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文王의 儒佛仙融和政策 (≪三國史記≫ ≪三國遺事≫關係記事를 中心으로)

Vladimir Tikhonov,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아세아 및 아프리카 諸國연구부,

한국학 국제 학술 센터, 박사과정 수료.

Ⅰ. 머리말

景文王의 재위기간은 新羅의 下代 (780-935)에 속한다. 다 아는바와 같이 下代에 접어 들면서 中央集權的貴族國家로서의 신라는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되었다. 名門貴族의 賜田 食邑이 확장됨에 따라서 왕실의 경제적 기반은 차츰차츰 약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 세력의 진출의 계기가 더욱 激增되었고 地方割據的 요소는 분명히 드러났다. 또한 진골 귀족의 고급관직독점에 대한 六頭品의 반발은 골품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나타냈다. 中 央集權體制의 약화는 하대의 실질적 始祖인 元聖大王 (在位 785-798)의 후손의 빈번한 王位爭奪戰을 가능케 하였다. 그런 왕위전탈전의 대표적 例는 바로 경문왕이 속하는 憲 貞파와 그에게 왕좌를 물러준 憲安王 (在位 857-860)이 속하는 均貞派의 대립이었다. 한 편 이 상황에서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여러 家系들의 화해와 육두품의 불만의 수습을 목 표로 하는 유교적 정책의 실행을 통해서 중앙집권제의 강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最高官職을 거의 독점하듯하였던 憲貞 均貞兩派의 재통합은 왕족의 급선무이었다. 경문왕의 정치적 철학적 사상은 바로 그런 경제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景文王의 사상에 관한 史料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의 該當記事를 비롯한 崔 致遠撰<崇福寺碑>와 <郎慧和尙白月拺光碑>, 忠淸南道 保寧郡嵋山面聖住里의 聖住寺址 에서 나온 碑片(翰林郞 金立之撰聖住寺事蹟碑로 推定)의 銘文 등의 金石文들이다. 특히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부분은 ≪三國史記≫卷11憲安王4年9月條와 ≪三國遺事≫卷2紀 異篇四十八代景文王條에 나오는 金膺廉 (景文王의 諱)의 智慧에 대한 說話式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가 國仙으로 860년9월에 臨海殿의 宴會에 참석하여 헌안왕의 물 음에 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끌게 되었다. 왕은 그에게 두명의 公主중에서 한명을 娶하라고 하였는데 김응렴은 자신의 부모의 의사와 반대로 자신 隷下의 郎徒의 上首이었다는 範敎師의 충고에 따라 長女와 혼인하였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그가 왕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賢答은 권력자, 부자, 세력가의 自制, 양보 그리고 겸손의 정 신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일찍 이기백은 응렴의 답에 대해서 "대체로 지방호족의 실정을 말해주는 것" 이라고 지적하여 지방귀족의 영향력의 증가에 대한 중앙귀족의 우려의 표시라고 설명한바 있 다. 이기동은 金石文을 통해서 알수 있는 김응렴의 儒風을 강조하여 "실제 見聞을 이야 기한것이라기보다는 儒敎知識에 의해 案出된바가 크다"고 해석하였다. 이기동은 풍부한 금석문적 자료를 모아서 "景文王의 儒學 및 한학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이기동은 김응렴의 유학에 대한 관심과 그의 文翰機構擴張政策을 연결시켜서 경문왕시대의 정치적 추세를 "近親王族에 의한 권력의 集中의 강화"라고 단정하였다. 경문왕은 유교뿐만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태 는 화랑도정신의 불교적 기원의 문제를 연구하여 김응렴과 범교사의 관계가 국선과 僧侶 郎徒의 관계의 대표적인 例라고 결론을 지었다. 말하자면 경문왕과 儒 佛사상의 관계 는 연구의 대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필자는 경문왕의 賢答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사상이 儒 佛뿐만 아니라 道家的 측면도 지니고 있었음을 밝히고 나아가서 경문왕이 주장하였던 儒 佛 仙의 融和를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경문왕이 儒 佛 仙의 사상을 채택하여 중요시하였던 사회적 정치적 이유 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통일신라의 識者層은 儒家 道家의 사상을 그 자체로 서 수용한것이라기보다는 '漢學', '諸子百家'라는 광범위한 개념아래 기본적인 뜻이 서로 통하는 '중국사상'으로써 받아들였다. 토착신앙 (천신 산신 숭배 등)과 그와 융화된 불교를 우위에 두었던 통일신라사회에서 도가 유가사상은 별도의 차별없이 똑같이 상류 층의 필수교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金仁問이 (...)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여 儒家書 를 많이 읽고 겸하여 莊子 老子 浮屠의 說도 섭렵하였다"는 ≪三國史記≫ (卷第44 列 傳第4 金仁問傳)의 기록이나 "圓光이 (...) 글을 즐겨 읽어 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子史도 연구하였다"는 ≪三國遺事≫ (義解第5 圓光西學條)의 기록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최치원 의 佛 儒 仙 三敎의 融化思想도 바로 그런 환경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 응렴이 儒書에 밝았다는 사실은 그가 老莊思想까지 터득하였을 것을 암시해준다. 그리하 여 필자는 김응렴의 賢答에 담겨져 있는 儒家 道家의 사상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또한 佛國 佛土를 自處하였던 신라의 왕이 그토록 儒 仙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이 무엇이였을까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三國史記≫ ≪三國遺事≫所 載의 김응렴의 현답에 대한 기사를 보고자 한다. 끝으로 이 小稿를 자세히 보시고 중요 한 지적을 아끼지 않으셨던 高麗大 최광식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Ⅱ.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記事의 比較 檢討

