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Courtiers Observation Mission's views on Meiji Japan and Projects of Modern State Building

許東賢(경희대)

1. 서론

朝士視察團(속칭 "紳士遊覽團")은 메이지(明治) 일본의 근대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그 견문한 바를 조선에 반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近代化 운동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중견 고위관료 12명과 유학생 등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 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 및 하인 13명으로 구성된 총원 64명의 조사시찰단은 1881년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이것은 韓國史上 서구 근대의 수용을 본 격적으로 도모하고, 나아가 조선 근대화의 모형을 일본에서 구한 최초의 시도였다.

당시 조사들은 일본 정부의 여러 기관과 세관의 운영 그리고 육군의 조련 등에 관한 것 등을 각자 전문적으로 연구·조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들은 임무 수행 과정에서 일본이 서구 근대를 본떠 정치·경제·군사·산업·사회·문화·교육 부문에 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총 80여 책의 보고서에 응집시켰다. 이처럼 메이지 시대 일 본의 근대화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했다는 점에서, 조사시찰단은 일본의 근대 국민 국가 형성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던 1871년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에 비견되는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동행했던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는 1876년에 5권의 『米歐回覽實記』를 펴냄으로써 이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일본 정부와 국민 들이 서구 근대를 폭넓게 수용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사시찰단이 남긴 보고서들 은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알려지지 못함으로 해서, 그 당장은 『미구회람실기』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보고서에 담긴 근대 일본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는 당시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열망하던 개화파를 비롯하여 식자층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부정적인 일본관 과 서구 문물에 대한 시각을 허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들의 보고서는 1880년대 개화·자강을 추진하려던 조선왕조 위정자들이 일본과 서구의 근대 문물에 대해 가졌던 인 식태도 및 그 심도를 가늠하는 데 있어 일급사료이다.

본 연구는 조사시찰단이 일본에서 마주친 근대의 특징은 무엇이었고, 이들의 경험이 조선 의 근대화 과정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당시 메이지 일본에서 구현된 근대의 표상으로서의 일본형 국민국가가 서구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려 한다. 다음으로 조사시찰단이 경험한 일본 근대의 제 양상이 조 사시찰단원들의 세계관과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끝으로 한 세기 전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는데 실패한 이유를 조사시찰단과 이와쿠라 사 절단의 근대 체험에 보이는 차이점 등을 살펴봄으로써 究明해보려 한다.

2. 근대 일본의 표상으로서의 일본형 국민국가

1881년 당시 조사시찰단이 둘러 본 일본은 "文明開化"를 기치로 프랑스 혁명이래 서구 국가들이 만들어낸 근대화 기제들을 이입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예컨대 육군은 프랑스, 해군은 영국, 교육은 미국, 황실은 영국, 헌법은 독일의 제도를 도입해 일본에 적합하게 변 형하여 정착시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문명개화"는 "메이지 초기의 근대 화 및 歐化主義 풍조"를 뜻한다. 그러나 문명개화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는 단순한 서구문물과 제도의 도입만이 아니라 天皇制를 부활시킨 메이지유신의 불가피한 산물로 서 일본 고대의 복고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라는 일 본 근대의 특수성이 나온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의 逆像"으로서의 일본 근대는 서 구 근대가 "오해·오역"되거나 "날조된" 것으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여하튼 조사시찰단이 일본을 방문한 1881년 무렵에는 일본 근대의 원형이 거의 완성되어 있 었으며, 이는 일본형 국민국가라는 표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근대는 국민국가의 모습으로 가시화되었다. 서 구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는 프랑스 혁명기의 프랑스인에게는 인간해방의 장치였고, 메이 지 시대의 일본인에게는 탐구하여 구현해야만 할 목표였다. 그리고 개화기의 조선인에게는 이루려다가 실패한 목표이자,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달성해야 할 미완의 과제이다. 최근 학 설들의 개념 정의를 정리해 보면 비서구 지역에서의 국민국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다.

첫째, 국민국가는 그 정치체제가 군주제든 공화제든, 민주적이든 전제적이든 간에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어야 한다. 또 그 국가가 국민국가인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 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되며, 서구의 가치기준에 따른 문명화--서구화-- 정도가 그 기 준이 된다. 둘째, 국민국가는 국가통합을 위해 의회·정부·군대·경찰 등 지배 억압기구로 부터 가족· 학교·언론매체·종교 등 이념적 장치까지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며, 국민통 합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셋째, 국민국가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민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세계적인 국민국가 체 제에서 그 위치가 설정되며, 각각의 독자성을 표방하면서도 서로 모방하면서 유사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민국가는 민족 즉 국민을 통합하는 전제로서 경제통합(교통망, 토지 제도,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국가통합(헌법, 의회, 징병에 의한 국민군), 국민통합(호적, 박 물관, 정당, 학교, 신문), 문화통합(국기, 국가, 서약, 문학, 역사서술)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 서구 지역에서의 국민국가란 그 정체의 민주성 여하에 상관없이 소위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을 단위로 한 국가일 뿐이다.

