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林이야기
나주임宗訓: 淸高謹拙(청고근졸)

淸高(청고)는 志璪(지조)를 말함이고 謹拙(근졸)은 몸가짐을 말함이다.
"깨끗하고 높은뜻을 지니고 스스로를 겸손하라" 뜻이다.
☞친필종훈해설



창성(創姓)유래

비간(比干)- 은 황제 헌원(軒轅)의 33세손- 견(堅)(간의자) 주 무왕이 長林山에서 났다고 林 자를 빼어 임씨사성- 임방(放:견의23세)- 임록(祿:견의64세진안군왕)- 임온(縕:견의80세)- 임팔급(八及:온의고손/한림학사병부시랑)당나라 팽성현에서 동료7학사 와 신라국아산상류로 동도



원조(遠祖)유래

고려의 대장군 임비(林庇) 는 1281년(충렬왕 7년) 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보좌공신2등에 책록되고 대장군충청도지휘사판사재시사에 이르렀다.공의 윗대에도 높은벼슬을 한분이 많다고전하나 문헌으로 고증할길이 없어 대구서씨족보편찬예에의거 원조로함.

본관 유래

임 비(林 庇)의 9세손 탁(卓: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말에 해남감무(海南監務)를 역임한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지 명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고 효공왕7년 나주로개칭,고려 성종2년 나주목 설치.조선 인조때 금성현이 되었고,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1986년 나주시로 개칭.1995년 나주군이 나주시에 통합하였다.

임 비(林 庇)의 9세손 탁(卓)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을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송도 부조현에서 북쪽을 향해 통곡을 한후 금성 회진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탁의 7세손 붕(鵬)이 예문관 검열과 승문원 주서를 거쳐 예조 및 병조 좌랑과 이조를 제외한 5조의 참의를 역임한후 광주목사, 경주부윤을 지냈다.붕의 아들 복(復)은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아우 진(晉)은 무신으로 제주 목사와5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청정비 세워졌다.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와 장악원정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버리고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문필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하고 의협한 시풍으로 호남파 시인 가운데 백미로 손곱혔으며, [화사(花史)]와 [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 백호집(白湖集)], [계백류상영록(溪碧 觴永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이 높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와 부사를 지낸 후 시명(試名)을 떨졌던 [타]와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게], 안산 군수와 장성 부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던 세량(世良).[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저자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다.

임상덕林象德(1683∼1719),사필(史筆)로 나라의 계통을 세우다

동사회강(東史會綱) : 유가의 편사체제는 기전체(紀傳體)편년체(編年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등이 있다.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지(列傳志) 등으로 분류 구성된 기전체사서로는 {삼국사기}, {고려사} 등이 있으며 편년체 사서는 {동국통감}, {고려사절요},{삼국사절요} 등이다. 기전체는 한 사실이 분류에 따라 중복되기 때문에 그만큼 분량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편년체는 편년에 따라 사실을 정리하기 때문에 분량은 다소 줄어들지만 주로 국왕 중심의 서술이 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사서는 대체로 관찬이었다. 15세기 사림파들이 등장하면서 그 나름의 사서가 편찬되었다.

이것은 교육용으로편찬한 것으로 대체로 '약사(略史)'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동국사략(東國史略)류가 이것이다.
16세기 말 17세기 초 전란을 거치면서 편년체 서술에서 강목법(綱目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 주자는 구양수(歐陽修)의 자치통감을 간추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저술한 바 있다. 남송(南宋)은 거란과 여진이 세운 요와 금에 의하여 북방의 영토를 내주는 등의 어려운 사정을 겪고 있었다. 주자는 강목법을 통하여 나라의 계통을 바르게 세움으로서 중화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병립하는 여러 나라의 편년을 병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의 연호를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격한 도덕주의와 군신의 윤리를 편사의 원칙으로 하였다.

