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가의 눈으로 한국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씸비르체바 타지아나

Ph.D. 한관계사

 

1. 머리 . 글을 이유

글은 1982년부터 한국교육개발원, 2003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이 진행시키는 '한국 바로 알리기' 켐페인과 관련된다. 켐페인의 기본 목적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제적 이해의 증진을 통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있다' 한다. 외국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관 분선 보고서와 연구 자료의 작성은 '한국 바로 알리기켐페인의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 연구원들이 러시아 공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분석을 한지 16년이나 된다. 기간 사이에 그들이 다음과 같은 관련 저서를 출판했다:

러시아 관련 한국교육개발원 등의 저서:

1989. 공산권의 한국관: 중국, 소련, 동독 고과서 속의 한국 관련 내용 분석» (RR 89–16);

1990. 한국관련 소련 교과서 내용 개관(CR 90–5). 노어판.

1992. 한국러시아 양국의 이해 증진을 위한 역사 교과서 개선 방안 탐색» 1992 (RМ 9272);

1993. 한국라시아 양국의 이해 증진을 위한 교육의 역할» (RМ 93–4–4).한국어와 노어판;

1996.러시아의 한국 관련 문헌 내용 분석 (공보처)» (CR96–13–1) 노어판.

1997. 러시아어판 시정자료집 (CR97–42–4).

1998. 교과서 개선 국제 학술회의. 보고서 요지. 1998 (RM9821);

1999. 러시아어의 한국사 (RM99–27). 노어판.

2000. 러시아 교과서 시정 조사 활동 보고서» (RМ200031).

2003. 국제한국이해 사업의 게산을 위한 주변국가의 한국관련 교육과정 교과서 장책 연구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을 중심으로). (RU-CR 03-04).

 

한국 연구원들은 러시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잘못쓰인' 부분을 찾고 이상 저서에서 분석한 다음 러시아 측에게서 것을 고쳐 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 교과서의 잘못 한국 공식 입장과 부합되지 않다는 것이라고 하면 옳을 것이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측은 4개의 러학술 토론회를 진행시켰다. 또한1999, 2000, 2003, 2005 교과서 분석 담당 한국 연구원과 한국교육개발원 정신문화연구원의 담당 관료는 러시아 사범 과학원, 교과서 출판사, 동방 연구소 등을 번이나 방문했다. 한국 측의 기초적 논거는 러시아 교과서를 작성할 러시아 국익에 맞게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측의 의견에 의하면, 러시아 교과서는 한국 국익과 이해에 맞게 쓰면 옳을 것이라는 것이다. '

독립국가의 젊은 세대가 공부하는 교과서를 다른 나라의 이해에 맞게 것은 세계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러시아 한국학과 역사학 학자 8명은 한국 측의 논거와 요구를 깊이 연구하고 하나식 분석해보았. 그연구 결과는 «미래를 위한 협조인가, 과거에 대한 복수인가»라는 제목으로 원탁토론회 자료집은2004 «러시아 한국학» 4호에서 츨판되었다.

나는 «러시아 한국학»지의 서기이므로 잡지가 나오자마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교육개발원 등으로 2부를 우편으로 보냈다. 그때부터 2년이나 지났으나 아무 대응도 없다. 이것은 아쉬운 일이다. 상호교류가 있을 경우에만 양측을 만족시킬 있는 교과서를 만들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러시아 교육자, 역사가, 교육방법 전문가 등이 서로 만나지 않고 의견을 나누지 않으며 논쟁 중인 문제를 풀지 않으면 세상이 아예 지구촌이 없고 우리 양국 국민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과 관련하여 한가지 질문이 나온다. 16년간 러시아 교과서를 고쳐달라고 하는 한국 측은 한번도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세계사 교과서를 러시아 측에 소개해 드리지 않았다. 마치 한국교과서가 이상이 되고 아무 수정이 필요없듯. 한국에서 러시아로 수많은 책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그중 역사 교과서는 1권도 없다. 러시아 국립 도서관, 러시아 공중국립 역사 도서관 등에 소장되고 있는 저서의 목록을 보면 그것을 있다. 한국 친구와 동료를 통해서 나는 몇권의 한국 교과서를 얻었고 그것을 분석해 봤다. 한국 교과서는 과연 러시아에 대해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한국 어린이에게 해주는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가?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분석 대상은2004 3판으로 나온 오금성, 유경준, 임화영, 강문환, 정연 . «세계사 (고등학교라는 한국 교과서다 ( 서울: 금성출판사, 2004. 교육인적자원부 검정. 2002.7.30).

