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적 담화

(1) 이 점에 대해 소신대로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이 책에 제시된 (내용이) '내적 담화'에서 온 것이라는 점만은 조금도 주저없이 확언할 수 있으리아 여겨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비 신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어떤 (신비) 현상들은 너무 과소평가되어 (사실 여부가) 검토되기도 전에 조롱거리가 되는가 하면, 어떤 현상들은 공적 '계시'와 방불할 정도로 과대평가되기도 한다.
   (지금껏)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은총' 덕분에 우리가 하느님의 참 아들들이 되고 마리아께서 우리의 참 어머니가 되신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점, 이 안에서는 천상 발언자 편에서 더욱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역시 우리가 (상당히) 잊고 있었던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공적 형태 외에도, 당신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2) 그러면 내적 담화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우선 분명히 해 둘 점은, 이러쿵 저러쿵 물의를 일으키는 무슨 괴상한 사실이 아니라, 교회 생활 안에 있고 영성 신학 개론 안에서 서술되는 하나의 신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발현에서처럼 오로지 오관으로 감지하면서 예수님, 성모님, 혹은 성인들과 통교하는 현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 대상을)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현상이 단지 성령께서 신앙 안에 살며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통상적으로 부어 주시는 어떤 빛, 어떤 좋은 영감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현상으로서의 내적 담화는 하느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것, 그 실현을 돕고자 하시는 것을 인간의 생각과 언어 형태로 내려 주시되,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어투(語套)와 (그가 속한 언어) 어법에 따라 내려 주시는 선물이다.
   (이때) 그 사람은 자유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온전한 동의로 성령의 역사에 내맡김으로써 이 통교의 도구가 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그의 이성은 작용을 멈춘 상태로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편지를 쓰거나 정해진 강론을 준비할 때처럼, 생각을 한다든지 생각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든지 하는 이성적 활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3)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떤 (사람의) 심령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는 이 명료한 말을 '초자연적 형상어' 라고 부른다. (이를 받는 것은 사람이) 잠심 중에 있을 때 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일 수도 있다. ([가르멜의 산길] 제2권 28장 2항 및 30장-31장 참조)
(   신학자) 땅끄리는 초자연적 말 내지 담화를 (인간의) 내적 혹은 외적 지각(知覺)에 의해 인지되는 하느님 생각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영성생활] 3장 1494항)
   그러므로 '내적 담화'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겠다 : "이는 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것으로서, 하나의 메시지를 이루는 극히 명료한 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하늘'의 부르심은 거의 언제나 생각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메시지를 내릴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한 결정권은 '하늘' - 곧, 주님 아니면 성모님, 아니면 천사들과 성인들 - 쪽에 있기 때문이다.

(4) 진정한 영어(靈語)와 사이비 영어, 즉, 고의적인 속임수나 병적인 자기암시, 혹은 사탄의 직접적인 개입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짓 영어를 분별하는 데에는 썩 명확한 기준이 있다. 이 점에 대한 저서가 그다지 많지도 않고 현대적인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위대한 신비가들 -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이냐시어,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등 - 의 글과 R. 마렝, 땅끄리, A. 뿔렝, 가리구-라그랑즈 등의 영성 신학 연구서와 논문들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보다 아려운 것은, 메시지의 본질적 보편적 내용, 요컨대 신적 내용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에 입혀진 인간적 요소의 무게를 측정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책에 실려 있는 메시지(의 횟수)가 너무 빈번하고 또 (내용이) 너무 장황하다고들 한다. 이를 '복음서'의 문체와 교회가 공인한 몇몇 '발현'(이 담고 있는 메시지들)의 문체와 비교하는 시도도 행해지는데, 그것은 권위 뿐 아니라 양상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할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의 표현을 우리가 대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행태이다.
   사람끼리는 서로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하느님만은 유독 예외적으로 대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을 청하시어 우리 취향에 맞게 당신 자녀들에게 말씀을 주실 장소와 시간, 방법과 도구를 택하셔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지혜'의 영 안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렇게 외치시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는 당신 비밀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 마태 11,25), 또한 '천상 엄마'의 영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도 부르게 될 것이다 :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 루가 1,53)

[HOME] Copyright 2000~2003 Agnes L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