(1) 국가 통합장치의 창설

1881년 朝士視察團이 둘러 본 당시 일본의 국가 통합장치는 다음과 같았다. 메이지유신으 로 일본은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진행하였다. 1868년의 왕정복고는 단순히 고대 천황제 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황을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워 사실상 정치권력을 장악 하고 있던 藩閥세력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 후 집권정부의 통치체제도 중국의 律令체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의 천황제를 복구한 것이라 기보다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통합을 위한 통치와 지배의 장치들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서--날조해서-- 도입하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1881년 조사시찰단이 일본을 방 문했을 때는 집권적 정부가 사실상 모든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외형적으로는 서 구의 삼권분립 형태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재야에서는 집권적 정부의 권력독점에 반발 해 입헌정체를 수립하고 민선에 의한 국회를 개설할 것을 요구하는 自由民權 운동도 활발하 게 일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은 사법권의 독립과 근대 형법의 공포를 준비하 고 있었으며,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도 확보하고 있었다.

사실 조사들이 둘러본, 비민주적 집권정부로 특징지어지는 일본형 국민국가의 국가통합을 위한 장치들은 시민계층의 성장이 미미함으로 해서 다원화된 근대 시민사회를 창출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일본의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메이지 초기의 비민주적인 집권 정부는 그 태내에 군국주의 일본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제도 를 부분적으로 모방한 당시 일본의 통치체제는 입헌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 체제였고,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근대 정치체제의 발전방향과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통치·지배 기구는 일본처럼 시민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2) 자본주의를 향한 경제통합

조사시찰단이 일본에 갔을 때 이미 그곳에는 상품의 유통과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 루어지고, 정보와 지식을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의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즉, 메이지 정부는 철도와 도로망를 건설하고 해운업을 일으켜 근대적 교통기관을 보호·육 성하는 한편 우편·전신제도를 도입해 통신제도도 통일·근대화시킴으로써 전국토의 균형적 인 발전을 이룩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정비된 가로를 갖춘 도 시의 밤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고 인력거와 마차가 오가는 등 문명의 利器들이 속속 선을 보이고 있었다. 근대의 표상으로서 공간의 문명화는 조사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주도 아래 회사제도 도입과 화폐제도 통 합 등 경제제도의 개혁과 조세제도 개정 및 秩祿處分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기틀을 마 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殖産興業 정책을 추진하여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메이지 정부 경제정책의 제1과제는 통일된 국가체제의 전제조건인 중앙집권적 재정기구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1869년 대장성을 설립하여 재정뿐만 아니라 내정에 대해서까지 광범위하 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으며, 1870년에는 근대산업 이식을 목적으로 공부성을 설립 하여 철도와 광산을 중심으로 전신·토목·조선 등 여러 부문에서 서구의 근대적 기계기술 과 자본을 도입하여 정부 주도의 관영 사업을 펼쳐나갔다. 이처럼 당시 일본은 안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경제통합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밖으로는 류큐(琉球) 왕국을 병합하고 대만을 침략하며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여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팽창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이미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의 길을 닦고 있었다.

(3) 국민창출을 위한 문화통합

일본의 ‘文明開化’ 정책은 한마디로 서양의 문명을 이식하여 전국민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서양의 기준에 맞춰 국민을‘문명화’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먼저 균일한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신분제를 철폐하고 四民平等을 선언하였으며, 속 지주의에 입각해 모든 국민을 동일한 호적 제도하에 파악하였다. 1872년에는 학제를 반포해 균일한 국민을 양성하는 장치로서의 학교설립을 규정하였으며, 인신매매의 금지 및 직업과 이주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873년에는 舊曆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하여 서구 열강과 동 일한 시간체계를 수립하였고, 1871년에는 '新聞紙條例'를 만들어 정치비판을 엄격히 금지시 킴으로써 신문을 정부 정책의 홍보 내지 이데올로기 전파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 神道를 국교로 정하고 종교를 통한 문화통합을 시도하는 한편, 서구 기준에서 볼 때 야만적인 남녀 혼욕을 엄금하는 등 풍속을 서구식으로 개조해 나갔다. 조사들은 이와 같이 서구화, 즉 문 명화의 실현 도구로서 새롭게 정비된 제도와 장치를 비롯하여 이로 인한 사회·풍속상의 대 변혁을 직접 목격했다.

3. 朝士視察團의 國家構想

(1) 近代 日本을 보는 두 개의 관점

인간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과 그가 견문한 바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조사시찰단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을 바 탕으로 일본 근대 국민국가의 제 장치를 이해했으며, 자신이 느낀 만큼 조선을 개혁하는 데 응용하려 하였다. 당시 조사들은 크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눈으로 근대 일본을 진단하였다.

