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곽재식이 아니고, 곽재식도 내가 아니다. 극중 등장 인물의 이름을 짓기가 뭣하여, 그냥 내 이름을 사용했다. 안티아 역시, 나의 친구 안티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글은 애초에, 과기원 문학상에 내려고 쓰기 시작했으나, 아시다시피, 나는 지난 여름에 졸업해 버렸기에, 그냥 바로 공개한다.)


아더왕과 원탁의 탐정들


"에스트로페아다"

"썩었다"라는 말이었다. 웃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곽재식은 가차 없이 예의 스페인어로 말했다. 굳이 스페인어로 말한 것은 좀 꼴사납게 생각되지만, 내용에는 나도 동감한다. 별로 따질것도 없다. 애초에 영국식 고급 코스 요리란 것은, 모순, 검은 백조, 눈부신 어둠, 소리 없는 아우성 혹은 웰빙 버거 와 비슷한 말이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영국 요리란 것은 대체로 한심스럽다.

우리는 - 정확히 말해서 빳빳한 파운드화를 날려버릴 장본인인 나는 - 세인트 존스 우드에서 가장 그럴듯한 레스토랑에서 가장 멋들어진 요리를 주문했지만, 그래봤자 맛없는 영국 요리였다. 그나마 스코틀랜드 요리라고 나온 도버 솔이 레몬 즙만 떡칠을 해서 생선 맛을 거지같이 작살낸 것을 확인하자 우리는 완전히 포기 했다. 하기야 런던에서 맛난거 먹자고 하고는 먹는게 도버 솔이라니, 한정식집에서 와서 덴뿌라 우동을 시켜먹는 것이나 진배 없다.

곽재식의 옆에 앉아 있던 안티아도 조심조심 한점 떼어 먹더니 포크를 손에서 놓았다. 안그래도 입에 맞는 음식이 잘 없는 이 인도 아가씨는 워낙에 먹는 음식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한편 내 맞은 편에 앉은 또 다른 한 사람, 그녀의 반응을 살펴 보았다. 뭐든 맛있게 잘먹는 편인 그녀라서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래서야 돈값의 십분지일도 못하리란 것은 내 스스로 짐작하고 있다.

벌써 십년 가까이 전에 룸메이트였던 아르헨티나놈 - 곽재식 말이다. - 이야 어찌 되던 상관 없고, 먹는 음식의 8할이 바람인 당최 뭘 먹질 않는 인도 아가씨는 포기했으니, 그녀의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그러나 영국에 와서 음식에 돈을 쓰는게 아니라는 교수님의 말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어, 나 인사좀 하고 올께요."

그녀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잠시 테이블을 떠났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곽재식은 나를 보더니 싱긋이 웃었다.

"말해라."
"뭘?"
"너 아까 그 아가씨 좋아하는거."
"뭐? 무슨, 무슨 말 하는 건데."


곽재식놈은 뒷부분은 안티아가 못알아듣게 하려고 스페인어로 말했다. 아모르 꼰 세뇨리따 어쩌고 하면서.

나는 놈이 "세뇨리따"라고 발음할 때 상당히 듣기 싫다. 거기에는 어떤 나를 비웃는 듯한 묘한 느낌이 있다. 부모님이 아르헨티나 이민이기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기에서 산 녀석은 스페인어와 영어를 곧잘 했다.

공교롭게도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졸업했던 나는 그럭저럭 놈과 스페인어로 말이 통했다. 그리고 토플점수는 나도 혹독한 수능 외국어 영역식 공부로 곽재식과 엇비슷하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포츠 댄스 수업시간에 중학교때 탱고를 배웠다면서, 어여쁜 여학생과 시시덕거리는 놈의 모양새는 나와 맞지도 않았고, 나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좀 배알이 뒤틀리긴 했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오자마자 그놈과 같은 방 룸메이트가 된 것은 스페인어 네 글자만 서류에서 확인한 학생 생활팀 직원 영감의 멋진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엘 디오스.

