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모두를 바칩니다
결혼생활 21년째에 별거생활 또한 21년이라면 누구나 의아해할 것입니다. 결혼 후 첫아이를 임신하지마자 친정으로 가서 수개월 지내다 돌아와 남편과 겨우 3~4년 같이 생활했는데 남편은 여러가지 이유로 말없이 가출해버렸습니다. 당시 세 아이의 엄마인 저는 가난하고 약한 여자였지만 강한 어머니로 살고자 했습니다. 남편 없이도 큰 문제 없이 아이 셋을 내 힘으로 잘 키우겠다는 결심이 어리석은 것이었을까요? 그 당시 저는 처녀 때 배운 양장기술로 양장맞춤과 옷수선 일을 시작 했습니다. 별 어려움들이 뒤따랐습니다. 남편과 같이 생활할 때도 내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남편이 너무 싫고 미웠는데 별거 중에도 힘들고 고달픈 만큼 남편이 얄밉고 저주스럽고 원수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온천 3동에서 수영동에 한 칸 짜리 작은 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후 2년 동안에 이사를 무려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온갖 무시를 당해가면서 말입니다. 한번은 어린아이 셋을 부등켜 안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같이 목놓아 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에 대한 저주는 점차 더해져 마음이 차돌같이 굳어졌습니다.
재송동으로 이사해서는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화장품 판매를 했는데 친절한 개신교 신자를 만나 재송교회에 만 일 년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는 불교 신자요 하는 그런 무교였지요. 제가 판매활동하는 구역에서 천주교 신자가 다른 상표의 상품을 판매했는데, 소비자 중에도 교우 물건을 팔아줘야 한다며 거절당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계파가 많으니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다 또 구역을 바꾸어 판매활동을 하던 중 천주교 신자인 김 마틸다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교회 일 년을 다녔어도 교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운게 없고 아는 것이 없었는데 마틸다 자매에게서 교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성당에서 교리를 가르쳐주는 날이 있으니 가보자는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교리를 배워 아이들도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1984년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께로 부르신 방법은 참 묘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세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제 생활에 갑자기 무슨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저를 인도한 자매님의 권유로 난생 처음으로 54일간의 묵주의 9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54일 기도하는 동안 53일째 되는 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 그때까지 원수갚이 여겨졌던 남편이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쌓이고 쌓였던 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때때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영혼의 불쌍함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긴긴 세월을 그렇고 살고 있으니 주변의 선배 자매님들이 "이런 기도해봐라 저런 기도해봐라... 남편을 예수님처럼 생각해 봐라..." 하며 가르쳐주는 대로 그 많은 기도를 다 해봤지만 남편을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모시면서도 남편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가정과 가족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듯 내버린 그를 어떻게 예수님 바라보듯 하느냐면서 힘겹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이 아픔의 세월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싶어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함을 금치못해 울곤 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영세 때에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남편에게 영육으로 지은 죄 모두는 내탓이 아니라고 여기며 하느님 무서운 줄도 모르고 고해성사도 볼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본분으로 양심의 가책은 항상 느끼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부터 2, 3년 전 당시 저는 반여 시장에서 니트를 판매하면서 옷수선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오른쪽 무릎에 심한 통증과 동시에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축을 받으면서 병원에 갔더니 류마티스 관절염 중간기가 넘었다며 일을 해선 안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진단이 내렸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집에서 온갖 조약, 한약, 신약 다 써가며 치료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관절염이 그렇게 아프고 무서운 줄 미처 몰랐습니다. 병원에서는 몇 개월을 계속하여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삼 일도 다닐 수 없었기에 집에 와서 맨 먼저 한 기도는 한없이 눈물흘리며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고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죄인인 제가 이제 벌을 받았습니다. 제가 당신 손과 발에 구멍을 낸 자입니다. 당신 심장을 제가 찔렀습니다." 하며 기도했지요. 그러면서도 남편에 대한 미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편때문에 얻어진 병이라고 마음 속으로 원망하며 '이렇게 고생하는데 생활비라도 많이 보내줘야 된다' 고 생각하며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남편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지만 제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의 방문이 매일 줄을 이었습니다. 그 모든 분들의 기도 덕분으로 3~4개월만에 바깥 출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벌거 중이었지만 남편이 조금씩 보내오는 생활비를 쓰며 큰 딸 비비안나의 도움으로 성당 출입만 하면서 지내던 중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군대)에서 주최하는 성모님께의 완전봉헌' 을 하러 푸른군대 가자는 친구 모니카의 권유와 이끌림으로 얼떨떨하게 첫날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임에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유모어를 섞어가며 가르쳐주시는 수녀님의 강의는 정말 재미있고 가슴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자기을 죽이는 것,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기 좋고 쉬운 말로 자기를 버리라고들 하지만 실은 너무나 어려운 일어었습니다. 일 주일 분의 숙제를 받아와서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주신 숙제만큼이나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나를 죽이고 버리는 연습을 열심히 한 끝에 드디어 지난 8월 15일 마음설레이는 봉헌식을 했습니다. 그날 저는 세례, 견진성사 때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감미로움을 느꼈고 성모님과 함께 승천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봉헌식을 한 지 두 달이 지난 저는 이제야 영적인 눈을 조금씩 뜨면서 성모님과 예수님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느끼고 또한 그러한 마음을 말과 글로 표현 못해 미사 시간과 성체조배실에서, 성시간과 묵주기도할 때 은총의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은총 속에 살면서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온 걸 부끄러움에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로막고 섭니다. 이젠 남편과 부드러운 말로 전화통화도 할 수 있고 그토록 쌓이고 쌓였던 미움도 나를 죽이고 버리면서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을 여지껏 살려주시어 성모님을 통하여 당신께 봉헌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기도와 희생, 선행과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이순자 스테파니아)-마리아 1995년.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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