≪三國史記≫ 新羅本紀卷11 憲安王4年 秋9月 5年 春正月 兩條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4年 (西紀 860年) 9月에 왕이 臨海殿에서 群臣을 會宴할새 王族膺廉은 나이 15歲로 참석하였다. 왕이 응렴의 心志를 엿보기 위해서 갑자기 묻기를 '네가 얼 마동안 (四方으로) 돌아다니며 見學을 하였으니 (더러) 착한 사람을 본일이 있느 냐'고 하매 응렴이 대답하기를 '臣이 일찍 세 사람을 보았는데 다 善行이 있는 줄로 생각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어떻더냐고 물으니 응렴이 말하되 '하나는 貴한 집 子弟로써 남과 交際함에 있어 (무엇에든지) 自己를 먼저 하지 않고 남의 밑에 請하기를 좋아하였고, 하나는 財富한 집 사람으로 (으레) 衣服이 奢侈할터 인데 항상 麻紵로 滿足自喜하였고 또한 사람은 세력과 영화를 누리되 그 세력을 가지고 남을 누르려고 한적이 없었습니다. 臣이 본 바는 이러하였습니다'고 하였 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王后에게 귀엣말로 '朕이 閱人을 많이 하였 으되 응렴과 같은 자는 없었다'하고, (왕은) 은근히 사위를 삼으려는 意思가 있어 응렴을 돌아보고 이르되, '願컨대 郞은 自重自愛하라, 朕에게 女息이 있으니 薦枕 (同居)을 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왕은 다시 酒宴을 베풀고 함께 마시며 從容히 말하기를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兄은 今年20歲, 아우는 19歲니, 郞은 마음대로 娶하라'고 하매 응렴은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謝禮한후,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 에게 告하였다. 부모는 말하되, '왕의 두딸의 容色을 듣건데 兄은 아우만하지 못 하다하니 不得已 娶하게 되면 그 아우를 娶하는 편이 좋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躊躇未決하여 興輪寺 僧에게 물었다. 僧이 가로되 '兄을 娶하면 세가지 利益이 있고 아우를 娶하면 이와 반대로 세가지 損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응렴이 이에 왕께 아뢰되 '臣은 감히 自斷할수 없사오니 왕이 명하시는대로 좇겠습니다'고 하 여 이때 왕의 長女가 出降하게 되었다.

5年正月에 왕은 病患이 沈重하여 左右에게 이르되 '(中略) 사위 응렴은 나이 비록 적으나 老成한 德이 있으니 卿들이 이를 세워 섬기면 반드시 祖宗의 令緖 를 떨어뜨림이 없을 것이매 과인이 죽어도 썩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같은 책 景文王3年11月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妃) 寧花夫人의 妹弟를 들이어 次妃로 삼았다. 그후 어느날 왕이 興輪寺 僧에게 묻기를 '師가 前日에 말한 所謂 세가지 利益이란 무엇이냐'고 하매 僧이 대답하기를 '當時에 왕과 왕비가 그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 寵愛가 점점 깊었던 것이 한가지며, 또 이로 인하여 大位를 잇게 된 것이 둘째며, 앞서부터 구하려던 (前王)의 季女를 마침내 娶하게 된 것이 그세째의 利益이라'하니 왕이 大笑하였 다".

≪三國遺事≫에 실린 이야기는 줄거리가 ≪三國史記≫의 기록과 똑같지만 몇가지의 중 요한 부분들이 다르거나 ≪三國史記≫의 該當記事의 내용을 보충한다. 또한 儒家의 '禮' 의 틀에 맞춘 ≪三國史記≫의 기록에 비해서 ≪三國遺事≫의 해당기사는 생생하고 逼眞 한 편이다. 유교의 추상적 이상의 權化처럼 행동하는 ≪三國史記≫의 등장인물에 비해서 ≪三國遺事≫의 주인공들은 감정적이고 天眞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三國遺事≫ 卷2 景 文王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의 이름은 膺廉이다. 나이 18歲에 國仙이 되었다. 弱冠 (20살)에 이르자 憲 安大王은 그를 불러 宮中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었다: '郞은 國仙이 되어 四方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무슨 異常한 일을 본 것이 있는가?' '臣은 아름다운 행실 이 있는자 셋을 보았다.' '그 말을 나에게 들려주게.' '남의 윗자리에 있을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 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한 사람 그 둘이요 원래부터 귀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威力을 부리지 않은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그말을 듣고 郞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리면 서 말하였다: '나에게 두딸이 있는데 郎의 시중을 들게 하리라.' 郞이 자리를 피 하여 절하고서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 부모님에게 告하였다. 부모는 놀라고 기뻐 하여 그 子弟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되: '왕의 맏공주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고 둘 째 공주는 매우 아름답다 하니 그를 아내로 삼으면 다행이겠다.'고 하였다. 郞의 무리중에서 우두머리로 있는 範敎師가 이 말을 듣고 郞의 집에 가서 郞에게 물 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公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니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 어느 공주에게 장가를 들려는가?' '부모님께서 둘째 공주가 좋겠다고 하십니다.' 범교사는 말하였다: '郞이 만일 둘째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郞의 面前에 죽을 것이고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반드시 세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警戒해서 하도록 하라.'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뒤에 왕이 날을 가려서 郞에게 使者를 보내어 말하였다: '두딸 중에서 公 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라.' 使者가 돌아와서 郞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하엿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런지 삼개월이 지나서 왕은 病이 危篤하였다. 여러 신히들을 불러놓고 말한 다: '나에게 사내자식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膺廉이 이어 야 할 것이다.'

이튿날 왕이 崩하매 郞이 遺言을 받들어 王位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는 왕에게 나가서 말하였다: '제가 아뢴 세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그 하나요, 예전에 흠 모하시던 둘째 공주에게 에제 쉽게 장가를 드실수 있게 되신 것이 그 둘이요, 맏 공주에게 장가를 드셨기 때문에 왕과 夫人에게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셋입니다 '.

