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야 -너무 잘됐다. 축하해 제희야, 정말 축하해. 전화선을 타고 제희의 행복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영진에게 전화를 했다. -걔 너무 힘들어했잖아 게다가 유학생이라 학비는 세배나 더 비싸고..
얼마나 다행이니, 부담이 줄었겠다. -사귀다 그런거야? 사랑은 한 대? -제희 성격 알잖아. 싫으면 죽어도 싫어하는 것. 한눈에 반했다던데? -다들 그렇게 가는구나. 우린 언제할까? 영진이 농담처럼 물어왔다. -비행기 표 끊어야하는데 -그런건 안 보내주는건야? -대신 일주일간 숙식해결 시켜 준대잖아., 학생이 무슨 돈 있니?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이라. 웬지 허전해지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일주일간의 휴가인 셈이다. 얼마나 행복할까. -뭐하는데.? -지금 회사 다녀, 버클리대 경영나왔거든. -괜찮은데? 어떻게 알게 된거야?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나 지금 너무 정신 없어. 정신 없어서 행복한지도 모를 지경이야. 제희의 마지막 말은 너무 행복해라고 들렸다. 한달후 비자를 얻고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 기까지도 제희의 결혼은 꿈만 같았다. 제희 부부옆에 영진이와 내가 나란히 서는 상상도 해보며. -정말 언제하지? 우린? 영진은 그제서야 결혼이 피부에 닿았나보다. 나만큼이나 자유주의자라서
속박받기 싫어하는 그를 내가 모르는게 아니다. 완전히 코꽨다니까 결혼하면.
결혼한 동창들이 영진에게 나중에 하라며 연발했다. '나 코 꽸어. 맨날
매여있다니까.'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영진이와 나는 줄곧 첫사랑 얘기를 했다. -야, 진짜 시간가는지 모르겠다. -너 질투 안할거지? -너나 하지마. 영진의 첫사랑은 국민학교 때란다. -얼굴도 하얘가지고. 너도 알잖아, 지인짜 예뻤다. 아마 우리반 남자애들
첫사랑은 다 그애일걸. 영진이와 나는 같은 국민학교 출신이다. -글세, 하긴 예쁘긴 예뻤지. 어떻게 변했을까? 걔는 동창회에 절대
안오잖아. -그대로라던데. 사실 난 약간의 질투에 그애가 커서 미워졌길 바랬지만. -넌 누구 좋아했냐? -나? 내 첫사랑은,... 내 첫사랑은 국민학교 때가 아니다. 그런 풋사랑이 아니다. -난 대학교때야. -어? 누군데? -학원 다닐땐데, 알지? SDA 청량리로 다녔거든, 거기서 가르치던
선생님한테 내가 반해가지구, -그런 애들이 너였구나? 재미교포나 외국선생 쫒아다니던 애들. 영진이 은근히 경멸한다는 듯이 내리 깔았다. -미쳤냐? 그럴 용기가 있었으면 어쩌면 그때 그것이 짝사랑만으로 끝나진 않았으리라. -펌프장 앞에서 16-1번 버스를 타는데 학원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
특히 펌프장 근처에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거든.
오월이었는데.. 밤에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면서 바람한번 불면 꽃잎이
후두둑 떨어지는 거야. 아마 내가 그 짝사랑을 절대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 일거야. 날마다 괴로운 마음을 참고 아카시아 향기 흩날리는
봄바람 속을 걷자면 더 슬퍼졌거든. 밤에, 그것도, 밤공기가 얼마나
슬펐는데. 거기 다시한번 가보고 싶어, 지금도 그럴까? -어떤 사람인데 우리 미연이 마음을 그렇게 괴롭게 했어? -몰라, 이젠 전혀 얼굴도 기억안나. 벌써 몇 년전이니? 이야 10년이다.
10년이 되어간다. -미국인이야? -아니, 교포였어. 이름이 진니. 사실 Lee Jean 인데 우리가 진리라고
애들끼리 킥킥거리고 했어. 재밌지? 진리. 이젠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안나, 한번도 우리반 선생님이 되어본 적도 없거든. 세상에 내가
거길 1년이나 다녔었는데. -너처럼 끈기 없는 애가 웬만큼 좋아하니, 거길 1년이나 다니지..그럼
1년동안 맘 졸였겠네. -아니, 여름에 자기네 나라로 갔다가 내가 그만둘 때쯤 다시온 것
같아. 그사람하면 기억나는 것은, 여자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화장실에
들어가면 진리라는 말 밖에 안들렸어. -그럼, 말 한번도 못하고 속만 태운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영진이가 낄낄거렸다. 그때 내가 용기있게 나섰으면... 하는
후회도 해보지만. -너도 참,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구나. 우린 씁쓸한 첫사랑이자 짝사랑 얘기를 하며 어렴풋이 옛날 기분으로
돌아가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 못하는 것은, 그사람 늘 수업끝나면 항상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어. 우리가 마지막 수업이었거든. 수업이 끝나
모두들 다 나가고 텅텅 빈 곳에 혼자 우두커니 무릎에 팔을 얹고 구부린채
앉아있는 거야. 마치 누굴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서 항상 늦게 나오던
나는 그 사람을 혼자서 볼수 있었어. 복도에 딱 우리 둘만 있는거야.