17세기이래 우리 나라 역시 청의 침략에 굴복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에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 대해 군사적 정치적으로는 열세이지만 문화적으로나 정신면에서 중화문명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때 강목법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조선의 위상을 재확인하기 위한 명분론적 정통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유계(兪棨:1607∼1664)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이나 홍여하(洪汝河:1621∼1678)의 동사제강(東史提綱), 임상덕의 동사회강(東史會綱)은 강목체 사서이었다.
{여사회강}은 1667년에 간행되었고, {동사제강}은 1672년에 저술되어 '가숙용(家塾用)'으로 필사되어 읽히다가, 1786년에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으로 제목을 바꾸어 간행되었다. {동사회강}은 1711년에 서문이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이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강목체 사서를 임상덕은 '입강지서(立綱之書)'라고 하였다.{동사회강} 편찬의 일차적 동기는 강목법과 정통론의 원칙에서 우리 나라 통사를 정리하려는 데 있었다. 임상덕은 사서를 '본사(本史)', '통편(通編)', '거요지서(擧要之書)' 즉 약사(略史)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본사는 사적을 많이 모아 놓았지만 구경究竟하기가 어렵고 통편은 정치에 도움이 되기 위한 '자치(資治)'의 사서라 '요점을 추리지 못한점[務詳而少要]'이 있으며 또한 약사는 '지나치게 줄인 것[太略]'이 문제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주자강목을 따른 여사제강이 '사적과 언사의 상세함과 생략함이 적절하다[事辭詳略頗適厥中]'고 하였다. 그러나 {여사제강}은 삼국과 그 이전의 시대를 다루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임상덕은 당시의 편사의 풍토나 자세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는 사서가 서로모방에 그치고 각기 문파(門派)에 따라 서로 교류하지 않고 요점만을 기록하는 병폐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손따라 모아 베낀 것[隨手撮錄]'이거나 '잊지 않기 위한[備遺忘]'것이 되고 '처음과 끝이 마무리가 거칠게 되었다[首尾粗完]'는 것이다. 동사회강 찬술의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임상덕은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 따라 체재를 정비하고 또한 고대사를 보충하여 재구성하였다. 그는 통감의 편년과 본기·세가를 기본으로 하면서 제가(諸家)의 사필(史筆)을'강회(綱會)'하고 여기에 여러 서적의 전고(典故)를 추가하여 그시종(始終)을 기록하는 원칙을세웠다. {동사회강}은 통사의 시작을 삼국시대로 하고 단군 기자는 문헌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부론(附論)에서 취급하였다. 그는 '범례'와 '논변'을 치밀하게 정리하였다. 이는 후세의 사가 이종휘(李鍾徽)와 안정복(安鼎福) 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삼국-무통(無統), 통일신라-정통正統, 고려-정통(正統)으로 정리하였다. 삼국시대를 무통으로 처리함으로서 삼국균적(三國均敵)의 입장을 취하였고 후삼국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통론은 기자-마한-신라로 정통을 정하는 영남남인의 입장과 다르며 후일의 기자-마한-삼국(무통)-통일신라(정통)의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고려말의 우·창·공양왕대를 취급하지 않았다.

유계의 여사제강은 '정몽주 피살', '권신의 찬탈' 등을 강조하여 절의파의 입장을 대변하였지만 임상덕은 '이미 고려는 망하고 조선의 건국은 천명이었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고려가 원에 복속되면서 부자가 왕위를 번갈아 맡으며 이미 권신이 나라를 천단하였으니 이미 망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고려사나 동국통감이 이러한 사실을 놓치고 있고 유계의 여사제강과 오운의 동사찬요도 이를 시정하고 있지 않음을 아쉬워하고 있다({노촌집} 권4, '書東史會綱後'). 일찍이 동국통감의 사론을 집필한 최부의 역사인식과 맥이 닿아 있었다고 보겠다.

