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복자 비오신부의 생애에 있어서의 마리아

 

    시성되는 모든 성인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증거한다 : 거룩함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정배이신 마리아께 신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모든 은총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 다른 은총이란 있을 수 있겠는가?
   몽포르의 성 루드비코의 마리아에 관한 고전 작품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에 따르면 마지막 시기에 사탄의 공격이 가장 사납고 격렬할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사탄과 그 추종자들을 눌러 승리로 이끌 마지막 시기의 위대한 성인들과 사도들에 대해 말했는데 그러나 비오 신부와 같은 이들을 묘사한듯 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청빈하고 겸손하고 세상을 업신여기는 참된 제자들이다... 그들은 피로 물든 십자가 깃발을 어깨에 메고, 오른손에는 십자고상을, 왼손에는 묵주를 들고, 또 가슴에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새기고 전진할 것이다."(예수, 마리아는 비오 신부가 임종 전에 한 마지막 말이었다.)
   비오 신부의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어린 시절부터 노인이 되었을 때까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소년으로서 어떻게 나폴리 근처의 폼페이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님 성전에 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군인으로 나폴리에 주둔했을 때 어떻게 그 성전을 자주 방문할 수 있었는지는 후에 그의 생애 안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마리아께 드리는 그의 사랑을 아무것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비오 신부가 태어난 이탈리아의 특별한 지역인 피에트렐키나에서는 특별히 수호성인으로 '자유의 성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에 관한 짧은 묵상을 글로 남기고 또 그의 초기 편지에서는 성모님께 대한 언급을 여기 저기 써놓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많이 표현되었다. (나중에 교황청에서는 한동안 그가 편지 쓰는 것을 금지 했다. 그래서 마리아께 대한 그의 편지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사제적 삶을 통하여 성모님께 영광을 드린 비오 신부의 가장 아름답고 효과적인 "강론"은 바로 그가 끊임없이 드렸던 묵주기도이다. 합리주의자와 물질주의자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인, 천국과 초자연적인 세계에로 그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이 희망의 묵주기도였다.
   우리 시대에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위대한 마리아 성인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이다. 성모님은 성 콜베 신부와 마찬가지로 비오 신부에게도 나타나셨다.
   이십 년 후에 그에게 왜 이 사실과 그 외의 다른 초자연적인 방문을 비밀로 지켜왔는지를 질문했을 때 그는 아주 진지하게 모든 사람이 성모님을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비오 신부의 영적 지도자인 성 마르코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그 대답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솔직 담백하게 "신부님께서는 성모님을 보지 못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보지 못했다는 나의 대답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로지 거룩한 겸손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군요."
   프란치스코(비오 신부의 세례명)가 프란츠스코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히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수도자들의 오랜 세월의 마리아적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성모님은 원죄없는 잉태와 성모님의 승천에 관한 위대한 투사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오늘날도 그러한 이들은 모든 은총의 중개자인 성모님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아드님의 발치에 서 계신 고통의 마리아께 중점을 둔 것이다. 순교자들의 여왕으로부터 비오 신부는 고통스런 상처와 그렇게 많은 다른 고통들을 어떻게 영웅적으로 참아야 하는가를 배웠다.
   다른 이들을 영신적으로 지도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녀 마리아처럼 십자가에 기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서 비틀거리시면서도 자신이 버려졌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심지어 우실 수조차 없으셨던 그때에 더많은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비오 신부가 이 단순한 기도인 묵주기도를 가난한 자, 부유한 자, 배운 자, 젊은이, 노인, 즉 모든 이들에게 자주 하라고 권장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가 묵주기도를 통해 당신의 영신적인 자녀들을 돌보시는 성모님의 현존과 보호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묵주는 여전히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마치 그는 자신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여기에 마음의 평화가 있고 악에 대한 승리가 있으며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 생기는 모든 방해물을 물리칠 힘이 있습니다."
   그가 영혼들을 위해 받은 모든 은총과 기적들은 바로 이 묵주기도를 통해서 온 것이다. 죄인들의 삶을 고치도록 이끌고 그이 영적인 자녀들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거룩함을 찾도록 격려해 준 그의 힘은 그이 기도생활, 특히 묵주기도의 열매였다.
   어느 날 그가 "영신적 자녀들에게 남겨 주고 싶은 유산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시 "묵주기도"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죄근에 발현하시는 어느 곳에서나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루에 묵주기도를 얼마나 바치는가"라는 질문에 서른 다섯 단을 한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느냐"고 말하자 그는 "어떻게 당신은 그 정도의 기도를 할 수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그가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예는 숫자에 관계없이 묵주기도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 신심을 버린 사람들에 반대된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의 삶의 기쁨과, 고통과 영광의 신비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의 중심적 사건을 되새기는 완벽한 수단이다.
