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개신교 신자이면서" ; 묵주기도에 대한 체험

 

    (* 이 글은 독일 베를린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사를 가르치는 프로테스탄트 신자 울리히 비커르트 교수가 묵주기도에 대한 체험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미코키 신부에게 보낸 답신이다.)

   친애하는 미코키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개신교 신자인 제가 어떻게 묵주기도를 알게 되었으며, 또 제가 왜 이 기도에 가치를 두는지 알고자 하셨습니다. 아마 신부님께서 하고 싶었던 첫 질문은 "당신은 개신교 신자인데 어떻게 마리아를 알게 되었습니까?" 하는 것일 겁니다. 마리아를 발견하게 된 것, 아니 그보다는 제가 마리아께 발견되어진 것, 그것이 첫 번째 계기요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묵주기도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서 그리 멀리 않으니까요.
물론 마리아를 발견하고 발견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마리아께로" 라는 이 말을 저는 우리가 시작해야 할 기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라고 하신 말씀과 상응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이 귀중한 선물을 받고서, 성모님께서 성자이신 아드님과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파악한 뒤에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로 갔던 것처럼 그 반대 방향도 좋은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개신교 신자이면서" 라며 질문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신앙의 확신에 따라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에 대해 역설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됩니다 (시편 103,3). 성자의 치유 행위는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완성된 후에, 이제 마리아 안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또 그를 받아들이고 중개하는 삶으로 해방된 창조가 빛을 발합니다. 고통의 열매, 그 고통의 열매에 이제 자신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해하자면 묵주기도는 이 기쁨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런데 신부님,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해사 묵주기도를 접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서요. 어느 날인가 저절로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건 아마 그냥 순종이었을 겁니다. 즉 이러한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들고 또 그분께 소중하리라는 마음에서의 단순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부님께, 제가 매일 이 묵주기도를 할 시간과 여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유로 이 기도에 충실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가장 중요한 요점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것은 성모님과 저를 연결시켜주는 물건을 제 손에 쥐고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지니고 있는 묵주는 루르드에서 선물받은 것인데, 아마 그곳에서 축성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같은 "거룩한 물건"을 코를 씰룩거리며 경멸하듯 쳐다보며 아는 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진주 목걸이(묵주)에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 부자유스럽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묵주를 손에 쥐면 그 묵주는 마리아에 대한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애정을 느끼게 해주며 일종의 농축된 사랑으로 그 애정을 명료하게 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줄 아는것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자신을 내맡길 시공간을 비축했으니까요.
   그러면 묵주기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저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분이 좋고 정신이 맑으면, 하나 하나의 신비에 실제로 정신을 집중해서 묵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언제나 위험으로부터, 기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 신비 속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의 깊이가 느껴지며, 그렇게 되면 묵주기도를 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적인 장식은 처음부터 필요없게 됩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 감정을 누르고 마음을 편안히 하며 정신을 집중시키면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전혀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너무 수다를 떠는 것 같군요. 그런 때 저는 유감스럽게도 저의 내면은 매 10단의 진주가 빨리 돌아가기를 너무나 갈망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저는 저의 스승이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도움을 전구하면서 제 육신의 나약함에 대항하여 침착하게 순종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도 벌써 뭔가를 시작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때는 처음부터 매단의 신비를 긴장해서 쫓을 의도가 조금도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묵주는 가끔 일종의 뗏목이나 나룻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의 간청을 배의 가장자리까지 꽉 채워 하느님 아버지 나라의 영원한 물가로 띄워 보냅니다. 각 신비는 열 개의 알을 통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점철되지만 그 때문에 그냥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청원과 전구가 있으며 모든 교회에 해당하는 기도들도 있습니다. 마리아없이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없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배 한 적이 옵니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간청들을 가득 싣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묵주기도입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묵주기도하는 데는 네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그 방법들은 제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기도법을 벨라뎃다 성녀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가까이에 머무는 방법이어서 결국에는 인간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방법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방법들 외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해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모님이 중요하니까요.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가까이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하시고 복되신 성모님도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백성이 유혹을 받고 있고 또 싸움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또 당신께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대로 우리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은 사랑의 깊은 보속을, 그것도 당신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인 공동체 안에서의 보속을 원하십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여기에서 기도하면서 맺는 마리아와의 관계는 묵주기도의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도로 바뀝니다. 내적으로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든, 아니면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든,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와 마리아에게서 시작하셨던 훌륭한 일을 완성해 주십사고 (필립 1,6) 마리아를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드리든 말입니다. 이 마지막의 기도형태는 많은 사람드에게는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계시며, 마리아의 단호하고 솔직하고 즐거운 관계는 모두 예수님께서 그분께 맡기신 것을 그분이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의를 필요로 하시고 그분을 위한 우리의 변함없는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향해서 기도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베를린에서 울리히 비케르트 씀.(울리히 비키르트)-마리아1997년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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