魚允中(1848∼1896)과 洪英植(1855∼1884) 두 명의 朝士는 개항 이후에 초기 개화사상가 라 할 수 있는 朴珪壽(1807∼1877)의 영향을 받고, 또 金弘集(1842∼1896)이나 朴泳孝(1861 ∼1939), 金玉均(1851∼1894)과 교류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들 이 조사로 임명되었을 즈음에는 華夷論的 세계관과 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 일본 근대를 객 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조사들은 여전 히 유교적 가치를 잣대로 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 점은 조사시찰단이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부산 소재 일본영사관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 개한 1881년 5월 20일자(양력) 『朝野新聞』의 기사에 잘 나타난다.

부산에서 곤도영사가 이 일행을 방문했을 때 참의 심상학이 손으로 눈을 가리자, 영사는 이를 보고 그 이유를 물어 만약 눈병이 났다면 의사한테 보이라고 했더니, 개진당의 어윤중이 옆에서 나서면서 말하기를 '심의 병은 일본의 물로 씻고 일본의 바람을 쏘일 때 당장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 자 수구당의 심상학은 크게 노해 그 이유를 힐문하니, 윤중이 이에 답해 '여러분들의 눈빛이 공연히 빛나고 있지만 소위 눈뜬장님이라 아직은 사물을 보는 눈이 없다. 이제 일본에 건너가 그 개화를 목격 함으로서 가슴속에 갇혀 있는 [수구사상을] 한번 씻어낸다면 비록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근심할 필 요가 없다'고 했더니 끝내 한바탕 논쟁이 일어났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어윤중이 보기에 "사물을 보는 눈이 없는 눈뜬장님"인 沈相學(1845∼ ?)과 같은 동료 조사들은 일본 시찰을 통해 사고를 혁신시킬 교육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어윤중의 경우 스스로 세 상을 보는 새로운 잣대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자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화사상이라는 새로운 인식틀을 가지고 일본을 둘러본 어윤중·홍영식과 유학적 세계관을 그대로 고수하면 서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접한 심상학과 같은 조사들은 일본을 보는 잣대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꿈꾸었던 일본형 국민국가의 요모조 모를 이해하고 진단하는 폭과 깊이에서나, 일본을 시찰하면서 얻은 조선 개혁에 관한 구상 에서 매우 큰 차이가 났다.

이미 유교적 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던 어윤중과 홍영식에게 일본 시찰은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국가의 밑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이들은 당시 國權論者로 이름이 높았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만나고 또 메이지 정부가 실현한 문명개화 정책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집권적 정부 주도하의 개혁론, 다시 말해 계몽을 통 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구상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이 고종에게 복명하는 데서 잘 드러나 듯이, 이들은 일본이 이룩한 발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을 당 시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방안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종: 일본의 제도가 장대하고 정치가 부강하다고 하는데 살펴보니 이와 같더냐.

홍영식: 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財力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사 업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항상 부족함을 근심합니다. 그 軍政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 나 이는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룩한 것입니다. 일본이 노력한 바를 갖 고 현재 이룩된 것을 보면 진실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종: 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戰國時代와 동일하더냐.

어윤중: 진실로 그러합니다. 春秋戰國은 바로 小戰國이며 오늘날은 바로 大戰國이라 모든 나라가 다만 智力으로 경쟁할 뿐입니다.…현재 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 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가지 일일뿐입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보고 듣고 익히는 과정에서 일본과 같은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꿈꾸 었다는 점에서 '국민국가 수립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조사들에게 불과 4개월 남짓한 일본 경험은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유교 의 가치와 세계관에서 벗어나도록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조사들은 일본을 둘러보면서 공자를 모신 文廟의 제향을 폐지한 것을 개탄했는가 하면 유학이 쇠잔해 가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유교적 가치기준으로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근대 일본의 여러 모습에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일본이 외양적으 로 부강해진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로 인해 나라 재정이 나빠지고 생활풍습이 서구화된 것 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朴定陽(1841∼1905)은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이런 자 신의 소감을 세세하게 보고했다.

고종: 일본의 강약이 어떠하더냐.

박정양: 일본은 겉모습을 보면 자못 부강한 듯합니다. 영토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고 군대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 니며, 건물과 기계가 눈에 화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살피면 실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 습니다. 일단 서양과 통교한 이후로는 단지 교묘한 것을 좇을 줄만 알고 재정이 고갈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므 로 기계를 설치할 때마다 다른 나라들에 진 부채가 매우 많습니다. 기계에서 남는 이익을 다른 나라에서 빌린 빚 의 이자와 계산해 보면 간혹 부족하다고 걱정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서양 사람들에게 간섭을 받아 감히 기운을 떨 치지 못하고 한결같이 그 제도를 좇아 위로는 政法과 풍속에서부터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절차가 변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고종: 왜인들이 다른 나라의 법을 다 좋아하여 필시 절충하지 않았으므로 의복까지도 그와 같이 되었구나. 이는 그 나라의 잃은 바이다.