생부(生父)와 양부(養父) : 임상덕이 {동사회강}의 서문을 적은 때는 그의 나이 29세 때이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동사회강을 집필하였을 뿐 아니라 상당한 분량의 시.서(詩·書)·설.논(說·論)·변.잡설(辨·雜說)등을 남기고 있다. 그는 사학뿐 아니라 경학과 문학 그리고 경세학에 밝은 인물이었다. 12∼3세에 사장학을 성취하여 이름을 날리던 그는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그를 흠모하였다. 그러나 학문적 소양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
그의 가문은 다시면 회진리에 대대로 살던 호남의 명가로 본관은 나주이다. 7대조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임붕(林鵬)이 있으며 그의 손자 중 유명한 임제(林悌)가 있다.

임붕의 둘째가 복(復)이며 그 아들이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석촌(石村) 서 이었다.

석촌의 장자 련 은 광해군 때에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로 이사하여 별업을 이루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고절(高節)'이라고 하였다. 그는 동생의 아들 종유(宗儒)를 후사로 삼았다. 동생은 이조판서를 지낸 효종 대의 명신이었다. 종유는 음서로 익위사(翊衛司) 부솔(副率) 등을 지냈으며 세온(世溫), 세량(世良), 세공(世恭), 세검(世儉) 네 아들이 있었다. 임상덕의 생부가 세공이며 세온이 양부가 된다.
임세공은 1653년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문명(文名) 높은 이훤의 사위가 되어 그 집에서 살았다. 그는 과업에 실패하고 또한 이후 부인 전주 이씨를 잃고 '가도(家道)가 기울자 술에 자신을 맡기는' 시절을 보냈다. 1689년 세 아들을 데리고 무안 몽탄면 이호(梨湖:이산리)로 내려왔다. 그의 형 세온에게 의탁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도 강호를 벗삼아 '격수관어(擊水觀魚)'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세 아들을 데리고 승달산 총지사(總持寺)에 들어가 자식들의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엄격하게 자식들을 교육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5년. 임상덕은 10세 이전에 사략,통감, 맹자 등을 배웠으며 산방에서는 사서, 서전, 시전, 주역, 당송팔가문을 읽혔다.

임상덕을 미리 보낸 생부는 향리생활 12년을 청산하고 1701년에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2년 후인 1703년에 죽었다. 임상덕이 문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705년이었다.
임상덕이 사학과 경학에 일가를 이룬 데 있어서 생부의 가르침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평소 자신을 '백수궁유(白首窮儒)'라 자칭하며 자탄하며 살았지만 자제교육에는 열성적이었다.

그는 '선비는 스스로 서야 하지 어찌 가히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쫓아 내리고 오를 것인가'하였다. 또한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오직 문을 닫고 옛사람의 글을 읽을 따름이다.

선배가 알았던 것을 후배가 어찌 모르겠는가. 재력근만(才力勤慢)이 어떠한가를 볼 따름이다'고 하였다. 장성한 아들을 선배사문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하자는 주위의 권유에 대한 답변이 이러하였다.


조부 임련이 일으킨 이산梨山의 별업(別業)을 이어간 사람은 임세온이었다. 1641년 무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아버지 임종유가 서울로 데려갔으나 '내 밭 갈고 내 강에서 고기잡는다[耕吾田釣吾江]'을 즐거움으로 삼고 향리에 살고자 하였다. 그는 비옥한 전장과 많은 노비를 상속받았다. 한때 재산을 관리하던 전수자(典守者)가 여러 장토에서 나오는 곡식을 몰래 빼돌려 취식행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거의 천여 곡(斛)에 이르렀을 정도이었다.

1672년 완전 귀향한 임세온은 '동찬' 즉 같은 부엌을 사용하는 백여 인에 이르는 식솔을 거느리며 '많은 농사를 지었다[營廣田業]'. 즉 노비와 이하인(籬下人)을 동원하여 대경영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집안을 마치 '관부(官府)와 같이' 각자에게 직분을 주고 상하(上下) 존비(尊卑)를 엄격히 다스리고, 체통(體統)을 세웠다.