왕은 그 말을 고맙게 여겨서 大德이란 벼슬을 주고 金130兩을 下賜하였다. 왕 이 崩하자 諡號를 景文王이라고 하였다 (下略)".

위에서 보이듯이 ≪三國遺事≫의 해당기사는 ≪三國史記≫의 관계기록보다 생동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 ≪三國史記≫의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父母言' '兄不如弟' 등 과 ≪三國遺事≫의 '王聞其言而知其賢 不覺墮淚而謂' '父母驚喜' '王之上公主貌甚寒寢 第二公主甚美' 등의 표현을 비교해보면 ≪三國史記≫의 簡略性과 ≪三國遺事≫의 풍부한 표현성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상적인 유교적 사서를 만들기 위해서 非儒 敎的 土着的 구비문화적 요소를 제거 변모하였던 김부식의 역사 서술 방식과 무관하 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또한 ≪三國史記≫편찬과정에서 해당기사의 표현뿐만 아니라 내 용까지 修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일연은 원자료의 본모습을 별도의 생략 가 필 없이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로 ≪三國史記≫의 해당기사와 ≪三國遺事≫의 관계자료는 다음과 같은 相異點을 가지고 있다:

衁) ≪삼국사기≫에 膺廉 範敎師에 대하여 각각 '왕족' '興輪寺僧'이라고 쓰여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에서 응렴 범교사는 각각 '國仙' '郎之徒上首'로 나온다. 김부식이 응렴 범교사와 花郞徒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생략해버린 목적은 무엇이였을까? 추측컨 대 김부식은 화랑도를 賢佐忠臣良將勇卒을 배출하는 臣僚의 교육기관으로 인식하였지 왕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 한때 신료로서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王道와 臣道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김부식으로서 史書에서 기록될 것이 아니였을 것이다. 그래서 응렴이 화랑도의 국선이고 범교사가 그의 부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에서 不錄되었다.

遁) ≪삼국사기≫에 의하면 응렴은 游學을 마치고 나이 15歲에 御宴에서 참석하였다. 반면에 ≪삼국유사≫에 따르면 응렴은 18歲에 국선이 되어 四方遊學을 마친 다음 스물살 에 임해전의 잔치에서 참석하였다. 후자의 기록은 전자보다 조금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眞骨출신인 화랑의 初仕時의 연령은 대개 20歲前後이였기 때문이다. 그 러나 15歲前後에 國仙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전자의 기록의 역사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응렴은 15歲에 國仙이 되고 數年동안 一種의 修鍊 (四方遊學)을 치른 뒤에 20歲에 御宴에서 참석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김응렴의 社會進出年齡은 열다 섯살이 아닌 스물살이었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응렴의 初仕時의 연령을 上向 調整하였던 목적은 무엇이였을까? 김부식은 反佛의 입장에 서지 않았지만 불교에 대한 君主의 지나 친 依存을 국가의 쇠퇴의 주요원인으로 간주하였고 이 종교에 대한 조심스럽고 냉정한 태도를 가졌다. 그런 김부식은 응렴이 부모의 뜻을 거슬러 僧의 조언을 따랐다는 사실 을 만세를 위한 모범으로 삼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史官으로써의 김부식은 이 史實을 생략해버리지 못하고 그 대신 다음과 같은 修整을 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삼국유사≫에서는 응렴이 범교사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고 서술된 반면에 ≪삼 국사기≫에서 응렴이 僧의 충고를 듣고 '臣不敢自決 有王命是從'이라고 왕께 아뢴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은 이렇게 서술함으로써 범교사에 대한 응렴의 신뢰의 정도를 과소 평가하고자 하였던것같다.

2. ≪삼국유사≫에서는 응렴이 僧에게 '聞命矣'라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된 반면에 ≪삼 국사기≫에서 응렴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없다. 왕족이 僧의 말을 '명령'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김부식으로써 不錄할 수밖에 없었다.

3. 응렴의 즉위이후에 범교사는 소위 '三益'의 내용을 왕에게 밝혔다. 이에 대한 응렴 의 반응이 ≪삼국유사≫에서 '王德其言'이라고 묘사되어 있고 ≪삼국사기≫에서 '王大笑 '라고 묘사되어 있다. 왕이 僧의 말을 고맙게 여겼다는 사실은 김부식의 사상과 어울리 지 않았을 것이다.

4. ≪삼국유사≫에서는 응렴이 즉위이후 범교사를 大德으로 삼고 그에게 金130兩을 하 사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삼국사기≫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부식은 왕 의 報恩의 사실을 생략함으로써 僧이 왕에게 베푼 은혜의 중요성을 減少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5. ≪삼국유사≫에서는 범교사는 자진하여 응렴에게 충고를 바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응렴은 먼저 僧에게 조언을 구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은 응 렴의 일에 대한 범교사의 적극적인 태도를 史書에서 기록하려고 하지 않았다.

6. ≪삼국유사≫에서는 범교사가 '郞若娶弟 則予必死於郞之面前' 등의 위협에 가까운 말로 응렴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던 것처럼 서술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僧은 경고이자 예언을 하였을 뿐이었다. 여기에서도 김부식은 응렴에 대한 僧의 충성심 을 증명하는 사실을 不錄한 것이다.