"그 아가씨한테 니 마음을 전하라고."
"야, 뭔소리하냐? 내가 왜 걔한테, 뭘, 또 무슨 마음이 있는데."
"맞잖아. 너 영국에 왜 왔냐? 나 보러 온 건 아닐거 아냐."
"내가 니놈을 뭐하러 보러 오냐."
"사실 너한테 의리라는 게 있었다면 이 만리타국까지 돈벌러 온 친구를 한 번쯤 친선 방문 할 수도 있는 거였지."
"학회 때문에 온거야."
"식물학회야 이탈리아에서 지난 봄에 열렸던 것도 있었는데?"
"이번 학회에 노벨상 받은 헨리 캐멜먼 박사 기념 강연을 한데잖아, 내가 원래 헨리 캐멜먼 박사 팬이거든, 그 사람이 말야..."
"헨리 캐멜먼이 아니라, 해리 케멜먼이란다. 뭐가 팬이냐? 불쌍한 크레타인이여."

나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까 해리 케멜먼이 맞다.

"그건 다 핑계고. 사실은 바람처럼 짠하고 나타나서 아까 그 아가씨한테 멋있는 모습 보여주려고 그랬던거지? 그래서 괜히 폼잡고 발표까지 한다고 논문까지 서둘러 코피터지게 출판시킨거 아니냐?"
"자, 헛소리 그만하고. 영국 본사 근무는 할만하냐? 학위 받고 나서 너처럼 보험회사 컨설턴트 쪽으로 취업하는게 쉽진 않겠지?"
"젊은이가 이 긴긴 겨울밤에 다국적 보험회사 이야기만 하면 쓰겠냐.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무슨주제?"
"사랑의 애절한 영혼."
"놀고 있네."
"한참전에 직장 옮긴 그 아가씨 보러, 그 아가씨 지금 있는 곳까지 괜히 기차타고 몇 시간 동안 가기는 어색했겠지. 그래서 갑자기 뭐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 아가씨 얼굴보고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부질없는 짓처럼 느껴졌겠지. 그래서 궁금해도 한동안 계속 연락끊고 지냈겠지. 그러다가 학회 핑계로 그 아가씨 만나러 여기 온거지?"

놈은 집요했다. 아... 내가 왜 저런놈과 엮여 들었던가. 청소년 시절이 끝나자마자 저 놈과 2년동안 룸메이트로 지낸 것은 저주의 피비린내나는 서곡이었다. 그 피비린내는 거의 선지국 수준의 냄새였다.

나는 저놈한테 "밤마다 술마시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묵시록적 의미"라는 이야기를 허구헌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괜히 나는 거기에 휩쓸려, 시간 날리고 돈 날리고 몸 망치고, 얼마나 술을 퍼먹었는지 모른다. 그러는 한편 여기저기서 스캔들을 일으키며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숨어다니는 놈에게 갖은 편의를 다 제공해야 했다.

학부 때 이런 농담이 학교에 돌았던 적이 있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남자
3위 - 우리 학교 남학생
2위 - 우리 학교 대학원생인 남학생
1위 - 곽재식."

다만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 놈은 열역학의 마법사라 불리우며, 온갖 종류의 열역학과 그 응용에 능했고, 가끔 신비로운 솜씨로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풀어주고 홀연히 사라지며 폼을 잡았다.

놈은 어떤 문제든지 분석과 추측 그리고 짜집기에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여기저기 전화하고 돌아다니면서 돈도 어디선가 곧잘 벌어서 가끔 기아와 빈곤에 신음하는 대학원생인 나를 구제해 주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놈은 나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 나 스스로도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곽재식의 말은 사실 맞았다. 한 달 동안 교수님께 별별 공작을 다펼치고, 반도 완성 안된 논문을 발표하려고 며칠씩 밤을 새며 가다듬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졸업하기 전에 국제 학회에서 발표 경력을 쌓기 위해서 였다. 핫핫핫. 소가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자기 세뇌용/대외 선전용 이유였다. 그런 이유를 몇 달동안 계속 되뇌이는 동안에도, 나는 이곳 런던에 오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굳이 애비 로드까지와서 이런 레스토랑에서 내 주도로 연구비 카드를 긁을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연구비는 회식비로 쓰기가 제일 쉽다지만.

"에휴-."

나는 놈의 말을 인정하는 뜻으로 한숨을 쉬우며 한 번 피식 웃었다. 놈은 만족스러운 듯 자기도 웃더니 - 저 웃음도 참 마음에 안든다. - 이번에는 안티아도 들으라는 듯 영어로 말했다.

"She loves you."

나는 "픽" 웃으며 "쳇"하고 같잖다고 곽재식을 비웃어줬다.

