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 언약에 대하여

 먼저 침례의 성경적 근원에 대해서다. 구약에서는 없던 것이 신약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함께 등장한다. 요한의 사역은 말4:5~6절에[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예언되었다. 이는 회개의 사역이다. 마3:1~12절에 이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기를,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세례(식)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섬김의 언약(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막16: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셨다. 마28:18~20절에도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조하신 것이다. 행 8 장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에서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를 전하니라. 36 그리하여 그들이 길을 따라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내시가 말하기를 "보라, 여기 물이 있도다. 내가 침례를 받는데 무슨 거침이 있느뇨?"라고 하니 37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38 그리고 나서 그가 마차를 세우라고 명한 다음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로 내려가서 빌립이 그에게 침례를 주니라.] 기록 된 것을 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겠다는 확실한 언약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구약 백성에게는 할례의 언약식이 신약 백성에게는 세례가 된 것이다. (롬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침례를 받는 적절한 목적

사람이 왜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다. 그것이 신자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침례에 어떤 목적을 부여하셨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파들마다 침례의 목적에 대해서 상당히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교파는 침례가 사람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구원을 받은 다음에 그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바꿔 말해서, 구원받기 전에 사람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극도의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또 다른 교파는 적합한 사람에 의해서 베풀어진다면, 침례만으로도 개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와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침례를 명령하신 것이다.

A.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언약으로 그 백성이 구원을 얻는 것이니 언약식은 언약 백성의 공식적 출발인 셈이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는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어떻게 홍수기간에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하면서 이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KJ)고 한다.

B. 죄 사함을 위하여

오순절 날에 3,000명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대답하였다.

베드로는 사도였다. 이 말씀을 하기 불과 얼마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어 그를 인도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한 것은, 그가 영감 받은 사도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구원받기 위한 하나님의 요구조건들을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또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사도행전 2장 38절의 베드로의 진술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직접 내려온 것이다. 베드로가 믿음과 회개와 결합된 침례는 죄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 감히 - 의심할 수 없다.

C.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바울에게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바울이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하시기를,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행 22:10)고 하셨다.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사울에게 말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 바울은 도상에서 예수를 뵙고 그분을 믿었다. 그는 3일 동안 회개하는 기도를 했지만, 그의 죄는 여전히 그와 함께 남아 있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를 지적해 주었다. 그것은 침례였다. 침례 단독으로는 죄를 제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와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과 죄에 대한 회개가 선행됐을 때, 침례는 회개한 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 확보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D.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침례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고 말했다. 그는 또 갈라디아인들에게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6-27)고 말했다. 그러므로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진술이다. 신약성경은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롬 3:24), 그리스도 안에 정죄가 없다는 것(롬 8:1), 그리스도 안에 위로가 있다는 것(빌 2:1)을 가르친다. 성경은 또한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며(고전 15:22),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가르친다. 이런 모든 축복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분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구원은 침례식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는 것이다. 또 분명한 것은 침례식이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침례식 뒤에 따라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사람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고 참으로 죄를 회개한다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부르스(F. F. Bruce) 교수는 말한다. "침례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질문들-침례

성구골라넣기

______1.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______2.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곧장 걸어 나오셨다."

______3.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______4. "침례를 통해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______5.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______6.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______7.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______8.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______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 . . ."

