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 일하던 서울의 김&장 법률사무소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진 임용택(34)씨는 지난 1월 미국 MBA(경영학석사) 유학길에 올랐다. 공인회계사로 기업 인수·합병(M&A) 업무를 맡고 있던 그는 다국적 기업을 상대하면서 MBA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식 경영 노하우를 모르면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컬럼비아大 경영대학원 1학년인 임씨는 “크고 작은 M&A를 겪으면서 경영의 글로벌 표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말한다.
임씨는 퇴직을 ‘선택’했지만 윤영수(30)씨는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가 근무하던 LG반도체는 현대전자가 인수하기로 ‘빅딜’이 이뤄졌다. 직원들은 현대전자에서 데려가기로 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불안한 신분이 견디기 어려웠다. 윤씨는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나온 동료 5명중 4명이 경영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뉴욕大 경영대학원(스턴스쿨) 1학년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MBA에 도전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구조조정과 연봉제 도입 등으로 전통적인 직장문화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확실한 ‘주특기’없이는 직장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이들의 미국행을 부추기고 있다. 또 수십억 원대 연봉을 받으며 금의환향하는 선배 유학생들도 이들을 자극하고 있다. 외국계 회사에서 출세한 고액 연봉자들의 이력서엔 어김없이 MBA 타이틀이 붙어 있다. 헤지펀드의 황제 조지 소로스가 발탁한 서울증권의 강찬수 사장이 좋은 예다.
뉴욕大의 프리드릭 최(56) 경영대학장은 “한국 기업에 선진 경영기법이 도입되고 외국 기업의 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감각을 갖춘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라고 분석한다. MBA 유학생의 증가는 한국 경제의 체질 변화라는 큰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대체 얼마나 늘었을까. 서울의 유학 알선업체인 JC MBA 컨설팅의 목영두 대표는 “실제 유학생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상담 건수는 예년에 비해 20∼30% 가량 늘었다”고 밝혔다. 특히 준비 안된 초심자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으며, 심지어 대기업 간부 출신의 중년층이 가능성을 문의해오는 등 연령도 40대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톱 비즈니스 스쿨 클럽’을 조직, MBA 유학전문 웹사이트(www.tbsc.org)를 개설한 김수민(30·컬럼비아大 경영대학원 1학년)씨도 “IMF 체제 이후 조회 건수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같은 클럽에서 펴낸 ‘TOP MBA로 가는 길’(황금가지刊)은 서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한국의 유학업계는 지난해 1천5백∼2천 명 정도가 MBA 유학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통상 MBA 유학을 위해서는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 Test)·토플·에세이 등을 준비하는데 1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올해부터 본격적인 증가가 예상된다.
실제 김수민씨에 따르면 스탠퍼드大 경영대학원의 경우 예년 한국인 유학생이 2∼3명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10명이 입학허가를 받았다. 또 펜실베이니아大 워턴스쿨은 평소 10여 명 안팎이던 한국인이 20명으로 늘었다. 워턴스쿨은 특히 한국인 학생 유치에 적극적이다. 홍보책임자 마이크 볼츠는 “지난 4월 말 MBA 담당자가 서울을 방문했고 오는 6월 다시 서울에서 입학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 교육통계센터(National Center for Educational Statistics)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는 8백여 대학에 MBA 과정이 개설돼 연간 10만 명 정도의 경영전문가를 배출하고 있다. MBA는 특정 직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1년제 과정과 보편적인 2년제 과정으로 나눠지지만 한국에서 MBA 유학이라면 통상 2년제를 가리킨다. 어느 쪽이든 목표는 기업 리더의 양성이다.
따라서 일반 대학원과는 달리 이론보다 경영실무에 초점이 맞춰지며 교수진의 태반이 현역 기업인들로 채워진다. 수업도 토론과 발표 형식으로 이뤄지며 논리와 자세가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2년 과정을 마치면 경영실무는 물론 외국어·대인관계,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는다는 게 MBA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미국 경영대학원은 외국인의 입학에 비교적 우호적이다. SK케미칼을 그만두고 지난해 유학으로 진로를 바꾼 박성용(34·뉴욕 로체스터 경영대학원 2학년)씨는 “경영대학원은 국제적인 경영전문가 배출을 목표로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외국인 학생의 비율이 평균 30%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미국 자본주의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경영대학원이 외국인에게 학비까지 너그러운 건 아니다. 더구나 환율은 2∼3년새 다락처럼 올랐다. 아이비리그 등 톱10 경영대학원의 경우 학비·생활비 합쳐 한해 5만 달러, 2년에 10만 달러(약 1억2천만 원)는 각오해야 한다. 비교적 싼 주립대 경영대학원도 2년간 7만 달러(약 8천4백만 원)는 들어간다. 4∼5년 직장생활 마치고 퇴직금 받아봤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외국인 학생에게 장학금은 하늘의 별따기다. 학자금 융자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보증인을 세워야 하는 등 까다롭기 짝이 없다. 공부할 시간도 빠듯한 판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댈 엄두도 못낸다.