"Yeah~ Yeah~ Yeah~"

나는 멜로디까지 넣어 흥겹게 대구를 지어 놈을 조롱했다. 지가 누구를 언제 봤다고 저렇게 장담하는가. 전형적인 곽재식 수법이다.

놈은 내가 무슨 연애 비슷한 것에 휘말릴 기미만 있으면 일단 부추기고 보았다. 내가 흥분해서 정신없어하며 초조해하는 모습과 빠른 극전개를 재미있어 하며 영화 보듯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나는 놈의 DVD가 되고 싶지 않다. 애비 로드의 저 수많은 행인과 관광객과 자동차들이 이쪽을 보고 코러스로 "예~예~예~"하고 비웃어줘도 모자랄 판이다.

"진짜야. 그 아가씨도 너 좋아해."
"니가 그 아가씨를 언제 봤다고 그러냐? 뭘 안다고. 말도 두 마디도 안해봤잖아."
"지금 밥먹으면서 봤잖아. 원래 부모 눈이랑, 좋아하는 마음이랑,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 증가 법칙은 속일 수 없는 법이지." (저놈은 꼭 저렇게 재수없게 과학자 티를 한 번씩 낸다.)
"걔가 좋아한다고 저널에 논문이라도 써냈냐? 또 전형적인 곽재식 수법이야. 괜히 사람 죽도록 부추기고."
"아니 진짜 제대로 알 수 있다니까 진짜."
"아무 근거도 뭣도 없이, 그냥 우기고 듣기 좋은 말로 사람 일단 부추기기만하지. 썩은 놈."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만 있다해도 그 사람 앞에서는 뭘 해도 어느 정도는 표시가 나는 거야."

그는 어느덧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곽재식놈은 진지하고 중후하게 말하면 의외로 목소리는 좀 좋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잘 속는다. 더군다나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는가? 듣기 좋은 말은 사실 듣기 좋다. 나는 어느새 놈의 말에 아닌척 하면서 살짝 관심을 갖게 되었다.

"뭐가, 어디에서 표시가 나는데. 인제 여기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침 묻은 포크에서 침 모아서 확대 사진이라도 찍어보련? '물은 답을 알고 있다'냐?"
"그래, 그거 좋네. 여기 이 포크랑 나이프가 사랑의 우체부 아저씨가 되어 주네."
곽재식은 우리들의 대화를 흥미있게 듣고 있던 안티아에게 한 번 웃어주더니, 괜히 "Look at that..." 어쩌고 하면서,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뭘 막 설명해 줬다. 그리고, 잠시 빤히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나는 그 놈이 그러면서 다시 나를 부추기는 수작을 펴는 것을 보자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무슨 포크랑 나이프랑 앉은 자리만 보면 사랑의 영혼이 데미 무어냐?"
"항상 정황과 환경이 중요한 거야. 정황과 환경. 정황과 환경을 잘 따지면, 아무리 사소한 근거에서도 많은 사실을 알 수가 있는게 또 과학의 묘미아니겠냐."
"보험회사로 취업한 놈이 말이 많다."
"그러나, 어쨌거나 사실이 말을 한다. 포크랑 나이프. 앉은 자리의 모습이 충분히 근거가 될 것이오."
"정말 그걸로 충분하냐? 하다 못해 관상이나 손금이라도 좀 봐야 사랑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쓸데 없는 미신 같은 거 내가 제일 싫어한다. 손금을 보느니, 차라리 냅킨 얼룩을 자세히 보는 편이 그 아가씨의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 수 있다니까."
"어림없는 소리마라. 헛소리다."
"어네스트 마스덴은 금박지 앞에다가 돌 갖다 놓고 원자 구조를 밝혀냈잖어. 그것도 백년 전에."
"가이거가 섬광계수 장치를 잘 다룰 줄 알았던 데다가, 지도교수가 러더포드였잖아."
"하지만, 우리는 애정관계의 줄다리기를 잘 다룰줄 아는 데다가, 여기 곽재식이 지도하고 있지 않니."
"집어쳐라."

짜증스레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곽재식이 헛소리를 하면서도 워낙 자세히 그녀의 자리를 보고 있었기에, 더군다나 그 태도가 자뭇 차분했고, 진짜 애써서 힘들여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엿보였기에, 나도 놈을 따라 그녀의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스코틀랜드식 넙치 요리를 벌써 반도 더 먹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두 개의 나이프와 세 개의 포크는 가지런히 있던 자리에 있었다. 그 중 가운데 것에 소스가 좀 묻어 있었다.