a. 벧전 3:21           d. 막 16:16              g. 행 22:16

b. 롬 6:4               e. 행 18:8                h. 행 2:38

c. 행 8:39              f. 마 3:16                 I. 마 28:19

다음 세례라는 용어에 대해서다. 먼저, 헬라어 어휘의 의미는,

신약의 원어인 그리스어는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다. 어휘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침례로 번역된 어휘의 경우에서 사실이다. 이 어휘는 그리스어로 "밥티조"(baptizo)이다. 이것은 "담그다, 침수하다, 또는 뛰어들다"를 의미한다. 진지한 학자라면, 누구도 이들 의미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만일 예수께서 붓다라고 말씀하고 싶었다면, "엨케오"(ekcheo)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뿌리다를 말씀하고 싶었다면, "란티조"(rantizo)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침수를 명령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분과 사도들은 예외 없이 침수를 의미하는 "밥티조"(baptizo)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이제가지의 연구에서 우리는, 침례의 행위와 관련해서, 성경의 분명한 진술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셨던 행위와 헬라 어휘에서 구체화된 상징, 및 모든 것이 침례가 침수세례임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성경이 제시하는 바, 누군가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뿐이다. 그러므로 물을 뿌리는 것도 불경스러운 것이거니와, 거기에다가 "씻을 洗" 자까지 붙여 "세례"라고 명명하는 것은 참으로 불손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침례"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浸" 자는 "담글 침" 자로서, "침례"를 정의하면 단순히 "물에 잠기는 의식"이다. 앞에서 제시한 베드로전서 3:21 말씀에서도 보듯이, 이 침례에는 죄를 씻는다든가 하는 의미는 전혀 없다. 단순히 잠기는 것이다. 침례를 뜻하는 헬라어 "밥티조"라는 말은 옷감을 물감에 푹 적셔서 물들이는데 사용되었던 말이며, 또한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에 앞서 칼을 피(또는 피를 의미하는 붉은 물감 등)에 푹 담글 때 사용되기도 했던 말이다.

그러면 잠기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잠김으로써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중거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는 것이다. 침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간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침례이다.

로마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침례는 물침례가 아니다. 이 침례는 물침례로 간증하기 전에 먼저 경험해야 할 "영적 침례"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몸 안으로 푹 잠겼다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그분의 죽음도 내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도 내 부활이 되었다. 이것을 모형으로 간증하는 것이 바로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다.

골로새서 2:12도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고 말하며, 로마서 6장과 동일한 영적 침례를 제시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3:27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침례는 고린도전서 12:13에 따라서 "한 몸 안으로" 들어간 침례이고, 이것이 또한 한 성령에 의해 받은 것이기에, 에베소서 4:5에서는 "한 침례"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침례를 집례하는 목사는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먼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습니까?" 등의 질문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확인한 다음, 그를 물에 잠그면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라고 말하고, 그가 물 속에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라고 말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 받아야 한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침례를 받게 되면 그에게 전혀 무익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불경스런 것이다. 그래서 지역 교회의 목사들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 사람은 회중 앞에 나아가 자기의 구원간증을 할 수도 있고, 회중들 사이의 교제 가운데서 자기의 구원을 간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는 구원의 간증이 되지 않은 가운데, 일괄적으로 모아 놓고 교리 문답에 따라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물은 다음 마구 세례를 주는 것은 그야말로 비성경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구원의 간증이 있는 사람들만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유아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자기의 구원 간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자기의 구원을 분명히 인식하고 간증할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침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게 된다(마 28:19). 간혹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교회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경우는 사도행전 2:38과 8:16, 그리고 19:5 뿐인데, 뒤의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는 유대인들이 받는 침례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여러 모로 달리 언급되는데, 그중 하나가 침례의 문제이다. 이방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다. 이는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라고 하셨는데, 이때 "모든 민족"은 이방인을 말하며,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가운데 받는 침례는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0:48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침례를 명령하는데, 이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명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함한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주"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개역성경>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번역하여 놓아 오해의 소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유아 세례에 대해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될 것은, 이 유아 세례를 구원의 수단이라는 명목하에 로마 카톨릭이 자기들의 교세를 넓히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를 받으면 그 교회의 회원이 된다.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장로교인이 되고,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감리교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 카톨릭 교인이 되는데, 이때 교세를 효과적으로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어릴 때 세례를 주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동안 카톨릭 교인으로 살아가게 되고, 이렇게 반복되게 되면, 카톨릭은 그 사회와 국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바로 재침례교도들이다. 그들은 어릴 때는 자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장성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후 올바른 지각으로 보니, 그 세례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기에 다시 정식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교세뿐 아니라 그들의 교리에도 타격을 입게 되자, 재침례교도들을 박해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러한 암흑 시대에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담대함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몰래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담대하게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침례교도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모두 반카톨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는 카톨릭이냐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카톨릭을 반대할지라도 그가 세례, 특히 유아세례를 실행하거나 인정하고 있는 한, 그는 친카톨릭 교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우리 교계는 대부분 친카톨릭 교회들이다. 그러면 많은 침례교회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인가? 글쎄,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침례만 주었지, 다른 부분에서는 친카톨릭 교회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카톨릭 교회들이 침례교회들을 비판하면,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온갖 타협도 불사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카톨릭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했지만, 이제 그들은 카톨릭과 하나되기 위해 타협도 불사하는 것이다.)