7. ≪삼국유사≫에 따르면 응렴의 즉위 이후에 범교사는 자진하여 왕에게 자신의 예언 의 뜻을 풀이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입각하면 응렴은 흥륜사에 행차하여 僧에게 그의 예언의 설명을 청하였다. 여기에서도 김부식은 범교사의 적극적인 태도를 무시해버 린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범교사가 응렴의 登位의 第一功臣이였음을 시인하되 범교사가 僧侶郎徒 답게 국선이었던 응렴을 적극적으로 지도 보좌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또한 응렴이 자신의 교수 정신적 지도자이었던 범교사를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느꼈다는 사실도 ≪삼국사기≫에서 반영되지 않았다. 김부식의 서술에 따르면 흥륜사의 僧은 豫知의 능력을 갖춘 일종의 顧問에 지나지 않는다. 응렴과 범교사 의 관계의 밀접함을 그토록 과소평가하였던 김부식은 왕족이 僧의 말대로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든지 合當化시키고 싶어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응렴이 成人으로서의 適齡이었던 15歲에 겨우 達한 청년이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응렴이 오직 幼年 때문 에 僧의 말을 따랐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물론 위의 推論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김부식이 응렴의 나이를 최소한으로 깎았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편찬자의 사상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위에서 보듯이 유교적 名分論을 주장하고 불교에의 지나친 의존을 警戒하였던 김부식 은 응렴의 故事에 관한 원자료를 상당히 修整 削除하였다. 그러나 이 故事의 줄거리는 ≪三國史記≫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弱冠에 이른 왕족은 遊學을 마친 뒤에 왕과 群臣 앞에서 왕의 下問에 현명하게 答함으로써 왕녀, 그리고 결국 왕좌를 얻었다는 것은 이 고사의 骨子이다. 여기에서 '弱冠'이라는 용어는 괄목할 만하다. '弱冠'이란 스물살에 비 로소 갓 (冠)을 쓰게 한다는 옛 중국의 풍습에 기인된 표현이다. 이 語句가 사용된 것은 이 宴會에서의 응렴의 참여가 冠禮의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관례는 원래 成年式에서 비롯된 儀式이다. 성년식(initiation)은 通過儀式(rites of passage)들의 하나로써 성인이 될 청년의 체력, 용기, 그리고 정신력이나 智慧를 시험하 는 것을 의미한다. '王欲觀其志忽問', '王聞其言而知其賢' 같은 기록은 정신력과 지혜의 시험을 연상케 하지 않나 싶다. 왕이 응렴에게 '優遊四方 見何異事'나 '游學有日矣 得無 見善人者乎'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여 선행 (내지 異事)의 개념을 설명하라는 시험문제식 요구가 아니었나 싶다. 왕이 응렴을 시험하였다는 추측 이 타당하다면 응렴의 답을 正答으로, 그리고 왕의 감동과 自愛하라고 한 말을 합격의 표시로 각각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이 '시험'은 보편적인 성년식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특정의 목적을 가졌을까? 崔致遠撰 初月山大崇福寺碑銘의 내용을 고려에 넣으면 後者의 추측은 조금 더 신빙성 있 게 보인다. 이 비명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上略) 三利 (응렴의 故事)의 좋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천년의 寶運이 어그러짐이 없게 되었다. (中略). 처음에는 (응렴이) 花 郞團에서 이름을 날려 유별히 風流道를 떨치시더니, 얼마 뒤에 높은 지위에 올라 모든 관직을 통제하시어 우리 나라의 습속을 淨化하시었다. 임금이 될 자리에 있으면서 德을 심으시고 궐내에 살면서 마음을 기름지게 하시었다. (中略). 여덟가지의 중요한 權柄 (宰 相의 의무)을 모두 집행하시었다.(下略)". 이 본문의 내용은 응렴이 '시험'에서의 '합격 '이후에 宰相으로 등용되고 궁궐에서 거주하게 되며 왕이 될 수 있는 만큼 많은 권력을 장악한 것을 입증해준다. 따라서 이 '시험'을 최고관직에 임명될 出仕하는 중앙귀족의 정 신력과 지혜를 평가하기 위한 특별등용적부심사로 볼 수 있겠다. 이 '시험'의 장소인 臨 海殿에서 왕과 왕후뿐만 아니라 群臣 (和白의 구성원들?)도 모였다는 것은 이 '심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Ⅲ. 景文王과 道家思想.

'정답'으로 받아들여진 응렴의 賢答에 어떤 사상이 담겨져 있었을까? 이러한 사상적 발상을 탄생시킨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기백은 "응렴의 대답은 지방호족의 실정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지적,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 다:

"그들 호족중에는 위와 같은 美行이 있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이 미행으로 생각 될 성질의 것이라면 보통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따라서 왕을 비 롯한 중앙귀족의 관심과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고 봐야 될 것이다. 앞서 응렴이 헌안왕의 壻가 된 것을 귀족들의 결합을 말해주는 예라고 했지만, 그러한 귀족들 의 결합을 가져온 이유를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이기백에 따르면 응렴의 답은 단순한 見聞談이 아니었다. 응렴은 고위관직과 그에 따르는 富가 보장되는 진골귀족이 표방하였던 '分數論'을 말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응렴이 변호하였던 이 '分數論'은 사회의 각 구성원이 골품제에 따른 신분에 알맞는 관 직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내용의 중앙귀족의 정치이념이었다고 이기백은 해 석한다:

"이(美行)의 사실들은 응렴이 지방으로 유행할 때에 견문한 일들이므로 지방호 족들을 두고 한 말로 해석된다. 신라의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호족들이 크게 일어 났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중앙귀족 전체의 운명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하 여, 종래 그들이 지녀온 분수에 맞도록 처신하기를 중앙귀족들은 희망하였던 것 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구체적 표현이 위의 응렴의 말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설명의 타당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新唐書≫ (卷220 東夷145 新羅)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신라의 9세기중엽의 호족의 跋扈의 실상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宰相家는 祿이 끊이지 않았고 奴尗이 三千人이요 甲兵과 牛 馬 猪가 이와 비슷하였다. 海中의 山에 放牧하여 이를 쏘아 잡아 먹었으며, 百姓들에게 곡식을 꾸어주어서 이를 갚지 못하면 奴婢로 삼았다".