채소에서 떨어진 초록색 부스러기 조금과 전채로 나왔던 굴 소스가 흘려져 있었다. 좀 수다스러운 듯 해도 항상 경쾌하고 누구와도 잘 친해지는 그녀의 분위기가 왠지 빈 자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항상 쓰는 가볍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살짝 남아 있었다. 그 향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지 몇 달이 지났건만 여전했다.

"우선, 우리는 이 아가씨가 밥을 빨리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럼 다이어트에 지장이 있을거고. 오호라! 나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는 논리로 바로 명쾌하게 연결되네!"

곽재식은 나의 이죽거림을 무시하고는 계속 영어로 말했다.

"그리고 프랑스식으로 서빙된 이 요리에서 테이블 매너를 제대로 지키고 있지. 두번째 포크를 도버 솔 먹는데 사용했으니 딱 떨어지고. 파슬리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는데, 포크에는 없잖아. 그러니까 파슬리는 손으로 집어먹었을 가능성이 크고... 우리의 가련한 컵라면 매니아께서는 전채 파슬리를 먹을 때도 우아~해 보일 줄 알고 포크를 사용하셨지요?"
"쓸데없이 테이블 매너 따지는 놈들 내가 제일 싫어한다."
"그랬거나 말거나 너는 이 아가씨를 좋아하고, 이 사람은 테이블 매너를 제대로 알고 있단다, 친구야. 따라서 테이블 매너 교육을 엄격히 따지는 좀 독특한 요리사 같은 집안의 아가씨거나, 아니면 호사스런 상류층 따님이시거나, 아니면 잘나가는 수재로 이런 류의 저녁 모임에 자주나가는 전문직 종사자거나 셋 중 하나겠지."
"말은 되네."
"그 중에서 영국까지 학회에 올 사람이면, 적당히 잘 사는 집안의 딸로, 꽤나 잘나가는 이공계 계통의 수재의 교집합일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고."

그리고 곽재식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 봤다.

"연배는 너와 비슷한데, 너와 현재 오랫만에 만나는 상태인 것으로 보아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식물학회인데 참가했다는 점을 생각할때, 의사, 약사일 가능성이 크겠네. 이 때, 너네 교수님 전공분야를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식물로 무슨 약을 만든답시고 아마 사람 고용한 적이 있었겠지. 그렇다면 학교 식물학 연구실에서 임상 실험을 하지는 않을테니, 의사보다는 약사겠고."

곽재식놈은 내 기억을 후벼팠다. 그녀에 대한 기억. 나는 왠지 이상하게 부끄러우면서 뭔가 들키는 듯한 느낌에 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놈의 말을 계속 들으며 그녀가 처음 학교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처음 그녀는 식물학 전공 약리학팀에서 채용한 약사들 중 한 명으로 학교에 들어왔다. 재잘재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잘하고, 가끔 장난스런 표정으로 크크크 하고 웃으면서 등짝을 확 후려치기도 하는 그녀의 친밀함은 삽시간에 그녀를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주 실력있는 약사였고, 실험에 몰두할 때는 꼭 고등학교 3학년 짜리 모범생 견본 마냥 밤새 꼼꼼히 책상앞에 달라붙어 있었다. 겉으로는 순대파는 아줌마 같았지만, 속으로는 소심하고 착해빠진 십자수 강사 같았다.

많은 사람들과 친해진 그녀였지만, 오히려 나는 그녀와 처음엔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때가 내 박사 6년차 시절. 원래 박사과정에서 연차초과자로 세월속에 묵어 가고 있는 학생의 처지란 말할 수 없이 외롭고도 고달프다. 나는 한 학교에서 10년을 넘게 살아오며, 내 20대를 거진 학교에 들어 바쳤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외지에서 들어와서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학교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새 친구들을 만든 그녀에게 질투 비슷한 반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연차초과자란, 주변의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후배들이랑 놀기에는 칠칠맞지 못하고, 선배들이랑 놀면 너무 영감스러워서 짜증나는 그런 외롭고 심심한 신분아니던가.

