

.

持平公派(지평공파)

士規(사규)

   直長虎派          (직장호파)

   殿直熊派              (전직웅파)

   直長狗派              (직장구파)

.

右贊成公派(우찬성공파)

士康(사강)

奉禮承寧派           (봉예승영파)

郡守承靖派           (군수승정파)

僉正承宗派           (첨정승종파)

.僉柩公派(첨구공파)

士庸(사용)

直長安禮派           (직장안예파)

懸監安智派          (현감안지파)

護軍安孝派          (호군안효파)

萬戶安信派          (만호안신파)

持平安仁波          (지평안인파)

.監務公派(감무공파)

士興(사흥)

判官舜民派           (판관순민파)

承旨禹民派           (승지우민파)

      武民派                 (무민파)

      俊民派                (준민파)

      逸民派               (일민파)

縣監秀民派           (현감수민파)

 

 

全州 崔氏 世系表(판윤공파 후손 용규 직계)

      시조

      일세

純爵完州伯 文烈公(완주백 문열공)

   십육세

德龍(덕용)

      이세

崇(숭)     공(공)

   십칠세

景仁(경기)  景麟(경린)

景麒(경기)

      삼세

南敷(남부)    南기(남기)

   십팔세  

汝哲(여철)

     사세

全(전)   선(선)  健(건)

   십구세

爾衡(이형)

     오세

正臣(정신)  直臣(직신)

   이십세

應白(응백)

     육세

得枰(득평) 直枰(직평)

立枰(입평)

 이십일세

後泰(후태)  後寔(후식)

後碩(후석)  後寬(후관)

     칠세

宰(재)

 이십이세

恒大(항대)

     팔세

思美(사미)  德成(덕성)

有慶(유경) 전주 최씨 중시조

 이십삼세

雲益(운익)

     구세

士威(사위)  士儀(사의)

士規(사규)  士康(사강)

士庸(사용)  士興(사흥)

 이십사세

秉俠(병협)   秉碩(병석)

     십세

 

 肇(조)

 

 이십오세

成澈(성철)  均澈(균철)

永澈(영철)  良澈(양철)

  십일세

善敏(득위)  得緯(득위)

 이십육세

準植(준식)  云植(운식)

  십이세

殷靖(은정)

 이십칠세

憲必(헌필,字 天珏)

憲海(헌해:字 觀珏)   顯珏(현각)

  십삼세

雲成(운성)

 이십팔세

益奎(익규)

用奎(용규) 聖奎(성규)

点奎(점규)  成旭(성욱)

  십사세

壽萬(수만)

 이십구세

鍾南(종남)  鍾讚(종찬) 鍾煥(종환)

鍾元(종원) 龍(용)   現(현)

  십오세

至減(지감)

 삼  십  세

光秀(광수)  東賢(동현)

 

 

    文烈公二十六世孫 爲始世行圖(문열공이십육세손위시세행도) 

二十六世

二十七世

二十八世

二十九世

三 十 世

三十一世

三十二世

三十三世

三十四世

ㅇ 植

 炳 ㅇ

 ㅇ 奎

 鍾 ㅇ

 ㅇ 洛

 東 ㅇ

 ㅇ 燮

 園 ㅇ

 ㅇ 鎬

三十五世

三十六世

三十七世

三十八世

三十九世

四十世

四什一世

四十二世

四十三世

 承 ㅇ

 ㅇ 根

 容 ㅇ

 ㅇ 敎

 善 ㅇ

 ㅇ 洙

 相 ㅇ

 ㅇ 陽

 用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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