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사랑 : 가톨릭메신저 ; 아일랜드의 성모 발현
 

아일랜드의 성모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 메이요 군의 노크라는 조그만 마을에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그 날 저녁 7시, 15세의 소녀 마거릿 베이른은 성당문을 잠그고 돌아오다가 지붕 위가 환한 것을 보았다. 비가 오는 날 저녁 무렵에 지붕 위가 환하다는 것은 대단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녀는 별생각 없이 그저 지나쳐 버렸다.
   잠시 후 본당 식모인 메리 맥로그린이 성당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방금 여행에서 돌아온 베이른 부인과 그 딸 마리아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성당의 남쪽 문간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복되신 동정녀와 성요셉 그리고 한 분의 주교를 보았다. 세 사람의 옆에는 제대가 있고 그 제대 위에는 십자가와 어린양이 있었다. 그녀는 아마 신부님이 더블린(아일랜드의 수도)에서 새 동상들을 사오신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이른의 집에 가서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여덟시경에 그녀는 집에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마거릿의 언니인 마리아가 맥로그린을 바래다 준다면서 같이 일어섰다. 성당이 보이는 거리에까지 왔을 때 그들은 성당 남쪽 문간에 빛과 사람의 형상들을 보았다.
   "오, 저 동상들 좀 봐!" 하고 마리아가 외쳤다. 마리아는 이어 "왜 나한테 신부님이 새 동상을 사오셨다는 얘기를 안했어요." 라고 투덜댔다.
   맥로그린은 자기도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두 여인이 성당 가까이에 다가왔을 때 마리아는 갑자기 소리 쳤다. "동상이 아니야. 움직이고 있네. 야! 성모님이다. " 마리아는 어머니와 오빠를 부르려고 집을 향해 달음질을 했다.
   금방 소문이 퍼져 다른 사람들도 구경하러 나왔다. 모두 열네 명이 그 광경을 목도했다. 열다섯 번째의 목격자 패트릭 월시는 성당에서 약8백 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집 뜰에 서서 성당 남쪽 문간의 크고 둥근 황금빛을 보았다. 그는 전에 한 번도 그렇게 찬란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그게 무엇이었을까 하고 질문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 기록
 

아일랜드의 수호자인 노크의 성모

성모 마리아는 수세기를 통해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 생활에 충실했던 이 섬나라에 발현하셨던 것이다. 대부분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당시 극심한 가난과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비천 속에 살았다. 1829년에 공포된 가톨릭 해방법은 표면상으로는 3세기 동안의 박해를 끝나게 했다. 그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위해 그들의 존귀한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1829년 이후에도 박해는 종식되기는커녕 보다 교활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만은 그쳤으나 다른 종류의 공격이 가해졌다.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음식물이나 돈 같은 것을 뇌물로 주면서 아이들을 천주교 계통의 학교에 보내지 말고 다른 학교에 보내라고 권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떠한 남자라도 자기 아내, 자기 귀여운 자녀들의 핏기 없이 깡마른 얼굴을 쳐다봐야 하는 흉년에 이러한 뇌물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저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하였다.

1847년은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암담한 해였다. 감자 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흉년이 지나자, 아일랜드의 인구는 반으로 줄어들었으며, 감자 기근은 1877년, 1878년, 1879년에도 잇달아 일어났다. 거기에다 전염병이 창궐해서 발진티푸스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
   기근과 열병과 가난과 혹심한 박해와... 어느 국민인들 이런 역경을 이겨 낼 수 있겠는가? 아일랜드 종족은 전멸할 것만같이 보였다. 이러한 최악의 시련기에 성모 마리아가 노크에 발현하셨다.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노크의 발현을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노크의 발현은 순전히 사람들의 증언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거의 1세기를 지난 오늘날에도 노크의 신심이 날로 증가한다는 것은, 그리고 이제까지의 수많은 병자의 치료와 지금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병자의 치료는 노크의 발현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는 정당한 증거가 될 것이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지 7주일 안에 투암의 요한 맥헤일 대주교는 3인의 신부로 구성된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했다. 3인의 신부는 모든 목격자들을 하나하나 심문한 결과 그들의 말이 모두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목격자들의 연령을 보면 6세의 요한 쿠리로부터 그 날 밤 동정녀의 발에 입을 맞추려 했던 75세의 브리짓 트렌치 할머니까지 있었다. 조사단은 목격자들의 말이 모두 꾸밈 없음과 어떤 한 사람이 그러한 이야기를 조작해서 퍼뜨릴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려 "전체적으로 목격자들의 증언은 믿을 수 있고 만족함" 이란 보고서를 작성했다.
   발현 직후부터 순례자들의 대열이 노크를 메우기 시작하여, 요새도 1년에 25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아직까지 교황청의 공식 인정도 못받고 있는 데다 기차나 버스도 다니지 않는 이 벽촌에 연 25만의 순례자란 놀라운 숫자다. 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총1만 대의 미사가 노크의 성모께 올려졌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파티마의 성모를 조국 평화의 수호자로 믿듯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노크의 성모를 자기 나라 평화의 수호자로 믿는다.

- 출처 : 세기의 승리자. 돈 샤키 지음, 오기선 옮김.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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