윗 引用文에세 豪族化되어 가는 중앙귀족들이 가졌던 권력(재상의 관직), 富(祿, 家 畜, 방목장, 노비), 그리고 물리력(삼천명의 奴尙) 등은 강조된다. 응렴의 대답에서도 권 력(人上者), 富(豪富), 그리고 세력(貴勢)을 가진 美行者들이 언급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新唐書≫나 응렴의 답에서 신라의 하대의 群雄割據의 모습은 여실히 나타난 것 이다.

호족중에는 응렴이 말해준 美行者도 있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美行으로 생각될 성질의 것이라면 보통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이기백의 지적도 타당하다고 본다. 또는 중앙귀족입 장에서는 호족들이 그들 미행자처럼 행실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응렴은 왕 실과 중앙귀족들의 기대와 희망을 표현해준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하대의 중앙귀족의 주요정치이념이었다는 '분수론'을 응렴이 표방하였다는 가설의 타당성도 의심할수 없는 것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 '분수론'이 어떤 사상체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었는가? 어느 사상체제의 용어로 구체화 표현화되었는까? 주지하듯이 숙명론적인 요소는 세계의 거의 모든 철학체계에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 응렴의 '분수론'은 어느 사상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기동은 응렴의 대답이 "실제 見聞을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는 儒 敎知識에 의해 案出된 바가 크다"고 해석하였다. 이기동은 ≪三國遺事≫, ≪三國史記≫ 의 該當記事와 金石資料를 두루 검토하여 김응렴이 유교에 대한 비범한 지식과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臺灣大學의 高明士도 이기동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에 의 하면 膺廉이 말한 讓, 儉, 그리고 恭의 德目은 ≪論語≫ 卷一 學而篇十章에서 언급한 孔 子의 恭, 儉, 讓 등의 美德과 전부 통한다. 또한 응렴이 이야기한 세가지의 美點과 孟子 (卷六岇文公章句下 二章)가 理想的 선비(士)의 성격에 대하여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 武不能屈"이라고 한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景文王이 儒學을 振興하여 몰락되어가는 專制主義的 中央集權制를 뒷받침하려고 하였 던 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景文王3年 春2月條의 '王幸國學 令 博士已下 講論經義 賜物有差'란 내용의 기록만이라도 景文王과 儒學의 관계를 웅변적으 로 나타낸다. 또한 <智證大師碑>에서는 景文王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太師 追贈된 景文大王께서는 마음으로 三敎 (佛敎, 儒敎, 道敎)를 융화한 분이 었는데, 심히 大師 (輪工)를 만나보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기를 바랐다. 이에 書翰을 부쳐 말하기를 '伊尹은 나아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宋纖은 물러나 앉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儒로 써 佛에 비유하자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곳에 닿는 것이니, 王都주위의 巖居에 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어, 새가 가히 가리어 앉을 만한 나무일 것입니다. 鳳 凰의 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 碑銘의 저자인 崔致遠은 유교를 포함한 三敎에 대한 景文王의 관심을 언 급하기도 하고, 景文王의 書翰중에서의 중국역사인물(伊尹, 宋纖) 유교경전의 引喩(鳳儀) 등은 景文王의 유교지식수준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 書翰이 親書인지 아니면 文 翰機構에 의해서 작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없으나 景文王이 직접 쓴 것이 아 니다 해도 왕의 側近의 儒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大崇福寺碑>에서 인용한 景文王의 敎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經典(≪孝經≫)에서 경계한 바이다. '네 조상 을 생각하지 않느냐' 라고 한 詩 구절을 어찌 잊을쏘냐(下略)".

여기에서 景文王의 孝認識과 儒家의 經典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는 주목된다. 한마디 로 응렴이 철저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같다.

그러면 膺廉의 賢答도 유교적 이상의 표현인가? 물론 응렴이 말한 謙讓, 儉朴, 善政의 美德은 儒敎의 기본사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가령, 謙遜은 유가의 이상적 인격자인 君子의 제일 중요한 德目 중의 하나였다. 膺廉이 謙虛한 자에 대하여 '不自先 而處於下'라고 말하였는데 이것과 뜻이 통하는 표현은 ≪論語≫ 第12卷 顔淵篇에 있다. 孔子는 子張의 물음에 答하여 君子의 處世에 대해서 '察言而觀色慮以下人'이라고 설명하 였다. 같은 책 第13卷 子路篇에서 孔子는 태연하면서 교만하지 않은 君子의 태도를 설명 하면서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겸소의 반대인 교만은 君子의 반대인 小人의 태도이다. 君子의 겸허한 保身의 자세에 대하여 孔子는 '出門如見大賓'이 라고 하였다 (≪論語≫ 顔淵篇). 그렇게 행세하여 유교의 주요개념인 '仁'의 '己所不欲勿 施於人'의 규칙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孔子의 제자인 曾子는 君子에게 필요한 謙遜의 정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 물으며, 박학하면서도 얕은 사람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며, (中略), 범하고 계교치 아니한다". ≪論語≫ 第10卷鄕黨篇에 의하면 孔子 자신은 謙遜과 敬虔의 모범이었다.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는 有價의 謙遜의 개념은 驕慢의 근원인 我執 (自我集中)의 掃滅을 통한 他我間의 圓滿 한 관계 大宇宙와 小宇宙의 調和를 뜻한다. 정치적 시각에서는 謙遜은 中央集權支配體 制의 유지를 위하여 적절히 요구되는 관리의 태도이었다. 官僚政治의 경우에는 下官의 ' 不遜'은 上官에 대한 권력의 纂奪의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관리들은 겸손해야 유교의 정 치적 이상인 '君君臣臣父父子子'의 상태를 이룰 수 있다.

