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루르드 동굴의 성모 이야기
 

루르드 동굴의 성모 이야기

당시의 시대적 상황

하느님께 대한 19세기 반란의 주동자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래 하느님이 그들에게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사용하여 보다 잘 당신에게 봉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하느님께 대항하는 무기로 이용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과학적 발명과 물질적 향상을 허락하셨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대신 모든 공을 자기들 스스로에게 돌려 버렸다...
   하느님께 대한 반란은 날로 더해 갔으며, 그 어느 누가 이를 막지 못하는 한 끝없이 더해 갔을 것이다. 그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성모님이었다. 성모님은 파리와 라살레트에 발현하셨으며, 교황은 성모님이 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교리로 선포했다. 이렇게 시작된 성모님의 반격은 1856년 그 절정에 다달았다.
    하느님께 대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극히 우수한 두되의 소유자들이었다. 고로 그들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반격도 그들 못지 않게 우수한 두뇌를 가졌으며 그들 못지 않게 훌륭한 이론을 펼 수 있는 성인을 앞세워야 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께 돌려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성모님이 택하신 사람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나이 14세가 되도록 문답도 외우지 못하는 무식한 농촌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였다...
   1858년 2월 11일 프랑스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루르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성모님은 모두 열아홉 번에 걸쳐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다...
   루르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처음 알게 된 이래 그 때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 생활에 충실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과 반달족 그리고 아리우스와 알비겐 등 이민족과 이단자들의 박해를 극복했다. 소위 종교 개혁이라는 거센 물결이 밀어 닥쳐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할 때 루르드 주민들은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전 프랑스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일어난 반란에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한 신앙 생활을 했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 공경에 그러했다.

발현 개요

성모님이 루르드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뉴스가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이 루르드의 동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모님을 보는 것은 베르나데트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컴컴한 동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르나데트의 모습을 봄으로써 성모님의 발현을 알았다. 그녀는 성모님이 발현하면 곧 탈혼 상태에 들어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믿었다. 그러나 관리들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웠다.
    2월 18일 목요일은 성모님이 세 번째 발현하신 날이었다. 성모님은 그 날 베르나데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곳에 오너라.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 베르나데트는 죽을 때까지 성모님의 이 말씀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여섯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슬픈 표정을 하시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곧 표정을 고쳐 미소 지으셨다.
    라살레트에서 성모님은 내내 통곡하셨다. 그러나 루르드에서는 간혹 슬픈 표정을 하시기도 했지만 자주자주 미소를 지으셨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도 성모께 대한 신심의 증가와 무염 시태 교리의 선포가 주요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덟 번째 발현 때 베르나데트는 두 무릎으로 성모님이 서 계신 동굴 앞 장미나무 있는 곳까지 기어 갔다. 그녀는 무릎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를 굽혀 절을 한 후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하여 "통회하라! 통회하라!"하고 외쳤다.
    아홉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우물 자리를 잡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여 년을 두고 많은 병자를 낫게 한 저 유명한 루르드의 우물이다.
    2월 26일 금요일, 성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위하여 머리를 숙여 땅에 입맞추어라." 베르나데트는 얼른 그렇게 했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3월 2일 성모님은 당신이 발현하신 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또한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3월 25일은 성모 영보 축일이었다. 그 날 따라 베르나데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부인이 바로 성모님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에게는 그저 '부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소녀는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부인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소녀가 세 번째 물었다. 그 때의 일을 베르나데트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은 장미나무 위에 서 계셨다. 그 모습은 '기적의 메달'에 그려진 성모님과 비슷했다. 내가 세 번째 물었을 때 부인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은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했다. 부인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위로 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눈을 올렸다. 부인은 서서히 손을 편 후 나를 향하더니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라고 말했다."
    순박한 농부의 딸 베르나데트는 그 중대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페라말 본당 신부에게 그 말을 전했다. 본당 신부도 그 때가지 성모님의 발현을 의심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의심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 순박한 소녀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지어 낼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님은 불과 3년 남짓 전에 교황 비오 9세가 선언한 무염 시태 교리를 그런 방법으로 추인하셨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이 얼마나 묵시적인 말이냐? 그 한마디 속에는 원조의 범명과 강생 구속 교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새로운 요약이다. 시기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원천적인 계시를 까맣게 잊어 가고 있을 때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루르드의 일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고 있었다. 점점 많아지는 군중들의 수는 그들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1789년, 1830년, 그리고 1848년 3차에 걸쳐서 프랑스 정부를 뒤엎은 것은 바로 파리의 군중이었다. 1858년 루르드에 모인 군중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제3 제국의 정정(政情)은 그리 안정되어 있지를 못했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가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하였다. 사실 그들은 보통 교우들과 똑같이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판공 성사를 보고 교무금을 내고 영성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모님의 발현 같은 것은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와 같이 인지가 발달한 시대에 그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베르나데트를 심문하고 위협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중에는 한때 절도 혐의로 옥에 갇힌 일이 있는 그녀의 아버지까지 위협했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리들은 동굴 앞에다 울타리를 치고 경찰관을 배치하여 아무도 접근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시끄러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다시는 성모님이 발현했다는 얘기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복되신 어머니와 울타리는 아무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성모님은 여전히 같은 곳에 발현하셨다. 베르나데트는 동굴 앞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눈엔 개울도 울타리도 보이지 않았다. 성모님과 나 사이의 거리도 보통 날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성모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따라 성모님은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성모 마리아는 미소를 지은 후 베르나데트에게 부드러운 이별을 고했다. 그 날은 마지막 발현의 날이었다.
   그러나 루르드의 이야기는 그 날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벨라뎃다의 발현설명과 성모님의 메시지

 

그칠줄 모르는 루르드의 성모 신심

    '루르드의 성모'께 대한 사람들의 신심은 지극하였다. 울타리를 넘다가 붙잡혀 벌금을 물고서도 또다시 울타리를 넘곤 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루르드에서 얼마 안 되는 비아리츠라는 곳에서 휴양하고 있던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탄원했다. 종교적인 사람들과 반종교적인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조정할 줄 아는 황제는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울타리를 철거했다.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루르드가 속해 있던 타브르의 주교는 조사단을 임명하여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목격자들을 여러 차례 심문하고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수십 번 청취하여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한 주교는 루르드의 신심을 인정했다.
   곧 이어 큰 성당들이 세워지고 병든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세워졌다. 오늘날 루르드의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의 하나이며 해마다 150만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찾아든다. 이들 순례자들의 신심은 고무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하는 루르드의 하늘은 온통 기도로 가득 찬 듯한 감을 준다.

    베르나데트는 후에 수녀가 되었다. 성모님이 경고한 바와같이 그녀는 현세에서는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성인'을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호기심, 베르나데트는 겸손하지 못하다고 오해한 원장 수녀의 엄격함, 그리고 육신을 갉아먹는 폐결핵 등 갖은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루르드에서 병을 고친 사람의 수효가 수백을 헤아렸지만 베르나데트는 그런 은혜도 입지 못했다.
    1879년 4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의 성모'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거룩한 마리아여, 불쌍한 죄인,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그녀는 1933년 12월 8일 성녀품에 올림을 받았다.

- 출처 : 세기의 승리자. 돈 샤키 지음, 오기선 옮김. 가톨릭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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