   여기 50년 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묵주를 드러내 보이면서 기도해 온, 예수님의 오상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 있다. 그는 묵주기도에 관해 말하기를 "이 기도를 통해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승리를 하게 하십니다." 라고 말했다. 임종 이틀 전에 그는 거듭해서 말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해 드리십시오.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할 수 있는 한 많이 바치도록 하십시오."
   이와 같은 사실은 1917년 파티마의 발현에서 당신 자신을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하시면서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요청하신 성모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꼭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비오 신부는 파티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기도를 통해 그리고 보속과 자신의 전 생애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함으로써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그 메시지의 방식대로 세계 평화를 위해 살았다. 1917년 세 명의 목격자에게 하신 성모님의 말씀들을 비오 신부는 명확히 이해했고 또 살아냈던 것이다. "많은 영혼들이 아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희생을 바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지옥으로 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을 고치고, 죄에 대한 용서를 빌라고 권고하려고 왔다... 그들(죄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이미 깊은 상처를 입으신 주님의 마음을 더 이상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라... 만일 사람들이 내가 말한 것을 지키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것이고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결국은 내 티없는 성심이 승리할 것이고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며 평화가 오게 될 것이다."
   비오 신부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몸으로 채우는(1골로 1,24)" 공동 구속자로서의 아주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이해했다. 그는 "영혼들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값을 치르고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드리 예수님이란 값을 치른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항상 같은 값으로 얻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내하고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된 그의 고통스런 삶 안에서 행한 그의 영웅적인 인내를 통하여 구원된 영혼들은 심판날에 밝혀질 모든 사실에 얼마나 놀라겠는가!
   파티마의 교황인 비오 12세께서는 1952년에, 성모님께서 긴급히 요청하신 기도를 강조하면서 그의 영신적인 자녀들에게 기도 그룹을 만들라고 권고했다.
   비오 신부는 이 호소를 듣고는, 즉시 그의 영신적인 자녀들에게 교황님의 훈계를 실천하라고 권장했다. 이 기도 그룹은 곧 비오 신부의 기도 그룹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전 세계를 통해 퍼져나갔다.
   파티마의 성모님의 푸른군대는 파티마 메시지를 더 널리 퍼지게 하는데 있어서 비오 신부의 승인과 도움을 구했다. 푸른군대의 창시자인 헤롤드 콜겐 몽시뇰은 비오 신부에게 푸른군대의 영신적인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그리고 푸른군대 대원들을 그의 영원한 자녀들로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했다. 비오 신부는 웃으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덧붙였다. "그들이 잘 행동한다면 기꺼이." 그는 푸른군대 대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숫자만큼 된다면,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959년 파티마 순례 성모상은 헬리곱터로 이탈리아에 있는 주요 도시들을 순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회원들로부터 그가 성모님의 산 지오반니 로툰도의 방문을 얼마나 고대했는지를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성모상이 5월 5일 이탈리아에 도착한 날, 비오 신부는 심한 늑막염으로 쓰러져 있었다. 비오 신부가 오상을 받은 지 40년이 됨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리고 거기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성모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정을 예외적으로 변동했다. 비오 신부는 그의 병실 침대에서 확성기를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성모상의 방문을 준비하라고 권고하였다.
   8월 5일 성모상은 산 지오반니 로툰도에 도착했고 그는 깊이 감동되어 이렇게 발표했다. "몇 분만 기다리면 성모님께서는 우리 집에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성모님께 맡기십시오. 성모님의 눈길이 영원히 우리에게 머물도록 열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맡기십시오."
   8월 6일 아침 동안 내내 그는 성당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성모님께 친구 할 수 있도록 그의 얼굴 앞에 성모상을 내려 놓았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비오 신부의 좋은 친구였던 산 지오반니시의 시장이 가장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산 지오반니에서 뿐 아니라 전 지역에서 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비오 신부님! 성모님께 대한 그분의 신심은 그분이 지닌 가장 뛰어난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병상에서라도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모님께 경의를 표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성모상을 병원의 경당 안으로 모시기 위해 헬리곱터로 들어올렸을 때 그분은 성모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어나겠다고 고집하셨습니다.