또한 화초 괴석이나 연못으로 정원을 가꾸지 않은 질박함을 숭상하였다. 그는 집안에서는 엄격하였지만 마을의 부의를 빠뜨리지 않고 질병자를 구원하는 등의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세민(細民)의 생활 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배려를 하였다.
일찍이 전수자가 빼돌린 곡식의 고리대장부를 불사름으로서 어민이 빌려간 곡식을 탕감한 적도 있었다. 그 마을이 큰 호수와 같은 강에 인접하여 염전과 상판(商販)을 점유하면 이익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

'호문세가(豪門勢家)로서 세민과 이익을 다투면 그 해가 백성에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양잠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시 향지우족(鄕之右族)은 일반 백성의 뽕을 뺏어 양잠하곤 하였는데 그럴 소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는 본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동생과 누이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또한 서울이나 타처에서 생활하는 형제들의 생활을 보조하는 등의 일로 지출이 많았다.

동생들은 관리생활을 하였지만 생활비 등을 임세온에 의탁하였던 것이다.

그는 별다른 산업을 영위하지 않은 관계로 말년이 되었을 때에는 많은 식솔들의 식량조차도 겨우 7∼8월 자급할 정도가 되었다. 식량을 빌릴 처지가 된 것이었다.
임세온의 엄격함과 호방함 그리고 관대함은 '활달하고 도량이 넓고 또한 품행이 독실하다'고 일컬어진 임상덕의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물심의 지원이 있었기에 임상덕은 소신껏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상덕의 관력과 경세론 : 임상덕은 23세 때인 1705년(숙종 31) 11월에 증광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남평현감 능주목사 등의 지방관으로 나가기도 하였지만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교리, 이조정랑 등 주로 청요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관리생활을 하던 시기는 소론과 노론이 보합(保合)하다가 점차 노론이 득세하던 때이었다.
임상덕은 일찍부터 당대의 신망을 얻었고 숙종도 이를 인정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임금에게 자기 소신을 진언하였다.

ㄱ) 1709년(숙종 35) 김종서, 황보인의 신원설치(伸寃雪恥)를 주장하였다. 이미 단종이 복위된 마당에 김종서는 '육진 개척의 공'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ㄴ) 그는 불교나 노장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사찰이 새로 많이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는 여러 신진 관료와 함께 불사훼파를 주장하였다.

이때 숙종은 '유교가 쇠락함을 우려하여야지 이단이 성함은 문제가 아니다'라 하고 또한 '불사를 훼파할 것은 없다'고 하여 이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임상덕의 거듭된 주장을 받아들여 추가로 절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ㄷ) 그는 군역제 개혁에 있어서 호포 구전 등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여 감포절용(減布節用)을 주장하였다.
ㄹ) 호남 연해의 흉년을 당하여 전세 대동미를 정봉(停捧)한다는 조치가 마련되자 정봉은 일시 연기할 뿐이라 실제 농민에게 혜택이 가지 않으니 '반감(半減)'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한 이앙하지 못한 곳은 전재(全災)로 취급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황정(荒政)과 재급(災給)을 실시함에 있어 소민(小民)의 이해를 배려하는 편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ㅁ) 노론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북한산성 축조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는 도성방위체제의 강화는 지방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또한 지역방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 그의 진단은 사실로 드러났다. 그는 각읍의 무예자(武藝者)를 선발하여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읍에 별도로 의군(義軍)을 편성하자는 입장이었다. 지역방위중심론이었던 것이다.

이는 남구만 최석정 등 소론대신 뿐 아니라 소론측이 주장하는 바이었다.
임상덕은 소론의 명류로서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최창대(崔昌大)·이조(李肇) 등과 교유하였으며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이유(李懦)등을 추종하였다.

그가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장희빈 사사를 반대하여 노론으로부터 '간범명의(干犯名義)'의 지목을 받았던 이명세(李命世)를 문한(文翰) 경식(經識)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면서 사헌부 지평에 천망하였다. 노론의 반대는 치열하였다.
1710년(숙종 36) 5월 경인환국이 단행되어 노론의 정국주도권이 확립된 직후에 그는 붕당 격화의 책임이 임금에 있음을 직간하였다.