儉素와 善政 (응렴의 '有勢而不用其威者')도 유교의 기본가치에 속한다. 유교의 聖君들 인 堯舜이 지극히 儉朴한 반면에 暴君들인 紂桀이 사치로 유명하였다. 유교도덕상 군주 뿐만 아니라 지배층에 속하는 賢人도 검박한 생활을 해야 하였다. 孔子는 그의 제자인 顔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어질다, 회여, 한그릇 밥과 한표주박 물을 먹으 며 더러운 거리에 살며, 다른 이들은 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거늘 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 지 않으니 어질도다! 회여". 이것은 바로 安貧樂道의 즐거움을 극찬한 것이다. 후세의 격언이 된 다음과 같은 말도 비슷한 뜻을 담고 있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정도로 얻음이 아니라도 버리지 말고 감수하라".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 던 賢者의 道의 또 하나의 일면은 富를 貴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부유하다고 해서 그 것을 즐기거나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유교윤리에 극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貧富에 대한 무관심과 貴賤의 靈的인 止揚은 현실을 超絶하는 士의 精神力을 보여주고 유교의 形而上的인 일면을 나타낸다.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서는 사치를 排擊하는 것은 지배층 의 寄生的 과소비를 철저하게 억제함으로써 剩餘價値의 收取의 규모를 정상화시키고 직 접생산자와 사회엘리트間의 갈등을 완화시켰다.

無名의 美行者의 善政에 대한 응렴의 찬양('一有勢榮而未嘗以其勢加人')도 역시 유교의 이상에 연유하다고 볼 수 있다. 儒家의 입장에서 볼 때는 君子가 有德하기만 하면 百姓 이 자진해서 복종하거니와 완벽한 治者는 被治者를 상대로 하여 세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强壓的 정치를 하는 것 자체가 治者의 不德함을 증명할 뿐이었다. 壓力에 의한 法治를 부정하고 敎化에 의한 德治를 내세우는 것은 法家와 논쟁하는 데 있어서 儒家의 근본입장이었다. 德治개념의 철학적인 의미는 물리력보다 精神力의 優越性을 확인하는데 에 있다. 또한 治世의 기본원리가 賞罰이 아닌 仁이라는 주장은 인간의 본유적 善良性에 대한 儒家의 확신을 반영하였다. 정치적 시각에서 볼때는 덕치에 의한 善政의 개념은 大 小의 정치적 집단 - 예컨대, 국가와 촌락 공동체, 중앙집권체제와 지방세력 등 - 間의 조화로운 相互補充的관계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또한 善政의 개념은 지방세력의 횡포에 대한 儒家의 우려도 담았다. 지방세력의 지나친 강화에 따른 王室統治力의 약화나 중앙 관리의 武斷政治나 다 똑같이 유가의 정치적 이상인 중앙 지방의 조화로운 관계를 벗어 난 것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응렴의 賢答이 유교적 정치이상의 發露라고 보면, 그 뜻을 두가 지로 이해할 수 있겠다. 첫째로는 응렴은 君子가 인간의 인습적인 自我集中, 貧富貴賤에 대한 차별의식, 그리고 물리력에 대한 依存心 등을 유교적 수양을 통해서 완전히 벗어나 야 된다는 유가의 철학적인 이념을 표현하였으며, 둘째로는 그는 국가의 지배체제의 유 지를 위하여 지배층이 四維(禮, 義, 廉, 恥)에 의거하여 자신의 권력욕과 財慾을 억제하고 중앙집권통치체제를 擴大 강화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정치집단(지방세력 등)의 利害도 고려해야 된다는 유교의 정치적 관념을 말해준다. 그 당시의 신라의 情況으로 미루어 보면 이 賢答은 중앙귀족의 再結合과 귀족들의 私田의 증가의 억제를 촉진하고 호족의 割據主義的 행위의 위협에 대하여 경종을 울렸다. 사실, 권력쟁탈전을 해 왔던 귀족의 족 벌들을 화해시켜 중앙귀족과 호족의 私的 收取를 억체함으로써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하대의 신라가 처해 있던 危機의 최선의 해결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이기동이 주장하듯이 景文王이 바로 이 정치적 노선을 취함으로써 많은 귀족의 반발을 일으켰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膺廉의 賢答이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기록한 見聞錄 이자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책의 方案이었다는 先學의 입장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한가지 의심점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보다 당시의 情狀을 더 정확하게 서술한 ≪삼 국유사≫의 관계기사에 의하면 헌안왕은 응렴에게 "優遊四方 見何異事"라고 물었다. 일 찍이 이능화는 "우리나라 사람은 道術이 있는 사람을 보면 異人이라 하는데, 異人은 뜻 이 좀 광범하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지하듯이 異人, 異事같은 표현은 儒家의 저서 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 잘 안 쓰이는 반면에 道家의 理想人物인 眞人(道士)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법이 있다. 그러면 응렴이 이야기한 美行은 道家的 색채를 띤 것일 수도 있 지 않는가?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삼국유사≫ 해당기사에 의해서 응렴이 첫째 美行者에 대하 여 '紉謙'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표현의 출전은 ≪周易≫이다. ≪周易≫의 一五 地山謙 卦의 六四는 '无不利紉謙'('이롭지 않는 일이 없다. 겸손의 덕을 펴리라')이라고 되어 있 다. 이 謙卦는 겸손하여 남을 존중함으로 남의 협조를 얻어서 大成할 수 있음을 뜻한다. '紉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던 응렴은 이 이념에 대한 자신의 동감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주지하듯이 "周易"은 儒 仙 兩敎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謙卦의 내 용은 특히 老子의 懦弱謙下의 사상 - 즉, 도가의 處世術 - 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인다. ≪周易≫의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응렴은 ≪周易≫에 통달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周易≫사상에 의해서 발전된 도가의 사상에 대해서도 관심 을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응렴의 賢答의 내용속에서 道家적 표현이 있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 자체가 도가사상을 포함하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물론 이 賢答이 매우 간단해서 그 내용의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 단정을 내릴 수 없다. 그래도 한가지 사 실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는데, 賢答의 내용과 ≪老子≫(≪道德經≫) 第67章의 내용은 거의 일치된 것이다. 老子의 '三寶'(慈, 儉, 謙)의 사상을 반영한 第67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노자)의 道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같다고 한다. 무릇 오직 크기 때문에 불초한 것같다. 만일 현명하려면 그 세소함이 오래였으리 라. 나에게 三寶가 있다. 保持하여 이를 보배로 삼는다. 첫째 이르기를 慈悲, 둘 째 이르기를 儉素, 셋째 이르기를 감히 천하의 앞장이 되지 않는 것. 자비하므로 능히 용기가 있으며, 검소하므로 능히 廣施하며, 감히 천하의 되지 않으므로 능 히 器量 있는자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고 하고, 검소를 버리고도 廣施하려고 하고, 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또 한 앞장서려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것이다. 대저 자비는 이것으로 싸우면 곧 이 기고, 이것으로 지키면 堅固하다. 하늘이 장차 이 자비로써 싸우려는 자를 구하 고자 자비로써 이를 지킨다".

