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어떤 칼도 그와 같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어두운 성전 안으로 들어가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혹시 먹을 것이 없습니까? ...아무것이라도 주십시오"하고 속삭이듯 말하였습니다. 사제가 "보통 떡은 지금 없고 거룩한 떡밖에 없소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여기 창이나 칼리 없습니까?" 하고 다윗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돌팔매로 죽인 불레셋 장수 골리앗의 칼밖에 없소이다. ...그것이라도 가질 생각이 있으면 가지시오. 이곳에 다른 무기라곤 없소이다." 다윗은 "그만한 것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하면 그것을 받아가졌습니다.(1사무 21,1~10 참조)
   이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때때로 묵주기도에 적용됩니다. 사울로부터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 젊은 다윗처럼 사람들은 왕이나 적으로부터가 아니라 죽음의 원수인 사탄과 유혹으로부터 더욱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실제로 다윗의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교회로 달려가 외쳐야 합니다. "창이나 칼이 없습니까?" 그러면 교회는 대답할 것입니다. "사탄의 머리를 죄와 더불어 그 발꿈치로 바수어 버릴 여인의 칼인 묵주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더불어 웃음을 띠고 말할 것입니다. "그만한 것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것을 제게 주십시오."
   성모님께 드리는 가장 힘찬 기도는 진실로 칼이란 명칭으로 획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영적 자녀들의 손에 쥐어진, 지옥의 공격을 부수어 뜨리는 가장 힘있는 무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적들이 내부에서 치명적인 전투를 일삼는 많은 전투에서 두드러진 승리는 거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쟁에서 - 1571년 레판토와 1683년 비엔나에서 - 주된 승리의 요인은 묵주기도였던 것입니다.

가장 큰 전쟁 - 레판토
   교회의 적이 있는 곳에는 묵주기도가 언제나 필요합니다. 세월이 흘러 마리아의 은빛 칼날은 회교도의 굽은 칼날을 산산히 부수어 버렸습니다. 10세기 이상 회교도들은 파괴로서 세상을 위협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주변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강대한 세력을 , 성지 이스라엘에서 그리이스까지 그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732년 찰스 마르텔은 투르의 전투에서 그들의 서양진출을 차단시켰으며 동방세력은 바다에서 육지까지 날마다 커져갔습니다. 드디어 1571년 레판토에서 그리스도교에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군대는 오스트리아의 돈 요한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고 회교도의 군대는 오치아의 파스하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습니다. 파스하의 꿈은 "사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산들을 깨트려버려라. 붉고 하얀 모래를 채로 쳐서 성인의 뼈를 버리도록 하라"(체스터톤의 시)는 것이었습니다. 파스하의 목표는 지중해를 장악하려는 해전이었습니다. 그 세력은 그리스도교의 101개 군함을 대항하는 터어키의 330개의 군함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무기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해전이 일어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한 군사가 있었으니 그의 팔은 기도속에 높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교황 성 비오 5세였습니다. 첫 대포가 레판토 해변을 쏘기 전부터 그는 전쟁을 위해 그의 칼을 빼내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2년 전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거리에서 모여 40시간 행렬기도를 하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손가락은 묵주알을 굴렸던 것입니다.
   돈 요한은 함대의 키를 조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바다의 파도를 다스렸습니다. 전쟁터의 포근한 10월 아침에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무릎을 꿇었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시간 동안 군사들은 각자의 함대에 흩어져 묵주를 손에 잡고 기도하였습니다.
   1571년 10월 7일 두 함대가 부서졌으며, 이탈리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로마시내에는 추기경들이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역정을 내듯이 둘러보았습니다. 정말 교황님은 매우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업무는 업무였던 것입니다. 좌석 한 가운데서 오른쪽으로 일어서서 창문을 응시하는 분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불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여기서 전쟁터를 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비오 5세 교황님은 이상한 빛으로 이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서서 "전쟁은 이겼습니다."하고 단순하게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옳았습니다"하고 베네치아 원로회의는 선언했습니다. "승리를 가져온 것은 장군들도 아니요, 포부대도 아니며, 무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묵주기도의 성모님이십니다."

