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한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감사했습니다”(스타니 슬라우 주교)
2001년 5월 13일 루블린 가톨릭 대학은
교황청 직원들의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하는 스타니 슬라우(Stanislaw Dziwisz)주교에게
신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키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가 1981년 5월 13일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에 관해 진술한 내용이다.
“하느님께서 복되신 우리 어머니의 중재를 통해 저격자의 손에서
교황을 구해 주셨던 그날이 지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수요일 오후5시, 다른 날과 마친가지로 교황은 일반 알현을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17분, 그가 두 번째로 광장을 돌아보고 있었을 때 그를 향햐 발포된 총소리가 들렸다.
살인 전문가인 알리 마흐메트 아카가 총을 쏘았고 그 총알은 교황의 오른쪽 팔꿈치와 검지 손가락을 스치고 교황의 가슴에 구멍을 내었다. 총알은 교황의 몸을 관통하여 우리 가운데에 떨어졌다. 이어서 나는 두 번의 총성을 들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두 사람이 총을 맞았다. 나는 목숨을 구했지만 그 총의 화력은 너무 강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나는 교황께 “어딥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가슴에” 라고 대답했다. “다쳤습니까?” “다쳤다네.” 그는 대답했다. 그 순간 교황은 쓰러졌다. 나는 그의 뒤에 서 있었기에 그를 부축할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기력을 잃었다. 그 모든 일은 한 순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그 순간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행동했고, 그것이 생사의 위험 속에 있는 교황의 생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말할 수 있다.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없었고 근방에 의사라고는 없었다. 단 한번의 잘못된 결정이 불미스러운 결과들을 가져올 수도 있었으리라.
시급을 다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먼저 담당 의사인 레나토 부조네티 박사와 함께 그를 구급차로 모시고 제멜리 종합병원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 가는 도중 교황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계속 기도했다.
부상당한 교황은 먼저 특별실로 옮겨진 후 거기서 곧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다.
외과 의사인 프란치스코 크루치는 특별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그날 휴무여서 자신의 집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힘이 그를 병원에 가게 만들었다. 병원에 가는 도중에 그는 이 사건에 관한 라디오 뉴스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나에게 확인해 주었다. 외과 과장인 카스티글리오네 박사가 밀란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그가 손수 수술을 집도했다. 카스티글리오네는 수슬이 끝날 때쯤 제멜리 병원에 도착했다.
다른 의사들이 크루치 박사를 도왔다. 수술실은 붐볐고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교황의 몸은 혈액의 부족으로 위험했고 수혈할 피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혈액형이 같은 몇 명의 의사들이 교황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무 불평없이 자신들의 피를 내주었다.
수술 도중 부조네티는 나를 돌아보며, 혹시 환자가 숨이 넘어가려 하면 환자의 종부성사를 집전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교황의 혈압은 떨어지고 있었고 심장 박동은 매우 약해졌다. 수혈 후 그는 극도로 복잡한 외과 수술을 다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수슬은 5시간 20분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소생에 대한 희망은 점차 증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교황청 직원들, 추기경들, 이탈리아의 정치계 인사들도 이탈리아의 대통령 산드로 페르티니와 함께 도착했다. 대통령은 새벽 2시까지 교황의 병상을 지켰다. 또 이탈리아의 정치 당수들도 왔다. 수술 후 교황은 회복실로 옮겨졌다. 의사들은 감염과 다른 합병증을 걱정했다. 이틀 동안 교황은 큰 통증을 겪었지만 회생에 대한 가망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는 5월 18일까지 계속 집중 치료를 받았다.
5월 17일 주일 아침, 교황은 ‘하늘의 여왕’을 위한 짧은 묵상을 기록했다. 그는 그 글속에 많은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감사와 자신을 살해하려던 자에 대한 용서의 말, 성모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날 특수 전문의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두 명, 그리고 프랑스, 독일, 스페인과 크라카우에서 각각 한 명씩 파견된 전문의들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건강상태를 검진하였고 치료는 아주 긍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살인 미수 사건이 난 일주일 후 우리는 “하느님께 찬미”라는 노래를 불렀다.교황과 파티마
사람들은 계속해서 파티마 발현과 그 사건의 날짜를 연관시키기 시작했다. 파티마 성모님의 중개를 통해 교황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소문이 점점 더 많이 퍼지기 시작했다. 교황은 6월 3일 교황청에 도착했다. 병원을 떠나기 전 교황은 의사들과 병원의 직원들을 만났다. 그는 오후 7시에 바티칸을 향해 떠났다. 교황이 교황청 식구들과 다시 만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교황의 존재는 사도좌를 새로운 생명으로 채웠다. 이렇게 해서 살인 미수 사건으로 그가 겪어야 했던 생존 싸움의 첫 단계가 끝이 났다.
