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새재(조령)     
  
  백구대간(백두산∼지리산)의 등뼈를 이룬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도계를 이룬 천험의 요새인 조령(鳥嶺)은새재계곡 따라 3관문까지 이어지며,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조령의 다른 이름인[새재]는 새도 날아넘기 힘든 고개, 또는 억새풀이 많은 고개로 풀이되고 있으며 [고려사]에는 초점(草岾),[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교통여건으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가장 짧은 고갯길이었던 새재는 영남의 선비를 비롯한 보부상, 영남의 세곡(稅穀)과 궁중 진상품등 각종 영남의 산물(産物)이 새재길을 통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나루터에 닿았으니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水運)울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충이었고 또 조령산성, 조령원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신립장군과 새재 여귀], [새재 성황신과 최명길에 대한 전설]등 숱한 사연이 전해져 오고있는 곳이다. 이제 새재는 역사 속의 수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옛 오솔길로 남아1966년 사적지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관문 과 1975년 조령의 정상부인 충북과의 경계까지100㎞의 도로와 주변을 정비하면서 새재는 개발의 초석을 놓았으며, 그후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관광지로서 본격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문경새재도립공원을 찾아서...


  
건물뒷편에는 임진왜란때 문경현감으로 문경을 사수하다가 장렬하세 순국한 신길원현감 충렬비가(신길원현감 충렬비각)이 서있어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관리사무소 앞 포장도로룰 따라 올라가면 우측으로 옛대궐을 연상하게 하는 동기와즙이 전통식 건물인 문경새재박물관이 우뚝하게 서 있다, 이 고장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전시하여 후세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는 새재박물관은 부지 2,753평에 건평 384평으로 3개의 전시실,영상실, 수장고 등을 갖추고 260여종 2,000여점의 유물을 교체전시하고 있다.
  영상실에서는 문경을 소개하는 비디오 영상물이 방영되고 제1전시실은 경상감사부일행렬도, 복식, 풍속도, 문경지방의 항일 전투와 해당유물을 전시하였고 제2전시실은 문경의 역사,  의.식.주 세시풍숙, 문경의 인물, 농기구 등을 전시 재현하고 제3전시실은 고서와 도자기, 자연과 산업, 특산품 등을 전시 고대와 현재까지의 생활상을 두루 파악하도록 하였다. 좌측도로변에는 550평 규모의 세계공룡탐험과 에어돔이 설치되어 각종지구과학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공룡의  공룡의 모형을 비롯하여 각종 화석류와 외계의 운석등  희귀자료 2,500여점을 소장 교체전시하고 있어 청소년들의 탐구 학습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400m쯤 올라가면 동쪽으로는 주홀산이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조령산이 길게 뻗어 천험의 요새임을 과시하듯이 버티고 있으며, 수천평의 푸른 잔디밭을 배경으로 은은한 곡선미의 기와지붕 성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주흘관의 편액이 걸려있는 영남 제1관(嶺南 第1關)으로 남쪽으로 침입하는 적(敵)을 막기 위하여 숙종34년(1708년)에 설관하였다. 홍예뮨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좌우의 석상은 높이 4.5m, 폭 3.4m 길이188m이고, 부속산성은 동쪽길이 500m, 서쪽400m로 3개의 관문중에 가장 옛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성벽좌우에는 성벽의 개축년대와 시공자의 성명과 직책이 음각되어 있어 성벽보수의 연대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흘관을 지나면 우측 언덕위 전나무 그루터기 옆에는 경상북도 개도100주년을 기념하여 경북인의 생활풍습을과 사회,문화 등을 대표하는 자료와 물품등 100개 품목457종을 특수캡슝이 매장되어 있다.  개도 500주년이 되는 2396년에 개봉 400년전의 경북의 모습을 후손들이 재 조명 해 보는 문화 유산 전수사업으로 수장풍을 화면으로 볼 수있도록 영상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주흘관 성벽을 동쪽으로 20m쯤 따라가면, 연인의 탱화를 모신 성황당이 있고 뒷편에는 산신령을 봉안하는 산신각이 있당, 성황당은 병자호란때 화의파의 주장인 지천 최명길(遲 川 崔鳴吉)과 성황신과의 전성리 전해지는 곳으로 지금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 정도로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주흘관에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800m쯤 오르면 높이 20m의 폭포가 길목에 숨어서 세속의 잡된 티끌을 날려버릴 듯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고 있다. 