왜 침례를 고수해야만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침례"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침례가 갖는 성경적인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실행일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을 드려야할 첫 번째 순종으로 성장의 첫 출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신약교회가 지켜야 할 의식은 두 가지, 즉 침례식과 주의 만찬뿐이다

침례는 그리스도인이 공개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한 형태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과 마음으로 살겠다는 믿음의 표시이며, 순종의 표시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한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침례에 순종하는 것은 성도의 신앙 간증이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순종의 표시이다. 침례는 구원을 받는 조건이나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조건이 아니다. 교회의 회원이 된지 몇 개월이 지나야 학습을 받고 침례를 받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다는 것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침례가 세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침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물뿌리는 세례는 죽음과 관계없기 때문이다. 즉 침례는 완전히 죽는 것과 묻힌 것과 부활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골 2:12).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서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지할 수 없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인 줄도 알지 못하는 아기에게 어떻게 침례를 주느냐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아기들이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아기들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기에 모형을 원형으로, 그림자를 실제로, 또 의식을 실제로 구원받는 방도로 여겨왔던 것이다. 유아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때까지 곧 선과 악을 분별하기까지(롬 5:13) 순진한 상태에 있다(신 1:39). 율법을 모를 때는(롬 4:15), 그 죄가 개인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롬 5:18). 물론 이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채" 태어났고 죄성을 유전으로 물려 받았지만(시 51:5)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임을 몰랐으므로 죄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배교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침례(세례)에 의한 중생과 유아세례는 배교자들이 "구전에 의한 전통"(oral tradi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에 따르면(모쉐임, 로빈슨, 아미티지, 베더, 뉴만 등) A.D. 200년까지만 해도 믿는 성인들만이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A.D. 216년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어른들만이 침례의 대상이라고 했고 후에 가서는 중생의 수단으로서의 물 침례를 거부했으며 그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단정했다.

아타나시우스(A.D. 360), 가이사랴의 바실(A.D. 379), 크리소스톰(A.D. 400)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까지는 그 누구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A.D. 90-300년 사이를 살았던 역사가들 중 그 누구도 유아세례가 그 어느 곳에서든지 행해졌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적 교리와 전통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침례를 세례로 바꿨을 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침례(세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 세례"는 1, 2차 세계 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원인이 되었다. 주로 이 두 가지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암흑 시대기간 중에, 특히 12, 13세기 두 세기 동안만 하더라도 50,000,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하였기 때문이다. 침례교도들은 때로는 몬타니스트,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알비겐스, 왈덴스, 폴리시안, 카타리, 재침례교도 등으로 불렸다. 유아세례를 안 준다고 순교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례를 위해서 죽은 순교자들은 무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세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적 변화에 대한 한 모형이다. 즉, 침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에 대한 "외적 표시"이다.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그렇다면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해 본적이 있는가? 침례는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첫번째 순종으로 헌신과 섬김과 영적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침례를 고수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침례가 성경적이기 때문이고, 이 성경적 교리를 위해서 무수히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지킨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섬기며 따르는 주님은 온전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와 달라서 흠도 없고, 점도 없고, 틈도 없으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람들의 전통을 내세워 주님의 흠을 찾고자 했던 일을 볼 수 있다(마 15:1-9, 막 7:1-13). 바로 그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 또 이와 같은 많은 일을 자행하고 있도다."  때문에 행위 구원, 유아 세례, 침례로 인한 구원 따위의 사람들이 전통으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구속받은 것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서이지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허망한 행실로 된 것이 아니다.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서로 다른 침례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모세의 침례

성경에 제시된 첫 번째 침례는 모세의 침례이다. 이 침례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볼 수 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너희가 모르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 조상들이 모두 구름 아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통과하였으며,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 침례를 받았고, 또 모두 같은 영적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라. 이는 그들이 그들을 따랐던 그 영적 반석에서 나온 것을 마셨음이요, 그 반석은 그리스도셨느니라"(고전 10:1-5).