교황은 계속적으로 제멜리 병원과 바티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다. 6월 7일 성령강림 주일 오후에 교황은 성모 대성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께 교회와 세계를 봉헌하는 중요한 예식을 거행했다. 이 예식은 바티칸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다. 그러나 6월 9일, 교황은 다시 열리 나기 시작했고 상태가 나빠졌다. 더구나 계속적인 검진으로 몸은 지쳐갔고 구체적인 효과도 없었다. 여러날 동안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가 그의 체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의료진은 그의 건강 상태와 생명에 대한 위험성을 걱정하여 그를 다시 제멜리 종합병원으로 옮기자고 결정했다. 그는 너무나 약해져 있어서 성무일도의 기도문도 읽을 수 없었다. 6월 20일, 교황은 다시 한 번 더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6월 22일, 폐속에 병원균이 침입한 것이 밝혀졌지만 점차로 사라졌다. 그날 처음으로 그 심각한 증상의 원인이 ‘거대세포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발견으로 적절한 치료가 가능해졌다.
두 번째 수술 날짜가 8월 5일로 잡혔다. 이는 교황 자신이 ‘눈의 성모님’에게 봉헌된 날을 선택한 것이다. 수술은 크루치 박사의 주도 하에 다른 여러 박사들과 함께 한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다시 살아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14일 아침기도와 묵상 후 교황은 병원에 있는 환자들과 대화를 했고, 그를 간호했던 의사들과 진료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 성당에 들어갔다. 성 다마소의 뜰에서 그는 추기경들과 교황청 직원들에게 말했다.
“저는 성 베드로에게 당신의 후계자를 다시 살아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들렀습니다. 나는 나의 전임자인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1세의 무덤에도 가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옆에 또다른 무덤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날 그 시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은 저격 사건 후 교황이 마침내 의료 진료를 마감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첫날이었다. 그날로 그 엄청난 드라마는 끝이 났고 그 동안 교황은 성모님의 선하심과 따뜻한 관심과 보호를 특별히 느낄 수 있었다. 성모님의 현존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그를 움직이게 했고 지금도 계속 그를 활동케 하고 있었다.
넉 달 후 신자들을 만나려고 성 베드로 광장에 나갔을 때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이 60년 전 파티마에서 가난하고 어린 세 목동들에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발현하셨던 바로 그날 그 시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속에서 나는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와 돌보심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보호와 돌보심은 나를 죽이려 했던 총알보다도 더 강했습니다.”선물과 신비
이처럼 교황이 생명을 되찾고 건강해진 것을 나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인간적 차원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하나의 신비가 남아 있다. 그것은 그를 죽이려 했던 살인 미수 사건이다. 사실 재판이나 긴 감옥생활도 그 신비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교황이 감옥에 있는 알리 아카를 방문하는 것을 지켜봤다. 교황은 사건 이후 가진 첫 회견에서 이미 공적으로 그를 용서했다. 그러나 나는 죄수가 교황에게 용서를 청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단지 파티마의 신비에 관심을 가졌고 그를 능가한 그 힘에 대해 고민했다.
대희년에 교황은 이탈리아 대통령에게 알리 아카의 석방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카를로 아제글리오 치암피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교황은 여러번에 걸쳐 알리 아카의 어머니와 친적들과 만났고 그를 담당하는 신부에게 자주 그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1981년 5월 13일에 일어난 이 신비스런 사건은 교황의 건강과 체력에 힘겨운 싸움을 가져온 극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동시에 신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교회와 세상에서 보았을 때는 교회와 세상에 그의 사도적 소명을 알려 주고 열매를 맺게 해 준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 사건이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 라는 옛말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1981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쏟은 그 피가 2000년에 교회가 맞는 새로운 봄날의 열매가 되었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선물과 신비를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끝으로 나는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지칭)이 쓴 ‘스타니슬라우’ 라는 시의 한 토막을 인용하겠다.
“만일 설교가 사람들을 회개시키지 못한다면, 피가 그렇게 할 것이다.”- 마리아 2002년 9~10월 115호 -
[HOME] Copyright 2000-2003 Agnes L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