임금이 나라에 있어서 하는 일은 의원이 사람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괴이하게도 전하는 지금의 국세를 살핌에 집증(執症)은 심히 밝은데 구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주 이를 격성(激成)하여 더하니 이 조정의 사람이 모두 병으로 다 없어지고 또한 나라는 붕당을 따라 다 망하여 버렸습니다.

임상덕은 붕당의 갈등이 격심해지는 과정에서 임금이 오히려 붕당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론은 임상덕을 심하게 배척하였다.
그는 임금이 대신을 '갑자기 썼다가[忽忽擢用]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草草罷免]

'인사방식을 비판하였다. 또한 임금이 한번 물러서면 다시 부르거나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 '불러서 오는데 내쳐버리는[呼來反去]'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관직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숙종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홍문관 교리 능주목사 등을 지내다가 37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다음은 그의 졸기이다.

전 홍문관 교리 임상덕이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37세이다. 임상덕은 자字가 이호(彛好)로서, 판서 임담의 증손이고, 참판 임영(林泳)의 족질(族姪)이다. 대대로 호남에 살았는데,12, 3세에 크게 사학(詞學)을 성취하여 붓을 잡으면 거침이 없고 박학하고 유려(流麗)하였다.

나이 23세에 초시·회시·전시에 장원 급제하니, 명성이 뭇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천자天姿가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문사文詞로 인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사색이 깊어 경의(經義)를 발명한 바가 많았으며, 품행이 또한 독실하였으니, 남방의 학사들이 임영과 아울러 존경하였다. 평생 동안 윤증(尹拯)을 스승으로 섬겨 식견과 언론 또한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았다. 세상에서 바야흐로 큰 일을 맡을 것을 기대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으니,사류가 매우 애석해 하였다({숙종실록} 권64 숙종 45년 9월 을미 41책, 92면).임상덕은 비록 짧은 생애에서나 학문에서 일가를 이루고 또한 나라의 평온과 백성의 생활향상에 소임을다한 호남 최후의 사림정치가이었다(출처:이종범)

-장수공파 : 익(탁의 8세손)
-정자공파 : 복(탁의 8세손)
-절도공파 : 진(탁의 8세손)
-첨지공파 : 몽(탁의 8세손)
-생원공파 : 학(탁의 7세손)
-동지공파 : 안(탁의 7세손)
-진사공파 : 귀량(탁의 5세손)
-도정공파 : 유소(탁의 손자)
-가의공파?: 수소(탁의 손자)
-금수공파 : 광수(비의 7세손)

인 구
2000.11.1기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86개 성씨 4179개 본관중 10대성이 64.1%비율 임씨(林氏)는 1.7%763천명(85년673천)이 살고 10위 이며 광주 대전 충남 전북순으로 분포 인구는 서울 경기 부산 경북 인천 경남 전북에 많이 살며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은 55개로 8위 이고 인구 분포로는 충남 연기 남면 1위 전남 곡성 고달면이 2위로 성씨중 나주임씨가 많이 살고있음


