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혼들에게 보내시는 자비로운 사랑의 메시지

 

 

1. 메시지를 읽는 데 대한 안내

   우리가 이 책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글에 사람들은 어떤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하였다고 하는 말을 대립시킨다. 그 말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실 말씀을 모두 당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 여쭈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하느님으로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가능성이 성경의 마직막 쪽의 마지막 단어와 더불어 영원히 마감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세상에서 행하여진 하느님의 계시의 귀중한 보석상자인 바로 이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는 이제 주께 여쭈어볼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바로 그 주께서는 어떤 때 친히 우리에게 말을 걸기를 즐기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주께서 결정적으로 당신 교회에 변경할 수 없게 맡기신 그 계시된 기탁물을 보충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기탁물을 우리가 연구하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더 능동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도와주시기 위한 것이고, 영혼들의 원수가 그 기탁물의 빛을 가리려고 그것을 둘러싸는 어두움을 없애버리시기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의 뜻을 더럽히려는 경향이 너무 많은 우리 자신의 정신의 탈선에 대하여 우리를 경계시키기 위한 것이고, 끝으로 약해진 우리의 의지를 받쳐 주시고 계시된 이 기탁물을 유리하게 이용하도록 새로운 힘을 우리 의지에 전해 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기탁물 안에서 성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권고를 듣지 않는가?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1데살로니카 5,19)

   따라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하느님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핑계로 바로 이 계시의 책이 여백에 "성령" 자신에 의하여 기입된 의무 이상의 그 개입에 맹목적으로 던져졌다는 금지령은 없는 것이다.이제는 하느님께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역사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렇게도 쉽게 또 그렇게도 자주 잊어버리는 그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씀을 그렇게도 쉽게, 그렇게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변하기 쉽다는 사실이나, 하느님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대 있어서 우리를 속이기 위하여 사도 성 바오로의 말과 같이 "쉽게 빛의 천사로 변하는" 영혼들의 원수의 개입이라는 사실이나, 끝으로 우리 자신의 부패와 우리의 격정이 그 하느님의 말씀을 몰아내고자 하는 타고난 경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시된 말씀이 그들에게 과하는 억제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이 선결 조건을 정해 놓고 나서 "카리스마" 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회상시키기로 하자.
   상존은총(常存恩寵)은 사랑의 유대로 우리를 하느님께 결합시키고, 조력은총(助力恩寵)은 우리를 도와 상존은총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게 한다. 이 두 가지와는 달리 카리스카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 수익자(受益者)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주시는 가외의 은혜이다.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이 은혜의 명칭을 열거한다. 그것들은 병을 고치느 은혜,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은혜, 이바지하는 은혜, 가르치고 권고하는 은혜, 설교하고 위로하고 예언하는 은혜이다.(*)

( * 예언의 은혜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미래를 예고한다는 뜻으로, 다음에는 하느님 편에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는 방법 두 가지가 다 엄밀한 의미의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르가리따가 영감을 얻어 "메시지" 를 받아서 쓴 그 영감을 이 예언의 카리스마에 대조하는 것이 적합하다. 마르가리따는 하느님의 심부름으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교화하고 권고하고 위로한다. "나는 많은 사람의 위로가 되라고 너를 택하였다" 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1967.6.10)

   메시지를 읽는 독자에게 있어 그가 틀림없이 스스로 제기하였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 흥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메시지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카리스마가 어떤 방식으로 마르가리따에게 생겼는가? 마르가리따에게 있어서 그것을 받아서 전달한 방식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이 첫째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마르가리따가 하느님의 통지들을 받을 때에, 그것들이 두 가지 경로, 하나는 지능적인 경로, 또 하나는 청각의 경로를 통해서 그에게 이른다.

   하느님의 통로들이 지능의 경로를 통해서 마르가리따에게 올 때에는, 자기 자신에게 마음 속으로 명백히 표명하지 않고 말없이 받고 정관(靜觀)하는 어떤 지식을 순간적으로 얻게 하는 명료한 빛으로 그의 정신에 침투함으로써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청각의 경로를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는 통고들은 육체의 청각으로 듣는 물질적인 음과는 조금도 공통점이 없는 조음(調音)된 언어로 전달되는 것으로, 마음으로 지각하는 정신적인 청감(聽感)을 말한다.