비단 박정양만이 아니었다. 趙準永(1833∼1886)도 일본이 무조건 서양을 본받아 그 나라 땅 과 백성말고는 전통적인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라고 했는가 하면, 강문형(183 1∼ ? )은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서양을 모방하려 들기만 하니 결국 잃는 것이 더 많은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조준영처럼 "그 군제나 무기, 배, 기계, 농법 등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 을 넉넉하게 할 만한 것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처럼 이들은 일본이 외 양적으로 부강해진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로 인해 나라 재정이 나빠지고 생활풍습이 서구화 된 것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생존과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산업 기술과 영농방식 같은 것은 선별적으로 배워서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유교의 가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일본의 제도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세를 취했다는 점에 서 당시의 위정척사론자들보다는 외국의 문물을 수용하는 데 유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근대 문물과 제도에 대한 지식은 장기적으로 이들의 유교적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어윤중이 '눈뜬장님'이라고 말하길 서슴지 않았던 심상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사들은 유 교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선별적으로 근대 문물의 수용을 제기하였다는 점에 서 '東道西器論者'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朝鮮 改革의 雙頭馬車

1) 甲申政變 주역들이 꿈꾼 國家構想의 원형, 國民國家 樹立論

어윤중과 홍영식 같은 국민국가 수립론자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일본형 국민국가의 제 장치 들은 이들의 국가구상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이들에게 일본형 국민국가는 향후 조선에서 실현 가능한 국가 모델로 자리잡게 된다. 이 점은 어윤중이 구상한 국가의 설계도를 들여다 보면 명확해진다.

어윤중은 일본의 국가통합 장치들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군 주는 국가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군림하고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근 대적 개혁을 도모하는 정치세력이 장악한 집권적 정부형태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국 강병책을 실시하여 국권이 확립되고 백성이 근대국민으로 거듭 나서 君民同治를 담당할 주 체로 성장할 때까지는 立憲政體를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 이와 같은 위 로부터의 부국강병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료제의 효율적 정비가 관건이었 다. 관료들이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어 국가 자원과 국민 역량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배 분·조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과거제 폐지와 성과급 제도의 도입, 그리고 관리의 상공 업 종사 허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대외 자주권의 확보와 산업진흥에 필수적이라고 본 근 대 사법체계의 수용과, 특히 서구에 불평등조약 체결의 구실을 제공하는 잔혹한 봉건적 行 刑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근대적인 군사체제를 확립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둘째로, 경제통합을 위한 조감도이다. 그 첫걸음으로, 물적·인적 교류와 정보·지식 교환 의 통로인 교통·통신망의 근대화와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 아래 근대 산업을 진흥하고 민간부문의 상업을 육성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재정 조달방안으로 재 정관할권의 중앙집권화, 세제의 근대화를 비롯해 재벌의 육성을 통한 자본의 집중화, 관세자 주권 회복을 통한 재원조달, 그리고 외자 도입을 모색하였다. 즉, 그는 한국사상 최초로 조 직적인 차관 도입과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국민·문화 통합 방안이다. 그는 조선의 발전이 지체된 원인을 유학의 숭상에서 찾 으면서, 일본과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끌 정신적 지주로서 유학을 대신할 수 있는 서구 의 근대 사상과 기독교 수용을 고려하였다. 그리고 근대 국민의 형성을 위해 신분제 타파와 교육의 진흥도 도모하는 혁신적인 사회개혁론을 입안하였으며,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적극 받아들이고 서구 국가들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혁신적 국민국가 수립론은 급진 개화파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의 이상과 맥 을 같이하는데, 이후 이들이 천명한 갑신정변 政綱의 원형을 이룬다. 어윤중이 후쿠자와 유 키치에게 보낸 1881년 12월 20일자 편지에서 그는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을 자신의 "절친 한 친구들(切友)"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들이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니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 다. 또 김옥균이 일본을 둘러보는 내내 어윤중의 일본과 중국 기행록인 『中東紀』를 손 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 박영효가 자신의 회고담에서 1882년에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것이 갑신정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사실 등은 어윤중이 급진 개화파에 많은 영 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2) 儒敎 知識人層에 큰 반향을 일으킨 東道西器論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사들에게 4개월 가량의 짧은 일본 시찰 경험은 조선 의 미래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평생 깊게 밴 유 교적 가치관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경험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은 조선의 전통적인 문 화와 제도를 온존시키는 범위 안에서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후생에 도움이 되는 서양의 제 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東道西器論을 바탕으로 한 국가개혁을 구상하였다. 동도서 기론자들의 국가구상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일본의 국가통합 장치 중에서 王政復古, 집권적 정부형태, 삼권분립의 권력구조 그리 고 행정체계와 관료제도의 효율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民權의 확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이었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사법제도와 경찰제도, 군제와 군사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

