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자재(自在)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울리지 않는
적막한 울림이 하나 있다

꿈꾸는 이 무현금(無弦琴)

깨어나지 말거라
네 영혼이 바로 태고인 듯

바위 틈에 맺혀있는
이 한 방울 이슬의 사유(思惟)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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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줌의 별빛을

별들은 왜 눈부신가

제 육체의 신비를 깨물고 있는
소년의 신음소리처럼

저 별빛은 왜 눈부시게 젖어 있는가

*

테라마치(寺町)의 여인들을 닮은
소녀의 입술이
내 질투심의 소재(所在)를 더듬고 있다.

어쩌지···
이 애의 손에
겁없이 쥐어져 있는 한줌의 여명(黎明)을

너무 큼직한 사랑을.


(주. 태라마치는 高麗村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高句麗의 유민들이 건너와서 자손을 펼친 곳이다. 高麗川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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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내 생일에

발이 시리다고 하니
피를 느끼면서 걸으시니, 라고 한다
땅속에 갇혀있던 피가
하늘로 올라
눈이 되었을 것이라는
너의 꿈 같은 상상력도 경이롭지만

내 발길에
그 피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는 사실이
더 두렵다

유득히 오늘
너도 찾아온 내 생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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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풀꽃들

사랑을
하늘이 달리 할 수 있을까

한 여름
바람도 그 마음 알아 제 몸으로 부비다가

정작 번개 깨물고
한바탕 자질어진 후에야

비로소
하늘 핏자국을 보니

하나 하나
그 전부가 풀꽃이네,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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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 가을 햇빛을

쓸쓸할 때는
왜 마음이
이다지도 맑아지는가

눈도 없는
저 석불의 적막한 귀에
홀연히 때까치 울음소리 들리듯

내 사랑 하나
사뭇 멀리서도 아른거려
이 가을 햇빛으로 믿고저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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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무변(無邊)의 눈물

너는
결국 나를 찾아왔다

나를 찾아와서
너무 흔하게 살던 제 손을 감추고
머리를 숙였다

이제
어느 전설에도 쓸모가 없어진
우리들의 이 청동빛 낡은 토르소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또 들리고
초여름 구름들이
무변(無邊)의 내 눈물 속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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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다에서 온 여인(女人)

발자국들이
모랫길을 옆질러
무엇엔가 ㅉ기듯이 방푸림 속으로 사라졌다

죽음을 본 후에야 알게되듯
그 어떤 거짓말 보다
더 현실적으로

한 밤을
물가에 서 있던 그 여인의 허리를
누가 처음에 끌어안았을까

물가에 시선을 보내니
잽싸게 내 꿈을 채어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목도
내 그것을 닮아 길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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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노래여

황하가 넓다고 그 누가 말하던가 갈대잎 하나로 이를 건너리

송나라가 멀다고 그 누가 말하던가 발돋음 하고 보면 훤히 내다보이는데

이건 시경(詩經)에 실려있는 옛 노래이다

강기슭에서 바람에 혼들리고만 있던 갈대들 어느 잎사귀 하나가 아들 그리는 어머니의 정한을 풀어 주었을까

아픈 발가락들 흙묻은 그 발가락을 곤두세우고 한 번 파닥거려 보던 어머니의 어깨 위에 하늘 나는 기러기가 더 쉽디 쉬운 비유 로 울고도 갔을 것을

노래여 제 발가락의 아름이 아니면 노래여 제 손으로 꺾어보는 갈대의 그 아픈 넋을 알길도 없이

노래여 아들 그리는 어머니의 그 애ㄷ은 한 세상을 어찌 어찌 강물을 건너 보내 줄 수 있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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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물방울

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 몸도 작아질까
은어 한 마리가 내 손바닥 위에서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하다가
마침내 물방울 한 개로 되어버리듯이
홀연히 결정적인 어느 한 순간에
나도 물방울 속에서 인간으로
우연히 눈을 떴을 것이 아닌가
더러는 어느 물방울 한 개가
그냥 피랭이 한 마리도 되지 못한 채
영원히 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 까마득한 사실마저 모른 채
어쩌면 나도 우연히 인간으로 눈을 떴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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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나는 알았을까

앞바다 멀리 눈길을 둔채
언제까지나 홀로 서 있던 그 여인을 보고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였을까
죽음이 허다하지만
저 여인의 허리로 내려 휘어감는
이 가을 죽음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는 영원을 보았을까
그 여인의 허리에서
어떤 사랑을
내가 느꼈다고 적을 수가 있을까