집 성 촌
충남 연기군 남면
전남 곡성군 고달면
전북 남원군 산동면 월석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전남 장성군 남면 삼태리
전남 완도군 완도읍 망석리
전남 완도군 청산면 국산리
경북 달성군 화원면 설화동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전 설
동첩열녀(童妾 烈女)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桃林洞) 오봉산(五奉山) 아래 길옆에는 인천(仁川)에서 가장크고 웅장한 신도비(神道碑) 가 서있고 거기에서 약 200m쯤 떨어진 산 중턱에는 이조정종(李朝正宗)때 공조(工曺),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조정만(趙正萬)의 산소와 그 아들 산소가 있다. 그 묘역(墓域)밖에 풀이 우거지고 칡넝쿨이 무성하게 덮힌 한 작은 산소가 있다. 그 산소의 비석(碑石) 전면(前面)에는 열녀(烈女) 나주임씨지묘(羅州氏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열녀(烈女)나주임씨지묘(羅州林氏之墓)라 새겨져 있으며, 열녀(烈女)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나 오랜 풍상을 지나면서 마멸되어 읽을수 없다. 조판서(趙判書)는 호걸이어서 정실(正室)이 두명 있었고 많은 소실(小室)을 거느렸었다. 조판서(趙判書)는 늙어 벼슬을 거두고 은거하면서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연구하였으며 시,문,서예(詩,文,書藝)에 열중하면서 항상 여자를 곁에 두었다. 그는 83세에 20세의 나주임씨(羅州林氏)를 동첩(童妾)으로 맞이하였으나 같이 지낸지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조대감(趙大監)이 죽자 동첩(童妾)인 임씨(林氏)가 가장 슬퍼하였으며 영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사를 치르고 며칠후에 그 동첩(童妾)은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뜻을 품고 스스로 자결(自決)하였다. 세상사람들은 그를 동첩열녀(童妾烈女)라 일컬어 칭송하였고 정종 (正宗)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려(烈女旌閭)를 내리셨다.

나주임씨(羅州林氏) 효열문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275 ) 효부 임씨 부인은 고려가 개국된 직후 대장군의 한 사람인 승진공의 자손에 중추 부사를 지낸 임현수의 딸로 일찍이 이곳 신리 부락에는 밀양 박씨가 권세를 잡고 양반 대가로서 행세하고 있었으니, 박기준이라는 사람이 그 아들 용래와 이제 겨우 예닐곱 살의 임씨 부인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맞았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자세와 용모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 우아했고 성품이 침착하고 정숙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집온 이후에는 시부모를 봉양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고 현모양처의 예로서 남편을 공경하였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건강이 매우 나빠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는 말라리아, 이질, 장티프스에 걸려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불평하거나 역겨워하지 않고 간호에 극진했으며 온갖 명약을 구하여 쓰고 명산 대천에 축수 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의 노력도 헛되어 마지막 임종이 가까워 오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먹여 연 3일이나 생명을 연장시켰으나, 긴 세월 모진 고생으로 야윈 어머니는 다시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렇게 시집온 지 28년간이나 오직 늙고 병든 시부모 모시기에 피를 말리고 살을 깎았으며 그래도 못다하여 시어머니를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가정에는 아직 어린 세 시동생이 있었고 늙으신 시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이 있어 차마 죽지 못하였다. 임씨 부인은 과거의 아픈 상처와 슬픔을 달래며 절개를 굳게 지켜 남은 여생 동안 노인을 봉양하고 자식을 교육하기에 40년간이나 계속하였다. 자식들이 장성하자 서기 1913년 2월 26일 막내 아들 병열을 김노현의 딸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맞이 하였는데, 며느리 김부인 역시 대가의 규수다운 기품과 행실을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부부간의 지극한 예로서 남편을 공경하였고 자식을 훈계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안았다.


함 자

함자는 음양오행사상의 상생원리(相生原理)인 木生火,火生土,土生金,金生水,水生木으로 자연의원리를따 함자를 정하고 따른것이다. 상극의원리는 金克木,木克土,土克水,水克火,火克金으로 자연의 우열을말한다. 나주임을보면 26세는상(相)27세는병(炳)으로 목생화가되고,28세는규(圭)로 화생토,29세 종(種)으로 토생금,30세 택(澤) 31세는채(采)로 수생목이다. 이것으로 할아버지,아버지,나의 상생원리를 알수있다.자손이 번창하여 함자를 따르다보면 종친간 동명이인이 많아 자손구별 어려운면도 있다.