둘째, '절용·애민'의 전통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일본을 바라본 이들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눈부신 성장은 높이 샀지만 이로 인한 국가재정과 민간경제의 파탄에 대해서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어윤중과 달리 일본식 산업진흥 정책을 선별적으로 채택하여 추진하는 입 장을 취했는데, 편리함과 재정수입 증대 효과가 있는 교통·통신 시설, 우수한 근대식 광산 채굴 설비와 공법, 기술인력의 양성, 국민계몽과 기술 자립을 위한 박물원과 산업박람회 개 최, 농민 계몽사업을 비롯한 농업진흥 정책의 수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셋째, 일본의 사회·풍속상의 변화는 대체로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상공 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직업·신분 제도에 변화가 필요함은 인식하였고, 이용후생의 관점에 서 신문의 계몽기능이나 서양 의학, 맹아원 같은 사회복지 시설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결 국 선별적으로 서양의 사회제도나 기술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메이지유 신 이후 文明開化의 원동력이 바로 서구 근대 사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구 근대 기술의 우월성만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을 꽃피운 토대의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하는 결 과가 되었다. 이들의 국가 생존전략은 피할 수 없는 서구에 대한 문호개방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응해 서구의 기술과 무기체계는 받아들이되 전통적 체제나 가치는 유지·강화하겠 다는 것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미봉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도서기론자들이 제기한 선별적 서구 문물 수용론은 유생들에게 영향 을 미쳐 개화상소 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5일에는 다음과 같이 국왕에 의해 국가 정책으로 천명되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또 서양과 수교를 하면 장차 邪敎에 전염된다고 말하니 이것은 진실로 斯文[유교 문화]을 위하 고 세상의 교화를 위하여 깊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수호는 수호대로 행하고 禁敎는 금교대로 할 수 있으며, 조 약을 맺어 통상을 하는 것은 다만 만국공법에 의거할 뿐이다. 처음부터 內地에 사교를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다면 그대 백성들은 본래 공자·맹자의 가르침에 익숙하고 오래도록 예의의 풍속에 젖어 있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바른 것을 버리고 사악한 것을 좇을 것인가. …저들의 종교는 사특하니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 하듯이 해야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할 수 있다면 농업·양잠·의약·병기·배·수레의 제도는 무엇을 꺼려서 피하겠는가. 그 교는 배척하되 그 기는 본받는 것이 진실로 병행하여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격한 차가 벌어졌는데, 만일 저들의 기를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의 모욕을 막 고 저들의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임오군란 이후 중국의 조선정책에 제국주의적 경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또 일반 백성 들 사이에서 서양 문화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조정으로서는 근대화를 추진 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론상 洋務運動과 맥을 같이하는 동도서기론을 조정의 정책으로 천명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이와쿠라 사절단과의 비교를 통해 본 조사시찰단의 한계

조사시찰단은 한국의 근대 서구 문물 수용사에서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시찰단 일 행에게는 이 경험이 국민국가 수립 혹은 서구 기술과 무기체계의 수용을 도모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의 국가구상은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쳤다. 또 조사시찰단은 한·일 문화교류사에서 교류의 위상이 뒤바뀌는 전환점이자, 일 본을 근대화의 발전모델로 상정한 최초의 시도이기도 하다. 12명이나 되는 고위관료가 일본 의 곳곳을 누비며 이모저모를 살핀 뒤에 그 보고 들은 바를 조선의 개혁에 반영하려 하거 나, 유학생을 보내 일본의 학문과 기술을 배우려 한 것은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 문이다.

사실 한국사의 틀 내에 국한시켜 살펴보면, 조사시찰단은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 면에서 1881년 중국에 보내진 領選使나 1883년 미국과 유럽을 돌아 본 報聘使 같은 해외 파견 사절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은 데 비한다면, 이들의 성과는 출중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막부 말기의 서구 국가들에 파견된 사절단과 메이지유신 후의 이와쿠 라 사절단 등 조사시찰단과 비슷한 성격의 일본 사절단과 비교해 보면, 조사시찰단의 취약 점이 드러난다. 이 양자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조선이 가진 서구 문물 수용 노력의 한계성 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서구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노력은 공식 사절단 파견과 해외 유학생 등으로 짐 작할 수 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이전까지 모두 여섯 차례 서구 국가들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1860년 80명의 사절이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62년 유럽 국가들을 순방한 사절 단의 규모는 38명이었다. 그리고 1862년 네덜란드, 1865년 러시아에 유학생을 보냈으며, 메 이지유신을 주도한 죠슈와 샤쓰마도 이 시기에 영국에 유학생을 밀파했다.