여기서 보듯이 성경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을 때의 일을 두고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 침례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홍해를 건넜을 때의 이 사건이 침례가 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받았던 침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홍해라는 물 아래로 지나감으로 세상으로 예표되는 이집트로부터 성별되었고 하나의 불러냄을 받은 모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요한의 침례

성경에 제시된 두 번째 침례는 요한의 침례이다. 마태복음 3:11을 보자.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여기서 침례인 요한은 요단 강변에 나타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목적으로 침례를 주었겠는가?

이 침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례인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왕이 오시는 시점이었고 이에 앞서 예언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바로 예언된 엘리야로서(말 4:5) 왕의 길을 예비해야 하는 침례인 요한의 사역이었다(사 40:3, 마 3:3).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마음을 주께로 돌이켰듯이 그 사역의 핵심은 왕이 일하시기 전에 회개의 표시로 침례를 줌으로 왕의 길을 닦아 놓는 사역이었다.

그래서 그가 침례를 행하기 전에 전파했던 것은 "회개하라"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사람들은 침례를 받는 것이었다. 이 일은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를 왕으로 맞아들이는 준비이자 왕국이 임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유대인의 침례와 일치한다.)

요한복음 1:31에서 침례인 요한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 여기서도 보듯이 요한의 침례의 목적은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침례 받으러 나아오는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심판의 도끼가 그 뿌리에 찍힐 것이라고 경고한다. 만왕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백성으로의 새 출발이 없는 침례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침례는 회개함에 합당한 새 출발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 생명을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알리는 언약식인 것이다.

3. 십자가의 침례

성경에 제시된 세 번째 침례는 죽음의 침례이다. 특별히 이 침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0:22을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그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또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우리가 받을 수 있나이다.' 하고 하더라."

주님은 이미 침례인 요한에게 물 침례를 받으셨다.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니가 그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각각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을 때, 주님은 이 침례를 받을 수 있냐고 물으셨다. 당시 이 상황은 곧 있으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여기서 이 침례는 주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침례는 죽음의 침례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죽음을 대신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원 받아 침례를 받는 자마다 그 죽으심의 고난의 잔을 헛되이 하지 않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 받은 성도마다 많은 환란 고통이 다가와도 그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자이다.

4. 유대인의 침례

성경에 제시된 네 번째 침례는 유대인의 침례이다. 이 침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38에 잘 나와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특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기 쉬운 구절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침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침례의 상황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왕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렸던 왕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시키므로 그 왕을 거부했다. 지금 사도행전 2장에서의 유대인들은 바로 그 왕을 거부한 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왕을 거부한 그 죄를 씻으라고 설교한 것이고, 더불어 그 왕께의 회개와 그 표시로써 언약식으로 침례를 요구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에 따르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니 이는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과 같아지는 것이다.

5. 이방인의 침례

성경에 제시된 다섯 번째 침례는 이방인의 침례이다. 사도행전 10:47,48을 보자.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하며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

이 침례가 바로 교회시대의 구원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침례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에 대한 공개적인 간증으로써 받는 침례인 것이다. 이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로 인한 우리를 구원한 모형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다(벧전 3:21).

여기서 보면 이 침례는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지 유대인의 침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침례를 받지 않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의 상황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안에서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었던 때인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있었던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성령을 받았는데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하며 그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주"(Lord)라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말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주"(Lord)"이듯이 아들도 "주"(Lord)"이시고 성령 또한 "주"(Lord)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빌 2:11, 고후 3:17). 마태복음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했을 때 "이름들"(복수)이라고 하지 않고 왜 "이름"(단수)이라고 했겠는가?

6. 성령(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침례(1)

성경에 제시된 여섯 번째 침례는 "영적 침례"라고도 불리는 성령침례이다. 고린도전서 12:1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고린도전서 12장은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영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몸 안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함께 끼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한 성령에 의하여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몸은 한 몸이다.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그 한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바로 한 성령에 의하여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고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이 침례는 세상에 속해 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기는 침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침례는 물 침례로 잠기는 물에 참여하듯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교회에 참여함을 말하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듭남과 동시에 이 침례의 언약에 참여자가 된 것이다.