   장상이 그것을 금하지 않았기에 두 분의 수사님들이 팔짱을 끼고 부축해 주었고 그래서 그분은 성모님께 예의를 표하러 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대단한 의지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이나 멈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목놓아 울면서 그분은 파티마의 성모님과 꼭같은 유명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은 세상에 현존하는 고통을 예언하셨고 러시아의 회개를 약속하셨으며, 만일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러시아는 회개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모상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셔가기 위해 헬리곱터가 많은 군중들 위로 성모상을 떠올렸을 때, 비오 신부는 다시 병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엔진 소리와 군중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오 신부는 큰 소리로 성모님께 외쳤습니다: '4월 25일, 당신께서 이탈리아에 도착한 날 나는 아파누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떠나려 하십니다.'
   헬리곱터의 조종사는 후에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유를 보고했습니다. 그가 머리를 젖히고 있었을 때 갑자기 한 바퀴 돌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헬리곱터를 수도원 뒤로 몰로가서 몇 번 원을 그리며 돌고 난 후 날아갔습니다.
   몇 분 후 비오 신부는 "나는 몹시 떨립니다. 그리고 지금 내 생애에 있어서 전에는 결코 있어 본 적이 없는 강함과 건강함을 느낍니다." 하고 자기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후에 비오 신부는 파티마 성모님이 주신 한 순간의 이 치유에 대해 공식적인 설명을 하였고, 감사를 표하는 마음으로 파티마로 십자가를 보냈다. 몇 달 후 파티마 성모상을 그에게 선물했고, 그는 매일 아침 미사를 준비하는 제의방 탁자위에 성모상을 모셔놓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이탈리아에 더 크고 유명한 도시인 포기아시를 제쳐두고 산지오반니 로툰도가 선택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아이같이 솔직하게 "성모님은 오셔서 비오 신부를 치유해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 다른 위대한 마리안 성인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처럼 비오 신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곤 하였다.
   "마리아께 대해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에 관하여 말해 달라고 요청받으면 그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마리아께 대한 그의 부드러운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그의 방 입구의 문 위에는 위대한 마리아 성인인 성 베르나르도의 "마리아는 나의 모든 희망의 원천입니다." 라는 말이 걸려 있다. 수사들 중 한 명은 성모님께 관해 비오 신부가 말한 몇 개의 아름다운 별칭을 기록해 놓았다: "은총과 순수의 심연, 창조주의 비할 수 없는 걸작품: 지존하신 이의 감실: 하느님 신비의 그릇: 빛으로 가득 찬 여인: 섬세한 비둘기."
   성 프란치스코의 진정한 아들로서 그리고 프란치스칸 은총에 따라서 그는 마리아의 첫 번째 위대한 특권과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원죄 없는 잉태는 구원의 길에서 첫 발걸음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성모님의 보편적인 중개를 확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은 성모님께 되돌아가고 모든 은총은 성모님을 통해 옵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특별한 허락으로 그는 원죄 없는 잉태의 미사만을 말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가 마리아께만 멈추어 그의 마지막 목적인 마리아의 아드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그가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해서 한 이 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오, 오묘하신 어머니, 제가 그분을 사랑하게 하소서. 제 마음을 당신 안에 있는 불타는 사랑으로 채워주소서... 제가 저의 하느님과 당신의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순결케 하소서. 제가 영혼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그분을 흠숭하도록 제 영혼을 순결하게 하소서. 제 몸이 그분을 위해 살아 있는 감실이 되도록 저를 순결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비오 신부에게 자주 나타나셨듯이 마리아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성모님께서 제대를 향해 걷고 있는 그와 동행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성모님은 친절하시게도 오늘 아침 나와 함께 제대까지 가셨습니다. 마치 성모님은 나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신듯 하셨고, 내 마음을 거룩한 애정으로 완전히 채우셨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서 불타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불을 느꼈습니다. 나는 나를 소모시키고 있던 그 불길을 끄기 위해 얼음을 넣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성모님을 사랑하라고 외친, 온 세상의 죄인들을 초대할 만큼 강한, 어떤 한 목소리를 원합니다."
   죽음의 순간, 사람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전 삶을 재빨리 스쳐 돌아본다고 한다. 그 순간에 한 인간의 생의 주요한 방향이 나타난다. 그것이 선의 목적을 향한 것이든 악을 향한 것이든, 비오 신부는 9월 23일 아침, 임종 전에 그의 생애의 주요한 방향을 한 마디로 중얼거렸다.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이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충직한 종 비오 신부와 함께 당신 십자가를 나누어 짊어지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 당신 아들의 발치에 서 계셨던 마리아는, 오상을 받은 이 프란치스칸이 인류에게 남긴 영적 유산이다. 만일 성모님과 예수님과 비오 신부의 모범을 따라 우리가 그분들의 고통을 나누어 받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영광도 나누어 받을 것이다. - 마리아 2000년 1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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