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질비 신부의 묵주기도
젊은 공작, 요한 폰 엑커스도르프는 불행한 연애를 경험했다. 그는 인물이 훤했고 부유했으며 성품이 온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딸인 비올라 마티니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공작은 비올라가 자신을 사랑하여 개신교 교인이 되어줄 것을 원했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소꿉놀이 친구였던 비올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거부하고 글라라 수도회의 수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젊은 귀족의 가슴속에서는 반항심이 솟구쳤다. 왜냐하면 그때가지는 모든 것이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학교에서 그는 아주 인기가 있었고, 가장 세련된 사교계의 사람들은 그의 교양이나 행동에 경의를 표했고 운명의 여신은 어떤 경우든 그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인품으로 고귀하게 해주려 했던 그 몰락한 가문의 소녀가 자신을 아주 간단히 거절해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뜻밖에 당한 거절이라 그는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상처를 입었다.
몰락해 버린 친척인 비올라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이웃 저택의 지붕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들로 그의 마음은 아팠다. 그래서 그는 마지의 나라들과 사람들을 사귀려고 여행을 떠났다. 17세기 초인 그 당시에는 하나의 풍습처럼 되어있었다.
그는 먼저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여행했다. 예술품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이면 사람들은 가장 앞에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짧고 황홀하면서도 한번은 끝이 있는 인생을 맘껏 즐기고 싶었다. 도대체 젊음과 명망이 무엇에 필요하단 말인가? 우울하게 고향 땅 아버지 집에 틀어 박혀서 가장 아릿다운 꽃이 사라져버린 이웃집 정원이나 바라보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는가?
젊은 공작의 혈관에는 모험을 즐기고 싶은 피가 살아 있었으며 그는 향유하고 싶었고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영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영국의 칙칙한 안개는 그를 미지의 땅으로 내몰았던 그 우울증이 다시 고개를 쳐들게 만들었다. 그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 머물렀던 시기는 1615년 3월 10일이었다. 사람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며 시내에 모여 있었고 우뚝 선 교수대가 제물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기뻐했던 젊은 공작은 재빨리 흥분한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곧 그 상황을 간파했다. 요한 오질비라는 젊은 예수회 신부가 처형될 것이라고 했다. 처형의 이유는 그가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 죄고의 지배권인 수코틀랜드의 야곱 1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젊은 공작은 서 있는 자리가 사형수가 개신교 목사와 함께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보는데 유리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도 들을 수 있었다. 루터교 목사는 예수회 신부가 그의 신앙을 버린다고 말하면 명예와 권려과 부를 누리게 재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수사 신부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개신교 목사는 모든 대중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시 말하자 그 사제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오로지 나의 신앙 때문에 선고를 받았고, 나의 신앙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백 개라도 기꺼이 바칠 것이요. 그러니 내가 소유한 이 한 목숨을 조금도 주저치 말고 가져가시오. 하지만 절대로 나의 신앙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요!"
오질비 신부는 교수대를 얼사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심지어 교수대 형리를 위로하기까지 했다. 그 교수대 형리는 이렇게도 아름답고 희생정신으로 가득 찬 젊은 신부를 처형해야 하는 자신의 슬픈 직무를 행할 결심을 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손을 묶기 위해 다가갔을 때 그 순교자는 이단자들의 회개를 위해 늘 기도를 바쳤던 자신의 묵주를 가까이에 서 있는 가톨릭 신자 중 한 사람이 기념으로 가질 수 있는 행운을 바라며 군중 속으로 던졌다.
그런데 구세주의 십자가가 달린 묵주는 에커스도르프 공작의 가슴에 맞았고 쉽게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격양된 가톨릭 신자들은 황급히 그 이방인에게서 그 귀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한 순교자의 이 사랑의 증거물을 불과 몇 초 동안 손안에 쥐었을 뿐이데도 마치 묵주에 얻어맞아 상처라도 난 것처럼 그 젊은 공작은 통증을 느꼈다. 그는 이미 처형당한 그 사람의 마지막 눈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몹시 충격을 받은 젊은 공작은 늦게 숙소로 돌아와서 자신을 깊이 감동시켰던 특별한 체험을 생각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젊은 가톨릭 신부의 영웅적인 죽음에 대해 몇주일 아니 몇 개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마침내는 그러한 희생의 용기를 발휘하게 했던 가르침을 비웃고 비판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더 상세히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향략과 모험과 쾌락을 추구하는 대신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했고 젊은 순교자가 던진 묵주가 자신의 손에 떨어진지 사 년 후에는 에커스도르프 공작 역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제가 오늘 오질비 신부의 묵주를 손에 넣을 사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돈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의 이 모든 놀라운 회개는 오로지 그분의 묵주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1999년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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