각국의 정치·학제·군제 등을 파악하는 사명을 띤 사절단은 대의정치, 군사제도, 정부 전 매제도, 사회보장제도에서부터 의술, 병원 경영법, 각종 학교, 전신, 우편, 토목 기술, 부두, 보세창고에 이르기까지 근대 서구문명이 이룩한 모든 것을 탐구하였다. 특히 1862년 사절단 의 경우 서구 문물에 대한 탐색활동이 매우 조직적이고 철저했는데, 하급 조사원들이 매일 탐구활동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 상급 서기관은 이 보고서들을 토대로 『영국탐험』, 『프랑스탐험』, 『러시아탐험』 등의 책자로 정리하였다.

사절단원 중에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왕성한 활동은 군계일학과 같았다. 동료들이 처음 본 기차에 크게 감탄하며 차량의 크기, 속도, 레일의 폭과 높이를 측정해서 일기에 기록하고 있을 때, 이미 그는 철도회사의 구성과 경영법, 은행업,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철도 분할 지배 같은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후쿠자와는 서구 근대문명 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면서 새로운 국가구상의 비전을 제시하는 저서를 냈다. 그것이 『西洋事情』이다. 그 무렵 15만에서 20만 부가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베스트셀러 『서양사 정』은 일본인들에게 서구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 수립의 꿈을 효과적으로 전파한 최고의 매체였다.

일본에 서구 근대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은 비단 후쿠자와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부 말기에 외국의 공기를 쐰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열망이 었다. 1864년 양이론자의 주장에 밀려 요코하마 쇄항을 담판하기 위해 유럽에 간 제3차 사 절단의 이케다 죠하츠(池田長發)는 소기의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급거 귀국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막부에 헌책했다. 유럽 각국에 상주공사 파견, 모든 독립국과 화친조 약 체결, 신문명 섭취를 위한 프랑스 유학생 파견, 서구 각지 신문과의 정보 교환, 일본 국 민의 상업·학술을 위한 해외 도항 허가 등, 유럽을 직접 보면서 얻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또 1865년 샤쓰마 번의 유학생을 인솔하고 유럽을 간 고다 이 도모아쓰(五代友厚)는 런던을 비롯하여 유럽 곳곳에서 목격한 공업과 무역의 융성함에 경탄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럽의 무역상과 상사 설립을 약속하고 교토―오사카 철도 및 전 신 가설, 조선과 총포 제조시설 설치 등을 계약하고 돌아왔다. 1867년 프랑스에 파견된 구리 모토 죠운은 나폴레옹 대법전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돌아왔다. 그후 그는 서구 신문명의 입 문서라 할 수 있는 『曉窓追錄』을 발간했다. 『효창추록』(1869)에는 나폴레옹 법전의 내용 을 비롯해서 도시계획, 철도, 의회, 공채, 군대, 집약농업, 교육제도 등 구리모토가 경탄과 선 망을 금치 못했던 서양 문물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록 이런 사절과 유학생들이 섭취해온 서구 문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막부 말기의 정치 적 혼란기에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국민국가수립기에 여러 모로 활용되었다. 막부 시기 사절단 출신들은 몇 년 후 이와쿠라 사절단의 서기관으로서 지 난 시절 자신들의 경험을 발휘했다.

조사시찰단이 일본에 파견되기 10년 전에, 메이지 일본은 대규모 해외사절단을 파견한다.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이 해외사절단은 특명전권부사 네 명―참의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대장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공부대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외무소보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尙芳)―과 정부 각부서의 중견 실무관 리 41명 등 공식 사절 46명을 비롯하여 18명의 수행원과 유학생 4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廢藩置縣을 단행한 지 겨우 4개월, 근대국가로의 첫 걸음을 막 내딛은 신생 정부는 정부 수 뇌의 절반을 사절단의 대표로 삼고 그 밑에 막말의 사절 참가자들을 서기관으로 배속한데다 정부 각 부처에서 파견한 전문 이사관까지 참여시킨 100여명 규모의 이와쿠라 사절단을 해 외에 파견한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성격과 목표는 그 때 이들을 전송한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三條實 美)의 송별사에 잘 드러난다.

외국과의 교제는 국가의 안정과 위기에 관련되며 사절의 능력 여부는 국가의 영욕에 관계된다. 지금은 대정유신, 해외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이니 그 사명을 만리 떨어진 곳에서 완수해야 한다. 내외정치, 앞날의 대업이 성 공하고 못하고가 실로 이 출발에 달려 있고 그대들의 대임에 달려 있지 않는가? 대사는 천부의 훌륭한 자질을 지 닌 중흥의 공적이 있는 원로이다. 동반하는 여러 卿들은 모두 국가의 주석이며 함께 하는 관원들도 한 때의 인물 들이다. 모두 이 훌륭한 뜻을 한 마음으로 받들어 협력하여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의 뜻이 실현될 날 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가라! 바다에서 증기선을 옮겨 타고 육지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만리 각지를 돌아 그 이름 을 사방에 떨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빈다.