뉴욕 맨해튼 교육(MEI) 유학원의 강일서 사장은 “많은 유학생들이 살던 집을 전세 놓고도 모자라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이러다 보니 MBA 유학생들에게선 일부 유학생에게서 보이는 방탕한 생활을 찾아보기 힘들다.
학비가 얼마나 부담이 되는가는 회사의 지원이 있어야 입학할 수 있는 고위 경영자과정(Executive MBA)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기업에 구조조정 태풍이 몰아치면서 컬럼비아大에는 아예 한 명도 없고 뉴욕大에는 이성재(52·성풍종합가스) 사장이 유일하다. 뉴욕大의 경우 1년 학비만 4만2천 달러(약 5천만 원)인 이 과정은 MBA와 마찬가지로 GMAT·토플 등의 시험을 치르며 졸업하면 MBA 학위를 받는다. 뉴욕大 경영대학원에서 회계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토니 셰는 “지난해부터 회사의 지원을 받는 한국인·일본인 유학생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큰 돈을 들일 만큼 MBA ‘자격증’이 가치가 있는 걸까. 강일서 사장은 “2년 정도 고생하고 나면 한국 경기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또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한 유학생은 “학위를 딴 뒤 다국적 기업에 입사하면 보너스를 포함한 초봉이 평균 13만 달러(약 1억5천만 원)에 달하기 때문에 1년 안에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한다. 미국 경제와 증시가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어 이들의 기대감도 한껏 부풀어 있다.
그러나 연봉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誌의 98년 통계에 따르면 톱10에 꼽히는 노스 웨스턴大 켈로그스쿨은 졸업자 평균 초봉이 12만 달러, 취업률은 1백%에 가깝지만 40위권 학교의 경우 초봉은 절반 수준에 취업률은 90% 안팎에 그쳤다.
영어가 달리는 유학생은 사정이 더 어렵다. 뉴욕 엘리트유학원의 제인 리씨는 “한국인 1.5세나 2세들은 취업이 쉽지만 유학생들은 대부분 졸업 후 짐을 싼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초단위로 거액을 주무르는 막중한 업무를 맡기기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미흡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국인을 왜 고용하려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이민당국도 미국인 고용주에게 부담이 된다.
귀국하면 10만 달러대 초봉에 대한 기대는 일단 접어두는 게 속 편하다. 일부 고액 연봉을 제시하는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계 컨설팅·금융회사가 있긴 하지만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컬럼비아大의 김수민씨는 “귀국 유학생중 그런 기업에 입사하는 비율은 20% 정도에 그칠 것”으로 추산한다. 결국 나머지 80%는 기대만큼 소득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공부 때문에 최소한 2년 동안 돈 한푼 벌지 못하는 기회비용도 따져봐야 한다.
JC MBA 컨설팅의 목대표는 “MBA 학위가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며 “출세보다는 향후 20∼30년 미래를 위한 장기투자로 봐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미국에서 MBA 학위를 딴 뒤 한국 장기신용은행과 일본 채권신용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했던 염운환(37·네브래스카大 경영대학원)씨는 더 단호하다. 그는“MBA 학위는 입사용 증빙서류에 불과하며 특별대우는 없다. 연봉은 실적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실적이 나쁘면 톱10 스쿨을 나온 ‘학벌’도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그는 MBA 유학을 “말리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제인 리씨는 “연봉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일에 전념하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1차에서는 학교와 평점을 보지만 2차에선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고 덧붙였다.
뉴욕大의 최학장은 “한국 학생들끼리 어울리기보다 그룹 활동 등을 통해 대인관계의 폭을 넓히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또 “외국인이 삼성이나 현대에서 하루 아침에 요직을 차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서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학장은 조부모가 1898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3세다. 한국인이 미국의 주류 엘리트 양성기관인 뉴욕大 경영대학장이 되기까지 1백 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졸업 후 MBA 유학생의 값어치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있다. 어느 회사에서, 얼마를 받고 일하든 이들이 한국 경제의 글로벌화를 앞당기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란 점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