1683년 비엔나
   회교도들은 자기네 군대막사를 쉽게 철수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20만 대군은 출애굽기의 메뚜기 재앙처럼 그들 앞에 놓인 모든 것을 파멸시키면서 오스트리아를 가로질러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실날같은 희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엔나시를 회교도들이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배고픔, 고통, 질병, 죽음이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시 한번 묵주기도를 손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9월 12일 외로운 트럼펫 소리가 가까운 언덕에서 울려퍼졌습니다. 폴란드와 로렌느(프랑스 동부지방) 지방에서 온 군대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회교도들에게는 부담이 늘어갔습니다. 세 번째 그들은 돌아서서 도망쳤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구출되었던 것입니다.
   거듭 거듭 마리아의 칼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손에 있는 이 칼로써 우리는 또 정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좋은 칼은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는 공산주의에서 구원되었다
   역사가들은 오직도 1955년 5월 13일 소련이 어떻게 오스트리아를 독립시키고 자기네 군대를 철수시켰는지 아직도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형라기는 50번이나 값비싼 투쟁적 혁명을 일으키고서도 성취할 수 없었던 독립을, 또 체코슬로바키아는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자유화운동을 60번이나 했지만 얻을 수 없었는데 오스트리아는 그와 비슷한 어떤 뚜렷한 노력도 없이 독립을 성취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는 크레믈린의 공산주의 거두들이 전략적 위치나 석유자원에 매여 포기해버릴 만큼 작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2차 대전시 소련을 반대한 독일과 동맹했던 그 나라를 아무런 이유없이 순순히 물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의 독립에 동의했고 동의서에 서명했던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들은 1955년 이 작은 공화국에서 자기네 군대를 철수시켰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스트리아는 자기네 자유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져 있다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프란치스코회의 베드로 파블리체크 신부가 쓰고 1955년 10월 13일 출판된 "보즈 다 파티마(Voz da Fatima)"는 파티마 성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수만 명이 묵주기도를 바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7백만 명의 오스트리아 국민 중 10%인 70만 명 이상이 파티마 성모님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베드로 파블리체크 신부의 다음 글을 보기로 합시다.
   "성모님이 어떻게 오스트리아가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셨는지는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티마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된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5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모든 신문들은 소련이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찬성하였으며, 81번째 회개와 보속을 강론한 그 날 소련은 바로 비엔나에서 동의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파티마 성모님이 당신의 순례지로 여기신 이곳 프란치스코 성당에 수천 명이 참석하였던 아홉 번째 달 9일기도 중에 아홉 번째 강론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7년간 매일 성모님께 충실하게 찾아와서 3시부터 저녁 8시까지 묵주기도와 다른 기도를 바친 비엔나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시는 진실로 놀라운 성모님의 보상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남녀 대군단을 이끄는 데에 큰 도구가 되었던 열심한 프란치스코회원은 아직도 그것에 만족치 않고 있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오스트리아를 위해 획득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또한 전세계를 위해서도 얻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이 승리할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오상을 받은 유명한 데레사 노이만은 1962년 9월 18일 죽기 전, 오스트리아가 묵주기도를 통해 구원되었다는 베드로 신부의 믿음을 확고히 해주셨습니다. 알프레드 윌리암씨가 데레사 노이만이 죽기 전 정확히 3개월 전에 찾아가서 독일에 있던 노이만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7년전 오스트리아의 자유가 얻어진 것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기도 때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자 노이만은 아주 단호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고 말고, 그렇고 말고, 소련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게 한 것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기도와 많은 묵주기도 때문이었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데레사 노이만은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를 계속 전파하기 위해, 윌리암씨를 격려하기 위해서, 거기에 갔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실현된 것이 전세계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로렌스 언더동크)-마리아 1999년 95호 -

[HOME] Copyright 2000-2003 Agnes L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