老子가 말한 三寶와 膺廉이 말한 三美行은 전적으로 合致된다. 첫째 美行者가 드러낸 謙遜('不自先 而處於下')과 ≪도덕경≫의 謙('不敢爲天下先'), 둘째 美行者가 드러낸 儉素 ('衣儉易')과 ≪도덕경≫의 儉, 셋째 美行者가 베푼 善政('不用其威者')과 ≪도덕경≫의 慈, 다 같은 사상을 나타낸다. 응렴이 말한 美行者들이 貴하고 세력있고 부유한 爲政者들 이었다. ≪老子≫ 第67章에서 말한 三寶의 德을 가진 자도 남을 統率할 만큼 겸손하고 자비스로운 聖人主權者이었다. 지배자의 덕목을 서술한 점에서 賢答과 ≪老子≫는 일치 된다. 이러한 德量을 가지는 것이 통치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老子 ≫ 第67章의 論旨다. 그러면 膺廉은 美行者의 善行으로써 老子의 三寶를 類推한 것인가?

이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膺廉이 표방하였던 謙虛, 慈悲, 儉素의 사상이 道家의 핵 심이념이었다는 사실이다. 老子는 인간이 無知 無慾 無道德의 자연상태로 돌아와야 한 다(歸根復命)고 주장, 그러한 상태에 가장 가까운 것이 驕慢尊大한 男性이 아니라 懦弱謙 下한 女性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의 나약함의 원리를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물과 비교하여, 聖人統治者의 처세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江海가 百谷의 왕인 까닭은 그것이 진실로 겸하함으로써 능히 백곡의 왕인 것 이다(中略). 백성의 앞에 서려면 반드시 몸으로써 이의 뒤에 선다(中略). 누구하 고도 싸우려하지 않으므로 천하에 이와 능히 싸울 자가 없다".

도가사상에 있어서는 謙下가 정신의 이상적 상태인 無慾의 屬性이었다. 물이나 여성이 나 갓난아이처럼 柔順해야 천하를 다스릴만한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도가의 근본사 상이었다. 膺廉이 겸허한 美行者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도가사상체계에 있 어서의 謙下의 핵심적 위치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욕심없고 부드러운 聖人은 사치함으로써 자신의 富를 과시할 리가 없다. 老子에 의하 면 儉素도 이상적 統治者의 중요한 특징이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는 색(嗇; 儉素한 것)만한 것이 없다. 오직 嗇한 것, 이것을 早服, 즉 일찌감치 道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한다(中略). 나라를 보유하는 어머니, 즉 嗇은 나라를 장구하게 한다".

사치의 否定의 또 하나의 근거는 老子의 辨證的인 논리, 즉 兩極의 歸一의 원리다:

"貴는 賤으로서 근본을 삼고, 高는 下로서 기초를 삼는다. 이리하여 侯王은 자 신을 孤寡不嘣이라고 부른다".

"重은 輕의 뿌리요, 靜은 躁의 임금이다".

그런 논리에 따르면 貧과 富도 상대적이고 상호연관된 개념이거니와 貧을 부끄러워하 고 富를 과시할 이유가 없다.

膺廉이 말한 셋째 美行者의 '未嘗其威加人'의 자비스러운 태도도 老子의 사상에 근거 를 둔 것같다. 피지배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자연을 따라가는 無爲君主에 대하여 老 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聖人이 위에 있어도 백성이 무겁다고 하지 않으며, 앞에 있어도 백성이 방해한다고 하지 않는다".

"(...) 聖人은 자기가 方正하다고 해서 남을 절단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염결하 다고 해서 남을 깎지 않는다".

영향력을 가지면서도 이를 발휘하지 않는 美行者를 찬양한 膺廉은 '太上下知有之'의 사상에 의거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膺廉의 賢答의 주인공은 道를 體得함으로써 謙下 儉素 慈悲의 賢德을 얻은 無爲自然의 統治者라고 볼 수 있는 것같다. 또한 ≪三國史記≫ ≪三國遺事 ≫의 해당기사에서 膺廉과 道家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몇가지의 글귀가 있다.

첫째, ≪三國遺事≫ 四十八代景文王條에서 膺廉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일찍이 왕의 寢殿에는 날마다 저녁만 되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宮人들 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이를 쫓아내려 했으나 왕은 말하였다: '내게 만일 뱀이 없 으면 편하게 잘 수 없으니 쫓지 말라'.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이 혀를 내밀어 온가슴을 덮고 있었다".