대임을 안고 출항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독일·러시아·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오스트 리아·스위스 등 구미 선진국가들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중동과 아시 아의 낙후된 상황도 관찰하였다.

산죠의 송별사에도 나오듯이, 전권대사 이와쿠라와 부사 오쿠보와 기도는 메이지유신의 주 역이자 귀국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실세들이었다. 시찰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 로 오쿠보는 「입헌정체에 관한 의견서」, 기도는 「헌법제정의 建言書」를 제출한데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의 국가구상, 다시 말해 일본형 국민국가의 창출을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서구 근대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 이들은 일본이 후진 성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로 순조롭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제·산업·군사·교육 모든 부문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시찰에서 돌아와 내정개혁을 외치며 征韓論에 반대하기도 했다. 오쿠보의 정한론을 반박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작금 정부는 여러 산업을 일으켜 부강의 길을 꾀하고 있다. 대부 분은 수년 뒤를 기다려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육해, 문부, 사법, 공학, 개척사업 등과 같이 모두 一朝一夕에 그 효과를 기대할 것이 못된다."

그리고 사절단의 중견관리나 유학생들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여 일본형 국 민국가의 형성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했다. 뿐만 아니라 이와쿠라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구메 구니타케의 『미구회람실기』에 고스란히 담겨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 었다. 구메는 이 책에 "이 사절이 거둔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 집·간행"한다고 썼듯이, 이와쿠라 사절단원들은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 각했으며, 이 같은 사고를 실천에 옮겨 자신들이 경험한 바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 다.

이로부터 10∼20년 후에 근대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떠난 우리의 조사시찰단은 일본의 사 절들과 달리 비공식 시찰단이었다. 이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근대문물 수용태도를 간접적 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찰임무를 띠었던 12명의 조사와 그 수행원 들이 약 4개월 동안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하고 살펴보았지만, 이들의 경험이 조선의 근대화 작업에 전폭적으로 활용되기 힘들었다는 한계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 다. 우선 이들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개인자격으로 갔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 정척사파의 세력이 강했다. 또 일본의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후의 사절단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첫째, 일본이 1860년에부터 시작한 근대문물의 수용 노력을 우리는 20년 후에, 그것도 일본 의 눈에 의해 변형된 이미지를 간접 경험했다. 4개월여에서 1년여의 짧은 시찰기간 내지 유 학기간은 일본형 국민국가나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를 충분히 소화·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었다. 특히 이들은 그는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를 이해함에 있어 대체로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오역", "오독"된 근대--를 통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은 동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겪은 지적 혼돈 보다 더한 서 구와 일본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본적으로 변형된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의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근대 서구에서 이입된 개념들--일본에 서 조어된 번역된 한자어들--을 처음으로 접한 조사시찰단원들은 이를 이해함에 있어 문자 의 이면에서 생기는 개념의 차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후쿠자와가 말한 것처럼 일본 사절단은 서구 근대가 이룩한 정신적·물질적 성과의 요체를 파악하여 이를 일본에 적용함으로써 서구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뚜렷한 목 적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진취적인 성향의 인물이자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로 구 성되었다. 그에 비해 조사시찰단의 경우, 물론 능력이 출중한 이른바 정예 관료 출신의 조사 들이었지만,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대부분은 국왕의 하명에 따라 피동적으로 참여한 봉 건군주의 家臣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 수행원들은 조사들과의 사사로 운 관계로 선발되었으며, 尹致昊(1865∼1945)兪吉濬(1856∼1914)처럼 일본 유학이 예정되어 있던 사람들을 빼면 대개가 관직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결여된 인물들이었다. 그밖에 역관 출신의 통역과 하인 등 20여 명도 조사들이 근대 문물제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 큼 각성되지는 못했다.

셋째, 일본의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활자화하여 국민들과 공유하는 데 힘을 썼지만, 우 리의 조사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조사들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왕의 밀명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보고하기 위해, 약 2개월 동안 書寫에 능한 아전들을 동원해 "문견사건"과 "시찰기" 형식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비단으로 장정한 手書本을 고종에게 바쳤 다. 따라서 조사들의 보고서는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자료로 이 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들이 거둔 성과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5. 결론

조사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文明開化"의 충격은 위정자와 식자층에게 전해져 이들의 가치 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나라의 정책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서 조사시찰단 의 일본파견은 개인을 넘어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반향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사에서 역전 현상이 일어난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사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수립한 국민국가 수립론과 동도서기론은 1880∼90 년대 조선이 추진한 개화·자강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자 이를 추동한 쌍두마차였다. 개화 기에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근대화 모형이 중국식과 일본식 혹은 동도서기론과 국민국가 수립론이었다고 할 때, 돌이켜보면 후자가 훨씬 바람직한 모델이었다. 전자는 서양 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을 꽃피운 토대인 서구 근대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時代錯誤적이었다.