그런 그녀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우리 교수님 프로젝트의 전담을 맡고 부터였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우리 연구실로 출근했고, 나는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은 방에서 일하며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것은 대단히 긴 시간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부부라 하더라도 그렇게 오랜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항상 같이 있었다. 서로 아무말도 안하고 면벽 수도만 했다고 해도, "벽지 색깔이 별로 안예뻤어요." "허허, 오른쪽 벽으로 바퀴벌레 기어갈 때는 끔찍했지요." 같은 말을 하며 정답게 지낼만큼 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자기가 실험을 하게될 "양송이 버섯의 포자 운반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사실, 세상에 양송이 버섯 포자 운반체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야겠다고 굳이 마음먹는 사람이란 별로 없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다가 식물학도가 된 나는, 내 전공이 그것으로, 3년째 그것만 파고 있는 이상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와 양송이 버섯과 그 포자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이런저런 농담을 곁들여 세포내 운반체에 대해 가르쳐 주면서 깔깔 웃고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말하기 좀 이상하긴 해도 사실 그랬다. 양송이 포자로 농담을 하며 정이 들다니.

"길고 검은 머리칼에 제대로된 향수를 쓰네. 이공계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멋내고 다니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면서도 이 아가씨는 감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아마 처음에는 그냥 좀 친하기만 했다가 어느 날 어떻게 뭔가 시작되었겠지."

곽재식은 그녀 자리에서 향수 냄새를 맡고는 그렇게 말했다. 곽재식은 프랑스어로 된 무슨무슨 향수 냄새라고 했는데, 아마 그것은 뻥일 가능성이 크다. 놈은 내가 향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대강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확실히 아는척해서 자기 말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것일 게다. 그러나 알면서도 나는 또 걸려들었다.

그녀는 꼭 해리포터나 쓰고 다닐것같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맨날 서푼어치도 안나오는 농담을 꼭 깻잎머리 여고생처럼, 실제 머리모양도 거의 그 분위기로, 높은 소리로 말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녀는 그래서 꽤 친해진 후에도 사실 별로 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때는 사박사박한 목소리가 신비로운 키가 큰 아이와 같이 다녔고, 대학에 들어와서 1학년때는 명문대학생의 헛된 망상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나름대로 소개팅에서 이쁘장한 옆 학교 학생과 사귀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 인생의 방향을 U턴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웬수같은 아르헨티나 태생 화학공학 전공 보험회사 직원, 곽재식놈이었다. 지난 무더운 여름날, 놈이 갑자기 전화해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저녁에 오페라 보러 갈거냐?"
"너..랑?"
"아니. 두 장 줄께, 아무나 데려가라. 원래 내가 보려고 했는데 나는 다른 일이 있어서."
"무슨 오페라인데?"
"토스카. 좋은 거야. 자리도 맨 앞에서 두번째 정가운데야."

놈이 한 장에 12만원이나 하는 푸치니 오페라표를 두장씩이나 나에게 선뜻 준다고 한 이유는 그 시간에 놈은 어느 시간강사와 함께 충주호에 있는 콘도로 알콩달콩 여행을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할일이 없어서 오락을 하다가 텔레비전 재방송을 컴퓨터로 다시 보다가 다시 오락을 하다가 다시 재방송을 보다가 하는 짓을 반복하던 나는 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모처럼 놈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곽재식은 언젠가 그렇게 말한적이 있다. "오페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만 알면된다. 베르디 오페라는 윗사람과 같이 보고, 푸치니 오페라는 여자와 같이 봐라." 그러나, 말했듯이, 박사 과정 연차초과자는 외롭고 쓸쓸하다. 주말에 같이 놀 사람이란 정말로 귀하디 귀한 것이다. 그때 생각난 것이, 부담없고 여기저기 친목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는 그녀였다.

전화를 해서 그녀를 불러낸 나는, 나름대로 VIP석 분위기에 맞도록 더운 여름날임에도 불구, 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메었다. 너무 더워서 팔을 걷어 붙이고, 실험실 건물 앞에서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내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전혀 의외였다. 곱창으로 머리를 묶고 해리포터 안경을 쓰고 헐렁한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그녀가 아니었다. 여름의 쏟아지는 햇살을 풀 스펙트럼으로 눈부시게 반사하는 하얀 치마에 절묘한 갈색으로 사각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텔레비전 샴푸 광고 분위기의 까만 머리를 찰랑이며 조금 늦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정말 보기 좋았다. 안경을 벗고 콘택트 렌즈를 한 것이 좀 불편한지 좀 자주 깜박이는 그 눈과 마주치자, 나는 잠시 놀라서 멈칫 거릴 정도 였다.