行列圖[ 항렬도 ]☞항렬도
24세- 0 鎭(진) 25세- 洙(수) 0 26세-0 相(상) 27세-炳(병) 0=默(묵) 0 28세-0 圭(규)
29세-鐘(종) 0=錫(석) 0 30세-0 澤(택)=0 淳(순)
31세-采(채) 0=東(동) 0=根(근)0 32세-0 燮(섭)=0 烈(렬) 33세-在(재) 0=基(기) 0 34세-0 鉉(현)=0 善(선) 35세-滋(자) 0=泰(태) 0=海(해) 0 36세-0 植(식)=0 根(근) 37세-光(광) 0=顯(현) 0 38세-0 均(균)=0 重(중) 39세-鎬(호) 0=鏞(용) 0 40세-0 承(승)=0 源(원)
41세-榮(영) 0=樂(락) 0 42세-0 熙(희)=0 煥(환) 43세-載(재) 0=敎(교) 0
44세-0 錄(록)=0 鎰(일) 45세-海(해) 0=淵(연) 0=滋(자) 0 46세-0 模(모)=0 業(업) 47세-然(연) 0=性(성) 0


羅州林氏家訓
原文(원문)
勿學書 旣去復召語之曰 若不學書 則爲無識之人 學書以 勿應擧可也 心剛直學識有方處 松高不受封 進言非難 而廳其言者爲難 廳言非難 而行其言者爲尤難 (於東文選)


國文(국문)

물학서 기거복소어지왈 약불학서 즉위무식지인 학서이 물응거가야 심강직학식유방처 송고불수봉 진언비난 이청기언자위난 청언비난 이행기언자위우난(어동문선)


解設(해설)

"글을 배우지 말라."하더니 가는 것을 다시 불러서 "만약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터이니 글을 배우되 과거는 보지 말라."하였다. 마음가짐을 강직하라. 학문을 하는데에는 법이 있다.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말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것이 어럽고, 그 말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이다.(동문선에서)
지은 이 : 임복(林復):1521년(중종16)-1576년(선조9) 문신(文臣). 자는 희인(希仁) 호는 풍암(楓巖) 본관은 나주(羅州). 승지(承旨) 붕(鵬)의 아들. 1540년(중종35)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46년(명종1)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에 연루,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특사령(特赦令)이 내리자 풀려 나와 고향에 돌아 갔다가 선조(宣租) 초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 은거(隱居)했다.


진사공파 우리집 내력(14세 교위공 휘,부(阜)의 5자 휘,관(鸛)집안)


우리집안은 나주임씨 진사공파(進士公派)로 12세 시정공 휘,석주할아버지의 둘째아드님이신 13세 휘,귀량(貴樑)할아버지가 진사(進士)로 황해도에 부임(赴任)한 이래 황해도 일원에 자손들이 살게 되고, 귀량할아버지의 장남이신 14세 校尉公 휘,부(阜)할아버지의 다섯째아드님이신 15세 휘,관(鸛)할아버지가 생원(生員)으로 충남 당진현(唐津縣)에 부임(赴任)하였다가 후에 석문면(石門面)으로 낙향하여 그 후계(後系)자손이 당진군(唐津郡) 일원에 세거의 터를 정하여 살고 있음. 생원공 휘,관 할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신 16세,휘,예(豫)할아버지 자손들이 석문에 사당과 묘소를 모시고, 매년 음 10월10일에 시제를 거행하고 있음.

우리집계보

遠組임비(林比)-영발(永拔:2세)-량간(良幹:3세)-박(朴:4세)-영문(永文:5세)-돈세(敦世:6세)-수(秀:7세)-선(宣:8세)-탁(卓;감무공:9세)-봉(鳳;소윤공:10세)-시소(始巢;산원공:11세)-석주(碩柱;시정공:12세)-[귀연1(장수공파;나주),귀량2(貴樑:진사공;개성)]

<진사공파>13세 진사공 귀량 -[부1(阜),원2(元)]. 14세 校尉公<부> - [종1(淙),흠2(洽),주3(澍),적4(積),관5(鸛),원6(元鳥)]. 15세 生員公<관5(鸛)>- 예(豫:16세;당진)- 恒(항:17세)- 壎(훈:18세)- 崑儒(곤유:19세)- 20세[世檳1(세빈), 세효2(世孝)]<세효2>- 21세[상민1(象珉),상기2(象起)]<상기2>- 22세[풍호1(豊浩),승호2(承浩)]<승호2>- 23세{후철1(厚喆),우철2(優喆]<후철1>- 24세[원진1(元鎭),형진2(亨鎭),정진3(貞鎭)]<정진3>- 25세 무수(武洙)- 26세 오상(五相)으로