이곳은 노송과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어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는데, 옛날에 일곱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밑에서 올려보면 마치 여근과 흡사하여 여궁폭포 또는 여심 폭포라 불러지며, 한 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하여 피서객이 즐겨 찾는 곳의 하나이다.
폭포룰 지나 1㎞쯤위 주홀산 중턱에 있는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8년(847)년 체징보조국사(體澄普照國師)가 창건한 고팔로 원래 법흥사라 하던 것을 고려 공민왕(恭 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이 절레 행재(行在)하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다고 하여 혜국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하며 혜국사입구 이정표를 따라 1시간정도오르면 주홀산 정상의 산행도 할 수 있다. 제 1관문에서 1.2㎞정도 위에 위치한 거대한 자연석을 쌓은 돌담에 둘러쌓인 600여평의 대지가 조령원터(鳥嶺院攄)로, 원이란  국영여관(國營旅館)으로 역과 역사이 인가가 드문곳에 설치하였으며 1977년 발굴조사에서 고려. 조선온돌 유지가 나타나 중요한 건축자료(建築史料)로 평가되며 기와, 토기, 자기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원터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을 오르던 선비들을 비롯한 보부상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가 한잔의 술로 피로를 달래며 쉬어가던 곳을 옛 형태대로 이엉을 얹어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놓은 주막(酒幕)이 있어,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휴식을 하노라면 졸졸 흐르는 물과 지저귀는 산새소리에 쉽게 자리를  뜰수가 없게 된다.
  주막에서 조금 올라가면 조룡산의 크고 작은 계곡에서 흘로내려온 수정같은 맑은 물이 반석을 가르고 폭포가 되어 물보라를 뿌리며 무지개가 서는 팔왕폭포(八王瀑布)에 당도하니 폭포 위에는 성종(成宗)15년(1484) 당시의 문경현감이 세운 교귀정(交龜亭)이 있어 체임하는 경상도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가 관인(官印)을 인수하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한양을 오르내리며 교귀정의 경관을 읊은 칠언율시가 전하고 있다.
  제2관문 못 미쳐 길가에 이끼낀 자연석에[산불됴심]이라는 고어체(古語體)의 음각비석은 오가는 길손이나 나무꾼에게 산불예방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세운 비로서 건립연대 미상의 산림 보호와 관련된 유일한 한글비이다.
  주흘관에서 2.8㎞정도를 지나면 좌우의 계곡이 갑자기 좁아지며, 조곡관(鳥谷關)이 모습을 드러내어 비록 군사작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당장 이곳이 천험의 요새임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기암절벽이 조곡관을 굽어보며 우람하게 서 있고, 조곡관 뒤 우거진 송림은 신립장군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로이 산들바람에 춤을 춘다. 이 조곡관은 1594년에 설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숙종(肅宗)때에 관문없이 성곽만 개축하였고,1907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이 성마저 파괴하였으나, 1975년에 완전 복원하고 옛이름인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름하였으며, 부속산성의 길이는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이다. 조곡관은 송림 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사이로 흐르는 용천수인 조곡약수(鳥谷藥水)는 물 맛이 좋아, 길손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靈藥水)로 알려져 있다. 조곡관을 지나 약 600m쯤 가면 도로변에 자연석을 깍아 새겨놓은 문경새재 민요비 (民謠碑)를 보게되며, 촌로의 애절한 민요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하다.

 

신길원현감 충렬비각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새재 성황당

조선시대의 주막

혜국사

교귀정지

조령원터

산불됴심 표적

(지방문화재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