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완덕에 불림받은 그리스도인

(안톤 찌게나오스 신부. 독일 아욱스부르그 신학대학 교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롬바르디 신부는 "사랑의 십자군"을 설교했다. 그는 언젠가 말했다. "이제 때가 올 것입니다. 성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각각 외따로 산꼭대기에서처럼 살 것이 아니라 들판의 꽃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례에서 성인들의 축일을 기리고 그들의 이름을 받아지니며 그들에게 교회를 봉헌한다. 그리고 성인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고 싶은지 물으면 그는 그런 무리한 요구를 강하게 거부한다. 성인이란 존재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띄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인이란 교회 안에서 있는 창백한 석고상이나 수도승 같은 이상한 모습의 특별한 사람들이며, 또한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기껏해야 위선자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밖에도 그는 자신이 결코 교회가 인정하는 위대한 성인이 되지 못할 것임을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분명하게 확언하기도 한다. 거룩함이란 그러므로 현실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각 지역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 대개 이렇게 인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필립비 1,1)" 또는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들(2고린 1,1)" 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로마의 교우 여러분에게(로마 1,7)." 로마의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의지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을 성스럽게 하셨기 때문에 성도라 불리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도가 된 사람들" (1고린 1,2) 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성스럽게 하신다(참조: 에페 5,26).
   사도 바오로는 또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도 거룩하게 살 것을 권고한다. "하느님께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그러한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언급한다(1데살 4, 1~8).

성인의 위대한 가치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도록 불림받았다. 거룩함이란 각자의 노력의 결과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업적이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실까? 하느님의 방법은 각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고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분은 보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하찮게 여기게 된다. 이 보물이란 결국 "사랑의 그리스도"이시다. 철학은 경이에서 시작된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경이로움"이 바로 거룩함의 시작이며 성인이 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위대하신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받는 존재로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다시 계속해서 되돌려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사랑이 그 사람의 행위의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경직되고 부자유스러울 뿐 아니라, 영혼은 병들게 되고 어쩌면 우스꽝스러워질 것이다. 결국 의지의 강도가 아니라 - 이것이 아주 중요한 점이다 - 사랑의 강도가 성인을 만드는 것이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어느 병자 앞에서 구토를 느꼈을 때 오히려 그 환자를 씻긴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것은 의학적으로 보면 어리석고 거부감을 일으키며 어이없다 못해 미친 짓이고, 결코 모방해선 안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타리나 성녀의 행위는 가장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인 것이다. 나병환자 앞에서 자신의 구토를 극복하려고 그 환자에게 입을 맞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불구의 어린이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돌봐준 튀링겐의 엘리사벳에게서도 그와 똑같은 사랑의 완성을 볼 수 있으며, 그와 똑같은 사랑의 위대한 가치가 인정된다.

성인의 본질
   우리는 이러한 사례에서 본질을 간과하면 안된다. 즉 성인이란 사랑의 위대한 실천가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 그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다시 창조하신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모습 중 어느 한 부분을 환히 빛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안나 샤퍼(Anna Schafer, 2001년에 시복)는 수십 년 간 병을 앓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교훈과 기적을 나타내시고 고통에서 그녀를 구하셨다. 또 돈 보스코, 마리아 바르트, 데레사 게하르딩거처럼 청소년들을 돌보고 교유시킨 성인들이 있다. 그들에게서는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천주의 성 요한처럼 병자를 돌보았던 성인들은 병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빈센트 폰 아 바오로는 노예선에 붙잡혀 있는 노예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득하게 한다. 아르스의 비안네, 파두아의 레오폴드 만디, 비오 신부 같은 성인들은 고해의 필요성과 죄인을 해방시키는 죄사함의 사랑을 증거한다. 이처럼 성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며, 반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난한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인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덕을 실현하도록 부름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교회헌장 40항). 인간은 모두가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 48).

   성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믿음 가운데 살며 그 믿음이 참됨을 증명한다.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순수하다. 하지만 그러한 순수함은 일반적으로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보다는 그가 죽은 후 후세대 사람들에게서 먼저 인정 받는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후에야 사람들은 결국 그의 삶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반응이 가능하다. 즉 그의 삶에 마음을 열고 그를 따르거나, 또는 알아 듣기는 하지만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부하고 반항한다. 마지막으로 가능한 세 번째 반응은, 예수님과 성인들의 삶을 거부하지는 않고 일단 받아들이되 그것을 자신의 삶에 맞게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일치되어 성인들은 놀랍게도 모두가 하나의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그리스도 신자인 알료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이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수용소 안의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판결에 한탄하는 동안 알료사는 저녁에 기도하거나 성서를 읽는다. 알료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동료 수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것에 저항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한 사람이 그 말을 인정하면서 알료사에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고, 당신이 무엇을 위해 고통받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이 1941년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작가 솔제니친은 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은 많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 선을 경험하면 감사하며 기뻐하고, 질병이나 고통 같은 불행을 당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것을 구원의 은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어도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기회로 알며, 설사 죽게 되어도 주님과 함께 있는 기회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 처럼 성인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은 고통이나 존재의 어려움에 직면해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해낸다. 이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햐 하겠다.

무명의 성인
   위대한 성인에 관해 길게 고찰하는 것은 성급하게 그들을 모방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자기만의 방법을 갖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위대한 성인들을 우리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고, 그들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으며 그들 덕분에 인생의 모든 상황을 그리스도와 함께 견뎌나갈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진 위대한 성인들과는 달리 익명의 성인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십 년간 다발성 신경경화증 환자인 남편을 사랑으로 보살핀 부인, 미개한 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선교사, 낙태를 거부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여인, 커다란 인내로서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환자 등등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커다란 사랑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묵묵히 참고 받아들일 때 그들은 무영의 성인, 익명의 성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완덕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마리아 2002년 3~4월 1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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