7. 성령(성령의 능력으로의) 침례(2)

성경에 제시된 두 번째 성령 침례는 주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으로의 침례이다(행1:5, 눅 24:49). 유월절과 오순절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으나 종말의 날까지 얼마든지 계속되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다(행 2:39).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는 몸으로의 침례와는 다른 면에서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시는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기름붓듯하는 능력, 옷입히듯하는 능력이 12사도만이 아닌 얼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사건으로서의 성령 침례이다. 첫 사건인 다락방을 보라(행 2:). 120여문도(행 1:15, 2:1,4)가 다 받았다. 그 중 어떤이들은 특히 12 제자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 방언으로 외치고 있지 않았는가? 또 다른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술 취했다고 오해받은 그 방언들로 말하는 능력을 받았다. 왜 500여문도가 승천을 보았는데 120여문도일까?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뜻이 거기에도 보이지 않는가? 성경을 보면, 12는 선택의 수요, 10은 땅의 만수를 나타내고 있다. 행 2:39에서 재차 강조하신 말씀을 보라. 복음을 위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만이라거나 사도시대만이 아닌 교회시대 전체를 위한 것이다. 역사를 보면 분명하지 않은가? 교회가 주님없이 배불러서 그 능력이 안 나타났을뿐 주님의 성령의 능력 주심과 그 뜻이 변한 것이 아니다(렘 20:9, 23:29, 눅 11:13, 12:10,12,49).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천신지의 생명수가 황금길 가운데로 흐르는 곳이 아니다. 악의 세력이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대처럼 아니 더 나아가 우는 사자처럼 전 세계적으로 전 인간적으로 설치고 있다. 주님은 몸된 교회로 하여금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다. 철학적 현학적 궤변적 상상적인 차원의 침례가 아닌 에스겔서의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하고 열방을 살리는 바다를 이루는 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능력을 성령으로 주시겠다느 것이다. 이 시대는 그 은혜의 시대이다. 초대교회처럼 전심으로 주를 섬겨 금식하며 기도해 보라. 주의 약속이 성취되어 교회마다 성령의 살아계신 능력의 역사가 파도치게 될 것이다.

8. 불침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마지막 일곱 번째 침례는  심판의 불 침례이다.

이 불침례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3:11,12에 기록되어 있다. "...그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

여기서 이 두 구절을 그대로 종합하면, 불이 의미하는 것은 심판의 불이고 지옥의 불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말 4:1, 막 9:44,46,48, 고전 3:12-15, 히 6:8, 계20:13,14 등). 이 불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받게 될 문자적인 지옥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침례를 받은 자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기를 불 속에서 뛰쳐나오듯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침례주는 심판의 침례주이시기도 함을 알면서 어찌 죄를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 종 되어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의 영원한 절기들이 있다. 골 2:16 말씀대로 영원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의 생명 속에 성취되었고 성취될 것이다. 그 중 특히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들인데 유월절은 영적 첫 열매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동참으로의 물세례를, 오순절은 주곡식 추수와 새 법 주어진 성령세례를, 장막절은 모든 열매 추수로의 불세례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 우리 안에 그림자가 실체로 체험 될 것이다. 넓게는 그리스도 언약 하나이나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언약인 것이다.

출 6:2~8에도 넓게는 아브라함(그 후손 이스라엘)과의 한 언약이, 세부적으로는 세 언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언약마다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절의 애굽에서 구속, 7절의 하나님 백성 됨, 8절의 유업으로의 가나안 땅 등의 언약은 좁게 보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각각 연결 되는 각각의 언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새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은 부요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의 언약들을 모두 다 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농사요 그리스도 백성의 길인 것이다. 단편적인 이해가 아닌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각각의 언약에의 결단과 헌신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렇듯 지금까지 언약으로의 침례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침례가 있다. 그 여덟 가지 모두는 서로 다른 면들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 6: 에서는 '세례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알 수 있기에 침례는 또한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물침례를 받는 것은 구원받음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난 것을 외적으로 표시하는 공개적인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께 대한 첫 섬김과 순종의 언약식이다. 세상에서 불러냄 받은 무리 속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새 왕국 천국 백성의 새 출발이다. 지옥 같은 고난이라도 이기는 믿음의 출발이다. 예수님과의 새 출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새로운 삶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롭게 소속된 것이다. 성령을 먹고 마시는 역동적인 새 생명 언약식에의 동참이다. 죄악을 지옥불을 무서워하듯이 버리는 참된 성결 언약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