시방 내 글은
하염없이 아득히 멀어질 뿐이다
언제까지나 멀리 수평선만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그 여인의 눈길처럼
마냥 아련해 질 뿐이다

그냥 아름답게만
그냥 아름답게만


이상, 『現代詩學』1995년 2월호의 新作小詩集,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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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월의 노래
---내 한방울, 눈물의 선언

그때 나는
강 저쪽 기슭의 풀밭에 홀로 서서
멀리 그리움만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가치롭게만 보였고
내가 대단한 시인이나 된 듯이
감히 이런 말을 해도 괸찮다 한다면
처음으로 내 한방울의 눈물 속에
이처럼 뜨겁게 전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던가 싶었다.
그리고 그 자각이
단 한 사람만이라도 새로 태어나야만 할
그 시인의 조건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 않았던가
시인의 눈물이란
10월의 하늘에 바쳐야만 할 제 생애의
가장 숭고한 노애이여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그 노래를 스스로 바치고 싶어
이쪽 강기슭에 이렇게 또 혼자 찾아와 서 있다.
시인은
누구나 한 번은 이 강물을 건너야만 하지.
세상을 제 발로 건널 줄 알아야 하지.
강물은 어느 강물이든 호르기만 하나
과거도 미래도 없는 곳에 내 모습을 담아주고 있는
10월의 강물,
한없이 엄하기만 하게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강물 속의 10월의 하늘,
저 하늘의 영원한 푸름, 저 영원한 푸름의 영원에
내 목숨이 맞설 수 있는
아아, 그러한 노래 하나를 부르기 위해서 혼자 서 있다.
10월의 하늘에
그 노래 하나가 하늘 자신의 보람으로 울리기 위해서.
이제 내 눈물 한 방울이
비로소 전세계의 진홍빛 심장같은 존재이기 위해서.
내 꿈의 아름다움과
미지에 대한 그리움과
제 삶의 가치로움을 찾아 건너왔던 강물 저쪽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홀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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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득한 나날

가을 해거름에 보이는 비애(悲哀)의 배후로
마치 어린애의 웃음소리처럼 날아간 것은
어떤 새였던가.
미지의 영상만이 언제까지나
물가의 잡목 그늘에서 흔들리고 있다.
무상(無想)의 시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또 미(美)와 사(死)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가.
머언 능선처럼 하루도 덧없이
사내의 틉틉한 명상(瞑想) 끝에 사라지려 한다.
이 유적(遺跡)의 황폐한 돌계단처럼
시인은 제 육체 속에
하나의 비화(悲話)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손잡이가 기다란 은수저로
끝없는 여인의 슬픔을 떠서 마시던 노시인이 기억난다.
누구나 헛되다 하지만
사랑은 실로 추상적으로만이 자립하는 법이라고
이끼낀 돌계단에 혼자 앉아
카라스우리의 이쁜 모양을 보면서 생각했다.
5월의 여정(旅情)은 정말 좋았었다.
손에 넣고 싶었던 고대의 조그만한 조갑지도 찾을 수가 있었고,
느름꽃에 인간을 바치면서
술집 주인과 사내의 그로테스크한 것을 서로 견주어 보기도 하고,
아가노(吾野)에서는
유무(有無)의 영겁(永劫)을 괭이로 파서 뒤집어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노동의 존귀함을 배우기도 했다.
매일 새로 시작해 볼 일이지-----
할머니의 꾸부러진 허리에 나는 목이 메어졌었지.
하지만 여름에는 모든 게 엉망이였다.
싼타·모니카의 쌔들을 한도 이상으로 올려서 타고
그저 빗속을 내달리기만 했다.
바람ㅉ기는 소리가 그처럼 처절할 줄은 몰랐었구나.
그런 법이지, 그 누가
상처를 받지도 않은 채 제 육체를 통과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아아, 또 미(美)와 사(死)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지의 영상이 달그림자를 따라서 물을 건너가고 있다.
이젠 이 인간의 유적(遺跡)을 다시 찾아들 날도 없겠지.
내 자신의 번뇌의 터를 순례하면서
한사코 유무(有無)의 영겁(永劫)만을 자문해 왔던 날들도 덧없이
이 비화(悲話)도 끝나려 하는가.