그사람 앉아있는 의자 앞을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지나갔어. 하지만
한번도, 그래, 나도 한번도 내가 그사람 좋아하는 거 티낸적 없었어...그냥
맘속으로만,, 날마다 수업끝나면 그사람 볼수 있으니까. 가끔 없는날은
너무 슬퍼서 정말 속으로 울면서 아카시아나무아래를 걸어갔던 것 같아. 승무원이 음료수 쟁반을 들고 돌아다녔다. 그사람은 왜 항상 거기에 앉아있었을까, 아무도 없는데. 앞의 대형 스크린에 시카고 남은 시간 8시간이라고 써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교포 참 좋아해. 영진이는 은근히 비꼬았다. -영어를 하니까, 한국말은 떠듬거리고. 아마 신기하고 귀여워서 그럴거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약간의 사대정신이 남아있어. 남자건 여자건,
외국인, 특히 영어만 하면 다 좋아하잖아. -하긴 어떤 교포남자는 여자친구 사귀러 한국 온대. 그래서 한꺼번에
대여섯명씩 사귄다는 거야. 내가 말하고도 씁쓸해졌다. 적어도 나는 같은 이유에서 그 남자를
좋아하진 않았어. 그냥 그 사람 분위기, 쓸쓸해보이고, 상냥하고. 특이했어.
가무잡잡한 피부에. -한달에 한번인가? 거기가 사실 교회 비슷하잖아. 채플있었거든.
그때 처음 본 것 같아. 채플전에 화장실에 갔는데 진리,진리, 진리,
진리가 어쩌고 저쩌고...하기에 도대체 진리가 누구야?하고 의아해 했는데,
그사람이 나와서 자기 이름이 진리라 하며 목사가 한국말로 설교하면
영어로 바꾸는 거야. 키가 크고, 참 착해보이고, 잘 생겼었던 것 같아.
야. 내 기억이 이렇다니까. 얼굴은 전혀 생각도 안난다. 다시 만나도
못 알아볼 것 같아. 채플이 끝나고 목사님은 앞문에 그사람은 뒷문에
서서 사람들 나가는 걸 지켜보는데 난 일부러 맨 나중에 천천이 그 사람
앞을 지나갔다. 일부러,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느끼해. 이제 안그러니? -말마, 이러다 호빵되겠다.
제희가 반갑게 마중나와 있었다. - 야, 반갑다. 몇 년 만이니? 네가 제작년에 갔으니..벌써 2년이다.
너 배웅한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한다고 하니.. 제희 얼굴은 약간 핼쓱해 보였다. -힘든가 보내. 영진이가 먼저 물었다. -응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엄마도 내일 오신대. 힘들어 죽겠어.
사실 하는건 별로 없어, 그이가 다 하거든. -야,야, 징그러 . 벌써 그이라고 해? 영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붉히는 제희가 예뻐보였다. 행복하면 저렇게 보이는 구나. -가자. 제희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방 한칸짜리 아파트는 생각보다 컸다. -돈 없다더니... 잘사는 것 같네 영진이 말했다. -part time job 있잖아. 캐셔. -힘들겠구나. 돈벌랴, 공부하랴, 거기다 연애까지. 내말에 모두들 웃었다. -우선 좀 씻고. 나는 샤워하러 들어갔다. 남자용 면도기도 핑크색 면도기 옆에 놓여
있었다. -수건 꺼내 쓸게. 내가 소리질렀다. -그래. 샤워를 하고 나오니 영진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이주헌입니다. 제희 신랑될 사람이 인사했을 때 놀랐다. -한국말 잘 하시네요. -네, 한국에서 한 2년 있었거든요. -영어 가르쳤대. 제희가 부연 대답했다. 제희는 너무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눈길 한번
그 사람에게서 떼질 않았다. 저녁은 한식이었다. -대충 했지만 맛있게 먹어. 제희가 미안해 했다.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꽤 걸리죠? 열두시간인가? -아, 아뇨. 그래도 둘이 오면서 첫사랑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영진이 그 말 끝에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친구도 글쎄 첫 사랑이 교포였다지 뭡니까? 이주헌이란 사람은 '교포'란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했다. 거봐하는
눈빛으로 나는 영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주헌이 물었다. -뭐, 그냥 학원에서 영어선생님이었어요. 나는 약간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네, 주헌은 잠시 멈칫하더니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재밌다. 첫사랑, 그래 영진이 너는? 제희가 물어왔다. -제히 너도 알잖아. 애령이, 그 얼굴 동글하구 하얀애. 내가 복수하듯 대답했다. -어머나, 어머어머어머...정말? 하긴 남자애들 다 그애 좋아했지. 제희가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자기는? 제희가 주헌에게 물었다. -응, 난 없어. -거짓말. 모두들 동시에 대답하고 웃었다. -정말이야, 당황한 듯 갑자기 서투른 한국말처럼 튀어나오자 더 재미있었다. -재밌다. 우리 밥먹고 진실게임 할까? 제희가 제안했다. -넌 결혼 앞두고,,,애가 참. 영진이 핀잔 주었다. -그래 친구분들 피곤할텐데. 주헌도 거들었다. -그럼 다음에 하지..
