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마리아'지 기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성식

 

2002년 6월 16일 거행된 비오 신부의 시성식에
약 40만명의 순례객들이 모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성식이 되었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
1961년 10월 21일, 푸른군대 창설자인 해롤드 콜갠 신부는 비오 신부에게 푸른군대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주고 푸른군대 단원들을 영적 자녀로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그때 비오 신부는 쾌히 승낙하시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푸른군대에 서약한 이들이 서약에 충실하여 살아간다면 그들을 내 영적 자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성 비오 신부의 생애
그는 1887년 5월 25일 이태리 남부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1910년 8월 10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1918년 9월 20일에는 오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68년 9월 23일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2002년 6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비오 신부의 영웅적인 덕행들에 대해 교황청이 인정하다
비오 신부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바로 “십자가”였다. 비오 신부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거룩한 십자가를 사도적 도구로 세워 놓은 사도 바울로를 좋았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19~20) 그는 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훌륭한 후계자였다.
그는 1903년 1월 6일 열여섯 살의 나이로 프란치스코 카푸친 수도회의 지원자로 입회했고 비오 수사로 불리게 되었다.
비오 신부의 특별한 사명은 밤낮으로 죄인들의 고해를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오 신부가 사도적 활동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생각했던 것은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때였다. 한편 비오 신부는 “고통 받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집”의 창설로 많은 가족들의 고통과 불행을 덜어 주었다.

성 비오 신부의 신앙
비오 신부는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책에서 하느님에 대해 배우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찾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주님의 성흔을 받은 성 비오 신부
“8월 5일 저녁, 나는 세미나에 참석한 소년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고해소에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늘의 천사를 보았는데 그의 손에는 철로 만든 창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그 끝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보는 순간 그는 온 힘을 다해 그 창을 내 영혼에 던졌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비명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는 죽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고 더 이상 고해성사를 계속해 나갈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소년에게 그가 그만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고난은 8월 7일 아침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 끔찍했던 날들 동안 내가 견뎌내야 했던 것들을 나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죽을 때까지 나는 주님의 거룩한 상처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결코 아물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고통을 가져다 줄 상처를 느낀다.”

 

“성모님을 사랑하라!
묵주기도를 바쳐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하시기를!“

“내가 가장 평안하지 못할 때는
성찬식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아침에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전에
내 마음은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들어 올려지는 것 같습니다.“
(성 비오 신부님 말씀)

- 마리아 2002년 9~10월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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