누군가
아름다운 새 울음 소리로 나를 부른다.
돌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실로 내 현실처럼
이곳에 내 자신마저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 주. 카라스우리: 수풀 속에서 열리는 열매. 그 크기가 달걀만 하고 분홍빛의 이쁘장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필자에게는 그 모양 이 사랑의 형상처럼 느껴졌다. 아가노(吾野): 필자가 살고 있는 곳은 고마(高麗)에서 가깝고, 아가노(吾野)라는 곳은 고 마(高麗 )에서 좀 더 들어가는 산속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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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 햇빛의 꿈을
-----시인의 독백

이 감나무가
스스로 금년의 비바람을 느끼고
씨알 속에 모아둔 햇빛에게
지상(地上)의 생명이 더욱 강하게 지녀야 할 힘을 알려주듯이

그리하여 씨알 속의 햇빛이
감나무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응답하면서
미래의 하늘을 향하여
제 생명을 찬가해야 할 새로운 지평(地平)을 꿈꾸듯이

그리하여 씨알 속의 햇빛이
스스로 그 대지(大地) 위에 새로운 꿈을 실현해야만 할
드디어 오늘 같은 새날에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이 아름다운 감 한 개-----

사람들은 이러한 씨알 속의 햇빛을
맛있다, 라고도 말하고
또는 맛이 없다, 라고도 말하지만,

아아, 이렇게 나는
이 아름다운 햇빛의 꿈을 한입 깨물고서는
한마디 인간의 말로는 밝혀보지도 못한 채
나무가 일러준 나무의 말로만
그냥 침묵을 해야만 할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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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버림받은 토지(土地)


그 토지(土地)의 이름을
어느 한 사람도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계곡 밑 수풀 속에서 때까치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는데
나의 기억은 왠지 거기서 끊어져 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시(詩)를 느꼈다.
수만년을 인간 속에서 남몰래 썩어온
한 그루의 거목(巨木)의 모습을------

그 토지(土地)는
어쩌면 옛 이야기꺼리 같은, 어쩐지
내 얼국과도 비슷한,
아주 그로테스크한 욕정의 혼적이 보였지만
이젠 그곳을 찾아드는 나그네 한 사람도 없겠지.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그 토지(土地)에도 이윽고
무변의 우주 끝에서 몇억 광년을 걸쳐서
금년의 가을 하늘이 찾아왔으리라는 사실을------

그 하늘 한조각이
내 심금에 감응되어 이렇게 울리지 않았는가.
저 거목(巨木)의 죽음과, 그 죽음의 존엄을 위해서,
인간에 대한 한없는 분노 때문에, 라고

나는 끊어진 기억 저쪽으로 손을 더듬어 가본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그 토지(土地)의 이름과
아직도 내 잘못처럼 남아있을 것 같은 때까치들의 울음소리가
내 손에 잡히기나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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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한 줄의 증거(證據)


아직도 더 몇 십리를 걸어가야만 그 유적(遺跡)이 있다고 해서
우리들은 얼어붙은 강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둔 채 밤을 새우기로 했다

이곳 변경의 토지의 말을 들려주고
설원(雪原)의 푸른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져가던 청년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유구(悠久)의 지평을 두고 간 사실은
그 훗날, 내가 한 줄의 시(詩)를
우연히 제 몸속에서 찾아내었을 때였다.

끝없는 이 한 줄의 시(詩)-----유구(悠久)에의 증거(證據)를
그 누가 내 몸속에 적어 두었을까.

나는 문득
언젠가 어느 경전(經典) 속엔가 끼워둔 채 잊고 있었던
풀꽃 한 송이를 회상했지만,
그건 시대의 틈 속에서 잊혀진 채 지내온 나 자신을 상기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상념마저
아득한 밤하늘 멀리서 덧없이 돌맹이가 서로 부딧쳐본 것 처럼
내게 느껴지기만 한 그 애수(哀愁)는 무엇 때문일까.

이 한 줄의 증거(證據)는
슬픈 것,
외롭고
덧없기만 한 것일까.

그때 동행을 하던 사람도
자기의 짐꾸러기를 펼쳐놓고서 무엇인가 찾고 있었다.
이곳의 지신(地神)들에게도 잊혀지고 있는 것------
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닥불이 튈 때마다 그 황홀한 불똥들에게 홀린 채
나는 벌써
내 자신 속에서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이 잊혀지고 있었다는 그 사실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상, 『詩世界』1998년 가을호, 안녕하십니까,「말의 生理」시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