 

미국식 민주는 최고 가치관. 이상의 «세계사» 교과서는 모자이크식으로 지은 책이다. 나라 별로 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가 여러 사실과 날짜를 대충 소개한다. 교과서 필자의 (앞으로 '필자' – T.S. ) 기본 목적은 인류가 최대한 가치관을 향하여 걸어온 길을 보여 주는데 있다. 필자에 따르면, 기본 가치관은 자본주의와 미국식 민주다. «미국과 러시아»주제를 예로 보면 (pp. 214–215), 19세기 전반기의 미국이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쓰인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있던 당시 미국이 민주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서 그것은 민주의 이라고 있다. 러시아에도 농노제를 없애버려는 세력이 있었다. 필자가 언명하는 데카브리스트 나로드니키세력은 바로 그것이다. 같은 성격을 갖는 진보적인 세력이 양국에 있으면서도 필자는 미국에서만 민주주의 뿌리 발견해낸다. 교수법에 따라 제목 하에 여러 나라 역사를 같이 쓰는 이유는 나라가 같은 문화권에 속하거나, 적대적인 관계 때문에 나라간 전쟁이 발발하거나, 교류가 활발하는 등에 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러시아와 미국간 아무 특별한 관계가 없었다. 무화권도 다르다. 그렇다면, 필자는 «미국과 러시아»주제를 입력한가? 미국의 '빠른 속도의 발전' 러시아의 '후진성' 대비하기 위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 시기' 냄새가 나고 약점이 많은 대비다. 주제의 마지막 문장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다시 좌절되었다» 하는 문장은 대표적인 주장이다.

19세기 미국이 북미 대륙에서 영토 팽창을 했다고 쓰면서 필자는 새로 들어온 백인종 식민주의자들이 그영토에 엣날부터 사는 인디안인을 조상의 땅에서 쫓아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본토인의 고생이야말로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빠른 발전의 토대였다는 것을 묵살한다.

친미 지향성. « 년의 인물 '칭기즈 '» (p. 81): «1995 12,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꼽았다.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칭기즈 ' 사람과 과학의 교류를 통해 지구를 좁게 만들고, «오늘 날의 정보 통신 혁명에 비견될 만한 정보-교통-통신의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쓰입니다. 당시 몽고족은 그들이 점령한 민족보다 후진적이었. 1223년에 루시 (당시 러시아 이름) 침투한 몽고족 무리는 우리 나라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살육시키고, 문화적 유산을 불태워서 없애버림으로써 러시아를 과거 200년전으로 내던졌다. 칭기즈 칸을 '진보' 가져온 '혁명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명백치 않지만 필자는 원래 규모 점령가나 독재자에 대한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준다. 나폴레옹도 대표적인 예가 된다. 같은 논리를 따르면, 1930년대 고려인을 비롯한 14개의 민족을 본토에서 추방시킨 스탈린과 2 대전때 유럽을 점령한 히틀러도 '통신의 혁명가'였다고 있을 것이다. 또는, 칭기즈 칸이 살던 시기에는 미국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근대사 시기에 무대에 등장한 미국 신문의 평가는 유라시아 중세기 역사 공부의 태도가 없다고 생각된다.

러시아 독립운동사 무시. 13세기 몽고 침략과 기반을 반대한 루시 해방투쟁은 언급되지는 않는다.

P. 208. 필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투 이유를 영토 침략을 하기 위해서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했다'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나폴레옹은 침략을 위한 근거가 있던 같다. 계속해서 필자는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소개 작전으로 소득없이 돌아서야 했다» 쓴다. 실상 당시는 나폴레옹은 자기 대군을 완전히 잃고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면서 겨우 도망갔다고 하면 옳을 것이다. 1812년에 농노부터 귀족까지 러시아 인구는 한결같이 해방전쟁으로 일어났고 곳곳마다 침략자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교과서는 광범위한 해방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다.

Pp. 276-277. 1941-1945년간 히틀러 침략을 반대하여 싸워 3000만명을 잃은 소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은 언급되지는 않고 소련에 대한 부분은 3-4 밖에 안된다. 소련이 1941 6월부터 전쟁에서 싸웠고 미국과 영국 동맹국들이 3 지나, 1944 6 6일에만 전쟁에 들어섰다. 유럽지역 전쟁에서 바로 소련은 기본 역할을 했고 희생자가 가장 많았지만 필자는 '소련이 영국과 상호원조 조약을 맺어 완강히 저항했다' 지적하면서 영국도 저항에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이도록 노력한다. 사실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동맹국은 히틀러가 소련을 파멸할 것을 기대하면서 일부로 2 전선을 오래 동안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의 입장을 소개하는 1994 12 'Korea Times'지에 실린 볼코프박사의 참고].

러시아는 패배만 당한다 종이 호라이 (19새기 일본 역사학에서 나온 논거). P. 215. ‘농노 해방은 대단히 획기적인 조치였다 인정하면서 필자는 조치의 의미를 과소평가한다. 1861 러시아 농노 해방의 주요 의미는 가난한 농민이 자유 농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조건을 마련 했다는데 있다.

P. 259. 상트페테르주르크가 거친 파도와 혹독한 추위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에 건설된 도시였지만, 표트르 대제는 이곳이야말로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갈 서방으로의 이라고 여겼다. — 표트르가 여겼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정말 서방으로의 ’, 다른 말로 하자면 해외 무역을 하는 항구가 되었다. 북쪽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하나는 상트페체르부르크 항구는200 이상 동앙 러시아 수도였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에는500만명의 사람이 산다.