영진은 주헌집에 자러가고 나는 제희아파트에 남았다. 둘이 침대에
이불덮고 누웠다. -너 알지? 그 남자. 이름도 까먹었다. 그때 내가 대학다닐 때 밥도
못먹고 난리쳤잖아. -알아. 너 그때 죽는다고 해서 얼마나 주위사람들이 힘들어 했는데. 제희는 그랬다. 좋아도 싫어도 죽을 만큼 그렇게.. -그 사람이 첫사랑인 것 같아. 참 신기해. 첫사랑이란게. 그 때 그
감정이 영원히 남는 거 있지. 주헌씨를 사랑하긴 해도 그때 그 만큼은
아닌 것 같이. passion 그래 열정, 열정이 사라졌어. 불같이 사랑했었어.
궁금하다. 지금 뭐하는지. -결혼 앞두고 참나.. 네 주헌씨 그렇게 말하는거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그래. 제희가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그사람 지금 나타나서 내게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글쎄 넌 어떻게 하겠니? 제희가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물론, 안될 것 같아. 그렇게 좋아했는데.. 모르겠어. -영진이하고 첫사랑하고 선택하라면? 난 제희말에 당황했다. -그야, 영진이지. 엉겁결에 대답했지만 그럴까? -난, 난아냐, 아니, 그래, 못하겠지, 주헌씨에게 갈거야. 그게 주헌씨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첫사랑이 왠지 깨질 것 같아서 그래.
같이 살면서 적나라하게 독한 모습 다 볼텐데 모든 환상이 다 깨지면
어떡하니?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고 속이 허전할 것 같아. -그거 딴 맘이다. 그건 어쩜 내게도 해당될지 모른다. -그래, 알아. 그래도 어쩔수 없어. 그때 그건 정말 평생토록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 같아. 내가 죽을 때까지. 봄바람에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생각했다. 따뜻하면서 시원한
밤바람. 아카시아 향기를 타고 부드럽게 울고 있던 내게 다가왔었다.
그때 난 날마다 울었던 것 같다. 속으로. 사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말을 건넸다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제희 결혼식은 행복하게 치뤄졌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하객들도
모두 기뻐하고 더 행복해했다. 한국교회 목사님이 주례를 섰다. 신랑친구들은
와서 거의 영어로 떠들어 댔다. 쟝. congulatulations! 쟝, 쟝. -'쟝' 이 그사람 영어이름인가 보지? 영진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런가봐. 모두들 쟝쟝 그러네. -축하해, 제희야. -고마워. 제희 드레스는 수수했지만 단아하고 예뻤다. -미안해. 너 부케 못 줘서 주헌씨 누나가 노처녀래잖아. 부케를 들고 행복해하는 그의 누나도 보였다. -피로연때 어떡하지? 괴상한거 시키면. 제희가 고민스러워했다. -축하해요. 제희에게 다가오다 나를 발견하고 놀라는 주헌에게 말했다. -행복하게 해줘야 해요, 만약에 안 그러면 당장 달려올거야. -고마워 제희가 눔물을 글썽거렸다. -잘 살께. 내생각이었을까. 엷은 미소를 띤 그가 조금은 슬퍼보였다.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지니'하고 주헌씨 엄마가 멀리서 소리쳤다. -지니? 그쪽으로 걸어가는 주헌씨 뒤를 보며 제희가 대답했다.
- 영어 이름이 프랑스에서도 쓰는 이름이라 여러 가지야. 지니, 진, 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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