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1

 

 

와구도의 거의 정상에서 뜨거워진 피를 주체못하고 우뚝 서있는 윤을 급히 끌며 장씨는 다급히 속싹였다.

"도....도련님 저 밑을!"

장씨에 의해 한참 좋아지던 기분을 망친 윤은 인상을 지푸렸다.그와 함께 시선은 장씨의 손 끝에 이끌리듯 해안선으로 이동하고...

만약 인간이 개미처럼 보일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리라.

비록 수뇌진은 장렬히 산화했다고는 하지만 수뇌진들의 의기가 반드시 부하전원의 의지라고는 할수없다.배와 함께 죽음을 택한

신지등과는 달리 많은 사루스케의 선원들은 한목숨 구하기위해 필사히 가까이 보이는 와구도로 헤엄쳐오고있었다.

이미 몇몇은 벌써 상륙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윤과 정씨는 순간적으로 공포로 인해 옴몸이 얼어붙는듯 했다.바로전까지만 해도 뜨거워지는 의기에 불타는 맹세를 했던 윤으로서

도 왜구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는 적지않았다.

저들이 누구인가 수천년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사에 있어서 그 숱한 나날을 약탈과 학살로 끊임없이 한반도의 해안을 괴롭

혀오던 이들이 아니던가...최근에 들어 그 만행은 좀 뜸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해안가의 공포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윤은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지금으로부터 2년전 대대적인 왜구소탕작전에 위해 출발한 경상우수영의 작전에 참여하기위해 병졸

50을이끌고 의기양양하게 나섰던 병방 김 수천의 목과 팔다리 없던 신체를......병방은 고을의 병력관리를 주로 하는 무관으로

특히 김 수관의 창솜씨는 고을 사또인 윤의 아버지가 늘 칭찬해오던터였다.윤 또한 그에게서 창술을 배워었고 그의 믿음직스럽

던 넓은등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런 그조차 온전한 시체를 남길수 없었던 그 참상...윤은 솔직히 분노보다는 공포를 느꼈었다.

바로 그 공포의 대상이 저리도 가득히 몰려오고 있는것이다.

그는 공포로 온몸이 마비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아마도 장씨가 부축해주지않고 있다면 그는 벌써 쓰러졌으리라...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 이내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까막히 상륙중인 왜구들의 행색에 명백히 구분이 있었던것이다.

"장씨아저씨 좀 이상하지않아요? 한쪽은 오랑케식 변발을 하고 그래도 국부라도 감추고 있는데 비해 또 한부류는 마치 칼로 무작

정 자라놓은듯한 머리에 벌거숭이잖아..."

"글쎄요 그러고보니 마을 어른신들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왜구들은 젊은 장정들을 죽이기보다는 곧잘 끌고가는데 바로 노젖는

일에 부려먹기위해서라고 하시던걸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왜 벌거숭이지?"

장씨는 두눈을 껌벅일뿐 이렇다할 대답할말을 찾지못했다.

장씨가 들은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벌거벗은이들은 중국 동해안 조선의 남,동해안에서 잡혀 노예처럼 일을 해오던 이들이었다.

배밑창에서 그저 명령하는데로 노를 저어오던이들에게 따로 용변을 해결할 시간을 줄리가 만무했다.대부분 그자리에서 해결하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더렵혀진 옷에서나는 악취는 물론 그것이 돌림병의 원인이 된다고 본 왜구들은-비록 노예라고는 해도 이들이

죽는다면 당장 배를 저어나아갈 사람들이 부족하게되므로-이들의 옷을 벗겨놓은것이다.그리고 역시 같은 이유로 머리도 짧게 짤

라버렸다.

이러한 사실까지는 알리 없는 윤이었지만 그래도 이상황을 어떻게든 넘겨볼 한가지 지혜를 끌어낼수 있었다.

우선 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장씨의 손에 쥐어져있던 낚시그물절단용 소도를 뺏아 자신의 탐스럽게 자란 댕기머리를 잘라버린

것이다.당시의 조선의 유교사상에 있어서 머리카락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귀중한것이라 함부러 자르거나 해서는 않되는것으로 되

어있었다.그러나 윤은 평소에도 이세상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생각을 줄곧해온곤했었다.

바로 그의 그런 생각이 말설임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했으리라.

윤은 자신의 비단옷도 벗어던져 벌거숭이된채 장씨를 쳐다보았다.처음에는 도대체 왜이러나 싶어 어리둥절하고만 있던 장씨도 이

내 윤의 뜻을 이해할수 있었다.등잔불밑이 가장 어두운 법.윤은 바로 사람들속에 묻혀버려 자신들을 감출 생각을 한것이다.

장씨도 윤을 쫓아서 옷을 벗어던진후 윤과 함께 아직 사람그림자가 안보이는 뒤편 바다로 뛰어들었다. 장씨도 윤도 수영에는

어느정도 자신이 있지않은가..그들은 섬을 반바퀴 헤엄쳐 마치 지금 막 상륙한 사람이냥 사람들사이에 파고들었다.

천운이었던지 아니면 너무 지쳐있어서였던지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는이는 없었다.

일단 한숨을 돌린 윤과 장씨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가지 눈에 띄는것은 약간 위에 위치한 한무리의 왜구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불을 지피기 시작한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에 쬐이기

위해서보다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기위해서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욱 이해가 안되는것은 밑에 위치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너무나 무기력해보인다는점이었다.

물론 피곤하리라는것은 이해가 않되는것도 아니지만 지금 숫적으로보나 뭐로보나 왜구로부터 해방될수는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던

가?그러나 누구도 그러한일에는 관심이 없다는듯 고개를 다리사이에 파묻은채 마치 시체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윤은 장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있는이에게 말을 걸어보려 시도했다.그러나 누구도 대답을 하지는않고,

'이건 마치 시체같잖아......'

윤의 의문속에 고개를 갸우둥거리는사이 장씨는 소름이 끼칠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도련님 배....배가.."장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윤의 두눈사이로 왜구의 배로 짐작되는 배한척이 와구도로 접근하고있는것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