이 전설은 아마도 東西의 원시종교들의 공통점인 地神으로서의 뱀의 숭배에 뿌리 박 혀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道家的 모티프도 없지 않은 것같다. 왜냐하면 景文王이 뱀에 안 물리는 것은 道敎의 眞人이 뱀이나 벌, 맹수에 안 물린다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 다.

둘째, 膺廉이 國仙이었을 때 '游學' 내지 '優遊四方'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여 기에서 '遊'를 見學을 위한 실제적 지방유람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가사상체제 에서 '遊'의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도가의 '遊'는 신비주 의적이고 형이상적 심리학적인 뜻의 극히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俗事를 떠나고 修 行하여 진리를 터득하는 일종의 求道行爲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下代의 花郞 인 膺廉의 유람은 진리탐구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가 탐구하였던 진리는 도가의 無爲 無我가 아니었나 싶다.

셋째, ≪三國史記≫ 해당기사에 의하면 膺廉은 美行者의 행실에 대하여 '善行'이라고 말하였다. 주지하듯이 '善行'같은 표현은 儒 佛의 경전에서 긍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 이다. 그런데 善惡을 초월하는 道를 궁극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道家도 善行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도가의 윤리개념을 倫理相對性論(moral relativism)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도 없지 않으나 道家는 善行을 求道者의 최후목표로 보지 않았을 뿐, 修行과정에서 반드 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精進의 일정한 수준 - 즉, 無我의 境地 - 도달하면 만물에 대한 주관의식과 善惡意識이 저절로 止揚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膺廉이 말한 善行을 儒敎的, 또는 佛敎的 행실로 볼 수도 있지만 仙家의 求道 者의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膺廉의 현답을 내용상, 또는 표현상 도가철학의 발상으로 볼 수 도 있다. 또한 여러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老壯思想은 6세기 초엽부터 신라에 유입하여, 결국 7-9세기의 상류층의 교양의 필수적인 일부분이 되었다. 그래서 王族 膺廉도 적어 도 道家哲學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고, 이에 대한 깊은 조 예도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膺廉의 賢答을 듣고 있었던 왕과 群臣들도 道敎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賢答이 내포하는 이념은 도가사상을 방불케 한다 해도 이 賢答과 유교사상 의 관계도 부정할 수 없는 것같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응렴이 儒 仙의 經典을 직접 인 용하지 않고 이 경전의 정신과 符合되는 실천적인 善行의 例를 나열하였던 것이다. 아마 膺廉이 가장 重視하였던 것은 儒 仙 兩家의 特殊性보다 이 兩家의 철학의 底邊에 깔려 있는 普遍的 道德性 (Universal ethic), 그리고 철학의 이론보다 實踐倫理이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儒 仙의 윤리관들은 일정한 차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근사하였다. 국가의 강화와 사회의 안정을 期하엿던 膺廉은 지배층의 여러 족벌의 集團利己主義를 制御하기 위하여 새 가치관을 모색하면서 儒 仙의 경전을 같이 참고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 한 <智證大師碑>에서 景文王에 대하여 '三敎를 융합하였다' ('心融鼎敎')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같다. 결국 응렴은 儒 仙의 經書를 똑같이 '漢學'으로 공부하며 專制王國의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兩家의 倫理의 實踐 ('美行')을 장려하였던 것으 로 보여진다. 膺廉의 賢答을 중국사상의 영향에 의해서 구체화된 국가를 위해서 필요한 德目의 나열로 봐도 무방한 것같다.

Ⅳ. 結 語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三國遺事≫ ≪三國史記≫해당기사에서 求道者이자 정치가로서 의 膺廉의 모습은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淨化에 精進한 동시에 몰락되어가는 下代의 사 회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도덕위주의 가치관을 모색하였다. 결국 그는 國仙으로써 해야 할 修行('遊')의 과정에서 謙下 儉素 慈悲의 진리에 도달하였다. 응렴은 이 진리를 儒 仙의 著書에 의거해서 표현하였는데 철학적 이론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하였다. 시험의 성격을 가졌던 憲安王과의 問答에서 응렴은 파벌투쟁을 일삼았던 지배층이 이 도덕적 진 리를 터득하여 인생철학으로 여겨야 사회가 안정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왕과 群臣이 이에 찬성하여 膺廉을 '合格'시킴으로써 그가 왕의 長女와 宰相의 관직을 얻어서 얼마 후에 왕좌에 앉게 되었다. 儒 道敎의 진리를 消化할 정도로 漢學에 精通한 膺廉은 즉위 이후에 유교적 專制主義의 이상에 입각하여 中事省 宣敎省과 같은 近侍機構, 瑞書院 崇文臺와 같은 文翰機構의 擴張의 정책을 통하여 王室權力의 강화를 꾀하였다. 老壯의 道德論과 儒家의 倫理論은 서로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음을 考慮에 놓으면 道家思想 에 대한 膺廉의 관심과 그의 儒敎政策은 결코 모순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膺廉 은 儒 仙이 共有하는 도덕적 진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見聞을 분석함으로써 신라의 지배 층에게 윤리적 교훈을 주었다. 이념의 한계를 넘어서 근본적인 진리를 파악한 점과 이론 보다 실천을 앞세우는 점은 膺廉의 賢答의 特徵이었다.

이 賢答과 圓光의 '世俗五戒'는 일정한 同質性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兩者는 中央集 權的 專制王國에게 절실히 필요한 덕목을 나열한 것이다. 다만 '臨戰無退'같은 尙武的 덕 목은 國運이 걸린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中代의 신라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謙下와 儉素를 강조하는 것은 豪族의 跋扈의 시대인 下代의 신라에게 필요하였다. 兩者는 중국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으나 하나의 구체적인 이념을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윤리 도 덕에 중점을 두었다. 圓光과 膺廉은 '眞理에 목마른' 求道者이었으면서도 국가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當代의 中央貴族의 支配의 精神的 理念的 기반을 확고히 하는 데 일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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