26세 오상(五相)-27세[병송1(炳宋:榮龜),병노2(炳魯:성권),병상3(炳商:성도)]

<병송1>- 28세 충규(忠圭:尙玉)- 29세[종오1(鍾五:金龍:戊得),종팔2(鍾八:在春)]-<종오1>- 30세 덕순(德順).<종팔2>- 30세[덕신1(德信:澤),덕준2(德俊:澤)]-<덕신1>- 31세[정현1(正顯:東顯),정업2(正業:東業)].<덕준2>- 31세 혜진(慧珍:采珍)으로 인천에,- 나주임씨대동보12권426페이지 -

<병노2>- 28세 경규로,

<병상3>-28세 선규(善圭)- 29세[종만1(鍾萬),종무2(鍾武)]-<종만1>- 30세[영택1.성택2.준택3.평숙4.영숙5]-<영택1>- 31세[채영1(采榮).채동2(采勳).병옥3],<성택2>- 31세[채석1.영애2.성희3] <준택3>- 31세 채환. 29세<종무2>- 30세(경택1.운택2.미영3.보영4)은 당진에 있다.
☞진사공파묘소


나주를 본관으로한 이유
나주임씨는 고려말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며 두문동(杜門洞)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은 감무공 탁(임비의 9세손)으로부터 시원(始源)을 이룬다고 볼수 있다. 고려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면서 신진 세력들이 득세하며 세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게되고 고려조에 충성을 한 임씨는 불사이군으로 벼슬을 버리고 조선조의 벼슬에 나아갈 것을 거부하였다. 그후 탁의 7세손 붕이 예문관 검열과 승문원 주서를 거쳐 예조 및 병조 좌랑과 이조를 제외한 5조의 참의를 역임한 후 광주목사, 경주부윤을 지냄으로써 다시 가문의 기틀을 잡아 조선조에서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 많은 선조들이 국가사회에 공헌하게 되고 장수공파가 장손으로 나주시 다시면에 감무공 탁으로부터 24대로 종가를 이어 가고 있으며 나주임씨는 종손으로부터 분가하여 각처에 살고 있다. 살펴보건데 임비 로부터 9세손 탁까지 약270년간 종손 이외 자손과 임비 이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임씨성은 신라시대 현존역사 인물중 가장 오래된 임종(林宗;좀더 고증필요)-신라 진덕여왕(647-654년) 각간과 중국에서 7학사와 동도한 팔급의 수풀임을 쓰는 후손은 같은 자손으로 보아야 하며 그중 나주임씨는 평택임씨와 현재 수풀임자를 쓰는 성씨중 가장 번성한 집안일 뿐이다.

임종(林宗): 생몰년 미상. 신라 진덕여왕 때의 정치가. 진골(眞骨)출신의 각간(角干)으로서 정치적 지위는 대등(大等)이었다. 진평왕 때에 임종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비형랑(鼻荊郎)이 추천한 귀신 길달(吉達)을 왕명에 의하여 양자로 삼았는데,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그곳에서 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을 길달문(吉達門)이라고도 하였다. 이와같이, 임종이 가지는 왕실과의 관계로 보아 원래성은 김씨(金氏)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임종은 진덕여왕 때에 알천(閼川)·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庾信)과 더불어 4영지(靈地)의 하나인 남산의 오지암(#우01知巖)에 모여 국사를 의논하는 화백회의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모이던 대신들의 사회적 신분은 진골출신이었으며, 상대등(上大等)인 알천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에서의 정치적 지위는 대등이었다. 따라서, 임종의 신분과 지위도 진골과 대등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필자주;임종이 최초 우리나라 임씨이며 양자 길달의 후손과 중국성 임팔급으로 보아야 할지 좀더 연구 해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