러시아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 P. 319. «우주 시대의 개막» 부분에서 1961 4 11 세계 역사상 최초로 우주로 유리 가가린에 대한 언급이 없다.

P. 227. '청조는 톈진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맺어 추가로 항구를 개항하고 외교관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하였다. 러시아는 사건을 조정해준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다'. 여기서는 중요한 정보가 빠졌다고 생각된다. 당시 (1860) 러시아도 청조와의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서 러시아와 조선이 이웃국가가 되었다. 국경이 생기자마다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간의 무욕이 발생했고 1864년부터 함경도 농민이 러시아로 이민하기 시작했다. 이민이 계속 늘어났고 1917년에 러시아에 사는 조선이민자의 수는 1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한국학생이 읽는 교과서에서 이같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러시아 문화가 추체성이 없다. P. 135. «키에프 건국을 노르만 족이 세웠다», «러시아가 비잔티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았다», 러시아 건축물은 «로마 기술과 동방의 돔형 건축 조합한 것이 특징이란다».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였다.

명백치 않은 내용. P. 135. ‘러시아, 그리스 정교회의 맏형으로라는 제목하에 실린 내용은 제목을 설명하지 않는다. 모스크바는 번째 로마이기도 하고 2 콘스탄티노플이라기도 불리운다. 비잔치움 제국에서 흡수된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였다고 쓰인다. 이와 동시 기독교의 현재 한국신자는 신앙이 타국신앙이 아니라 자기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1000 역사를 갖는 러시아 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라고 부르는 논리에 따르면 200 밖에 안되는 한국 기독교는 한국 신앙이라고 말할 근거도 없다. 러시아 교회는 사회적 역할보다 개인의 수행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라는 주장은 러시아 정교회가 수백년 동안 정치사회 생활에서 상당한 역할을 것을 설멍하지 않는다. 2006 온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종교문제를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 교과서의 정교회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재검토해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에 어긋나는 . P. 135. '15세기경부터 모스크바가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힘이 커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힘이 커지는 이유는 교역이 아니라 몽고기반을 반대한 투쟁에서 인민을 단결시켜 이끄는데 있었다.

P. 192.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겨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스웨덴과의 전쟁 아니라 초기인 1702년이였다.

P. 135, 192. 차르’= ‘황제’. 15세기까지 러시아 군주는 이라고 불렀다. 15-17 세기 차르. 1721년부터 황제라고 부른다. 변함은 국가발전의 여러 단계를 의미한다.

P. 259. '표트르 대제에게 부동항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부동항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기 위한 항구가 필요했다. 표트르는 발트 연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아조프해에서도 아조프항구를 창립하므로써 항구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있다.

잘못된 그림. P. 135. ‘러시아의 크레믈린 궁전’. — 그림은 궁전이 아니라 성벽뒤 보이는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성당광장이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은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크레믈린이란 잘못 말이다. ‘크레믈린이란 성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크레믈린은 모든 러시아의 도시에 있다. 노브도로드시 크레믈린, 스몰렌스크시 크레믈린, 프스코프시 크레믈린, 야로슬라블시 크레믈린, 로스토프시 크레믈린, 니주늬 노부고로드시 크레믈린, 카잔시 크레믈린 등등.

P. 192. ‘표트르 대제가 조선공으로 일할 당시의 모습’(1 그림). — 교과서에 실린 면도하지 않는 노동자 아저씨의 그림은 풍자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표트르의 실제적인 모습과 아무 공통점도 없다.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인들도 그것을 것이다. 표트르의 조상화는 초콜릿 통으로부터 역사의 아느 박물관이든지 로시아에서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표트르는 세종대왕 수준의 인물이었다. 세종 대왕을 비롯한 한국사의 유명한 인물을 노동자 차림을 입은채 그려본적이 한국에 아직 없는 같다. 한국사회에서 복장은 부터 상당한 의미를 가졌왔다. “세계사교과서에서 특징을 엿볼 있다. 교과서는 중국에서 활동한 최초 서양 선교사 마테요 리치까지도 화려한 옷을 입은채 그려진다. 러시아의 진짜 혁명가이자 개혁자였던 표트르 대제 만이 웃긴 모습으로 나타난다. 표트르의 수많은 조상화 중에 같은 선택은 의도적인 것이다.

2 그림.

1 그림

P. 192. ‘귀족의 수염을 자르는 이발사라는 만화 (2 그림).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대개혁의 의미를 낮추는 그림. 한국의 가보년 단발령(1894) 비슷한 개혁이었다. 단발령은 웃긴 것이였다는 주장은 아마도 한국 저서에서 찾을 없는 주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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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은 첫눈에 띄는 문제점이다. 완벽한 분석을 하자면 수많은 교육자, 러시아사와 문화 전문가, 한국학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이상 내용과 관련하여 나에게 주시면 고맙겠다.

Simbirtseva Tat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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