당시 일본 근대를 모델로 하는 국민국가의 수립을 도모한 조사들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은 이후 조선 근대화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위정척사 파 지식인들과 달리 서구 문물의 수용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동도서기론자들도 일본을 시찰 하면서 얻은 근대 문물과 제도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시각이 크게 변하면서 조선에 국민국 가를 수립할 필요성을 자각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후쿠자와 유키치도 1862년 유럽을 둘러 볼 당시 서구 근대의 산물인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와 관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서구 국가들을 둘러보면서 익힌 새로운 견문을 바탕으로 근대적 계몽사상가로 거듭났다.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접하면서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그 당장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후쿠자와의 세계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마 찬가지로 동도서기론을 제기했던 조사들 중 몇몇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일 본 지향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도모한 甲午更張(1894∼1895)에 각각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박정양은 학부대신과 총리대신, 이헌영은 내부대신, 엄세영은 농상공부대신으로 활약하 였다. 갑오경장의 개혁 추진기구인 軍國機務處는 이들 동도서기론자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 였던 일본의 집권적 정부와 유사한 집단지도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당시 지방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선거에 의한 鄕會의 구성도 이들이 호평했던 일본의 부·현회와 비 슷한 제한적 지방자치제도였다. 이 같은 점을 미루어볼 때, 이들도 장기적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그렇다면 국민국가를 수립하겠다는 어윤중의 이상은 왜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어 윤중과 동일한 이상을 꿈꾸던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의 힘을 빌려 무모하게 일으킨 유혈 쿠데타 甲申政變(1884)에서,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더욱 심해진 중 국의 간섭과 보수세력의 반동에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 이후 정변의 동조자로 몰려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숙청되었던 어윤중, 유길준, 윤 치호 등 조사와 수행원들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함으로써 자신들의 국 가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內閣 중심의 立憲君主 制와 제한적 대의정치의 도입, 경찰제도의 창설과 법제의 근대화, 그리고 常備軍의 양성을 꾀했으며, 경제통합의 방안으로 왕실 재정의 정리를 통한 정부 수입의 증대, 징세법 개량, 새로운 세원의 발굴, 정부 주도하의 민간 상공업 진흥 등을 도모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재 정수요를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조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국민통합을 위해 전통 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 학교제도의 보급을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 육성하고자 했으며, 중국에 대한 朝貢을 폐지하는 등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들 역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이 실현하고자 한 국민국가 수립 방안의 이면에는 일 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방조·옹호한 면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 침략군과 야합한 친일 개화 파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외세 의존적 개혁의 몰주체성 은 갑신정변을 포함한 19세기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모든 집권정부가 태생적으 로 갖고 있던 공통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윤중이 일본을 모델로 입안한 국민국가 수 립론은 구한말 갑신정변에서 애국계몽운동에 이르는 시기 국민국가 수립을 도모한 운동주체 들이 구현하려 했던 한국형 국민국가의 원형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에게는 일본 모델이 비록 인민 주권론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상정했던 프랑 스 대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왜곡한 변형된 국민국가였을지라도 당장 실현 가능하고 성공의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開化期에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상한 국민국가의 통치형태는 인권이 사상되어 있다는 점에서 1948년 이후의 남·북한에서 발달한 권위주의적 정부 특히 1960년대 남한의 권위주 의형 군부독재 정부와 유사하다. 특히 어윤중이 입안한 집권적 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국가 수립 전략과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개발전략은 5·16군사쿠데타세력에 의해 실천된 국가건설 내지 경제개발 전략의 원형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역사적 시공을 뛰어넘어 이 들의 국가발전 전략은 서구 근대의 보편을 도입하려 하지 않고 비민주적 특징을 갖는 일본 형 국민국가를 그 발전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끝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형 국민국가를 창출한 세력들은 상상된--타자화 된--서구를 반 면교사로 삼으면서 일본 고대에서 일본적 전통의 복고--창출--를 도모함으로써 서구 근대 보편과는 차이가 있는 일본 근대를 만들어 내었다. 일례로 일본은 서구 기독교에 대체할 문화 통합의 기제로 일본적 전통 속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神道와 천황제를 재 창출해 내었다. 이와 같이 메이지 정부가 국민통합의 구심점으로 자국 고유의 신도를 보호·육성함으로써 기독교의 침투를 막으려고 한 데 비해, 어윤중을 비롯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수 있는 국민교화와 부국강병의 효과 적 수단으로 보아 그 수용에 호의적이었다. 기독교를 보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후 조선 과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파 양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남을 지적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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