   둘째 문제, 즉 마르가리따가 방금 우리가 말한 뜻으로 "이해하였거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이 전달이 마르가리따 안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발음이 행하여지는 방식에 따라서 분화(分化)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음이 지능적인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때에는 마르가리따 자신이 자기 정신에 밝게 일어나게 된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것을 구상하고 그것을 옮겨 쓰는 것이다. 이런한 전달 방식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연속적인 말" 로 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르가리따가 메시지의 표현에 "자기의 것" 을 넣는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주께서 그에게 지적으로 품게 하신 생각을 자신이 말로 명백히 표현하면서 마르가리따는 어떤 문필가든지 자기 자신이 구상한 생각을 자기 특유의 문체로 표현하듯이 자기식으로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에 마르가리따는 자기의 기질, 더 앞선 또는 덜 앞선 그의 문필적 소양의 정도, 그의 심리상태, 그의 특유의 어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마르가리따가 말하는 부적절한 용법과 부주의나 부족한 문법지식에서 오는 틀린 철자법을 쓸 수가 있다. 어휘를 잘못 써서 이 단어 대신에 저 단어를 쓰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dissemines" (퍼져 있는) 대신에 "dissipes" (흐트러진)이라는 말을 쓰고, "centripete" (구심성)이라는 말 대신에 "centrifuge" (원심성)라는 말을 쓰는 때와 같은 것이다. 그런 때에는 마르가리따의 영적 지도신부가 그 착오나 부정확한 표현들을 마르가리따가 실제로 하고자 한 뜻대로 고치는 임무를 가지게 되는데, 그는 그것을 앞뒤 문장을 보고 알게 된다.
그의 애정 넘치는 기질에 영향을 받아, 마르기리따의 많은 표현이 그 기질의 표를 보이게 되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말하는 방식이 약간 아양을 떠는 것같이 보일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은 메시지의 전달에 있어서 어떤 신학자가 매우 정확하게 "마르가리따 계수" 라고 부른 것의 개입으로 설명되며, 메시지를 슬기롭고 지혜롭게 해석하여면 이 "마르가리따 계수" 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 경우, 즉 마르가리따가 "마음 속으로 들은" 말들을 글로 써서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는 틀리는 것이 있을 수가 없고(물론 철자법 틀리는 것은 빼고 말이다. 왜냐하면 마르가리따가 그 말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듣고 옳건 그르건간에 자기 자신의 철자법에 따라 쓰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전달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명백한 말" 이라고 부른 것을 대하게 된다. 그 말들을 예수께서 명백하게 발음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명백한 말들"을 또 두 가지 범주로 세분한다. 단순히 명백한 말들과 명백하고 알맹이가 있는 말들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말의 차이는 알맹이가 있는 말들은 그 실현이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질 정도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에서 따온 두 가지 예를 여기에 들겠다.

   마르가리따는 1967년 12월 23일자에 이런 말을 썼다.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아파서, 나는 영성체로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 괴로왔다. 오후에는 약간 나아서 영성체를 청하러 갔다. 그다지도 많은 사랑을 가지고 내 마음에 내려오신 것을 예수님께 감사드렸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도 꾸준히 나를 찾는데 내가 왜 떠나겠느냐?'"
그리고 마르가리따는 그의 영혼이 예수님과의 경험적인 만남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즉시 이 알맹이 있는 말의 실현을 경험한다.
"내 영혼이 내 육체와 갈라져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의 마중을 나간 것 같다."
또 한 가지 예는 1966년 2월 24일자의 것이다.
"사랑을 더 달라고 내게 말하느냐? 너는 네가 바라고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모든 사랑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원하면 네가 감당하지 못할 사랑까지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마르가리따는 즉시 계속해서 말한다.
"그때에 나는 사랑으로 불타고 그 불꽃으로 다 타버리는 것을 느꼈다."

   메시지에서 마르가리따의 일기에만 속하는 것은 계속적인 말에만 쓴 고딕체 활자로 씌어 있다. 이 일기의 줄거리 속에 삽입된 대화의 총체가 엄밀한 의미의 메시지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명백한 말에 쓰기로 한 보통 활자로 옮겼다. 이 명백한 말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 이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 알맹이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다만 계속적인 말인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마르가리따가 그것을 지적으로 알게 되고 나서 구상한 것 같기 때문이다. ('2.메시지의 내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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