곽재식의 오페라 고르는 안목은 확실히 쓸모 있었다. 강변의 성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그 장엄한 사랑의 이야기는 벅차게 내 마음을 적셨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도록 여유롭게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수 있는 여름밤의 분위기도 나를 들뜨게 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 학교로 다시 걸어들어올 때, 넥타이 맨 나와, 반짝이는 귀걸이까지 한 그녀가 같이 걷고 있는 모습은 아주 제대로된 그림이었다. 그림이 진짜 괜찮았다. 내 스스로 자랑스러울 만큼 그럴싸 했다. 역시 조르지오 아르마니 넥타이는 돈 값을 하는 군 하는 생각을 할 때, 나는 가로등불 앞에서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작은 빛들을 보았다.

"어? 저거 반딧불이예요. 우리 학교가 외진데 있으니까, 저런 것도 있고..."
"반딧불이요? 진짜예요? 나 처음봐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로등 아래로 뛰어가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처다보는 그녀의 모습에는 사실 억지로 나이에 안맞게 귀여운척한다는 뭔가 유치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분명히 그 모습은 한 발 뒤에서 지켜보는 나를 미소짓게 하기도 했다. 그 놈들은 확실하게 우리 분위기를 위해 봉사해 준 진짜 마음에 드는 발광성 곤충류들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정말로 멋진 여름밤이었다.

겨울비가 내린 뒤의,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 레스토랑에서, 곽재식은 다시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자, 전혀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정만 들었던 이 아가씨한테서, 우리의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뭔가 다른 모습을 그렇게 발견하게 된거지.
그리고나서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이 아가씨가 사실은 꽤 예쁘구나' 그런 마음이 한 구석에 너도 모르게 자리잡아서, 이제 관심있게 괜히 얼굴도 가끔 쳐다보게 되고 그렇게 된거지. 그러면서 서서히 사심이 싹트는거야."

나는 지금 먹는 음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웨이트리스를 불러 기네스를 한 잔씩 달라고 했다.

곽재식은 일전에 영국 본사 근무에 지원한 것은 오직 싼 값으로 기네스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곽재식놈을 기쁘게 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 잔 걸치기는 꼭 필요한 독백이다.

그 놈의 말이 그 부분은 확실히 맞았다. 한 번 그렇게 맛이 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각인이 되면, 그 때부터는 괜히 얼굴을 볼 때 마다 "이 얼굴이 사실 잘 정신 차리고 보면 그 때만큼 예쁜 얼굴이란 말야"하는 생각이 자꾸 어딘가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그게 크다. 그런 솟아나는 생각이 자꾸 더더욱 같은 생각을 솟아나게 한다.

"자, 그런데. 그렇게 이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왜 일이 진행이 되기는 커녕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했을까. 우선 너의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가져온 맥주잔을 받아 들고 곽재식은 한 모금 마셨다. 맛에 감동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만하다 딱 이정도 차가운 맥주가 진짜 맥주다.

"엄청난 첨단기술의 쇼에 한 때 엄청난 특혜였던 군면제를 받으며 배출 된 한세대 전의 20대 박사님 선배들의 쇼를 보면서 헛생각에 가득 찼던 적 있었지? 명예, 안정된 수입, 우아한 생활, 그리고 지적 허영. 그런게 미래라고 생각했잖아? 처음 명문대에 들어왔다고 양자역학이니 미분기하학이니 배울 때는 곧 안있어서 닐스 보어랑 맥주 마시면서 게오르그 칸토어랑 농담 따먹기 할 줄 알았겠지."

이 번에는 내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보험회사 직원놈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아는거야. 학부 마치고 바로 취직하자니 군대갔다오는 것도 걸리적거리고 뭔가 어영부영하는 거 같고, 그러다가 그냥 흘러가는데로 반쯤 시간미루기 비슷하게 대학원에 들어오지. 허구헌날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쯤 퇴근하면서 죽자고 일만하고. 주말도 왠만하면 반납하고. 혹시 누가 '방학때는 노나요?'라고 물으면 참 세상 물정 모른다는 생각 들지?

그런 생활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1년, 2년 계속 되는거야. 끝없이. 조용하고 썰렁하고 심심해빠진 이 학교에서 3년, 4년, 5년 계속 있게 되는거지. 올해가 학교다닌지 12년째냐? 말도 안되는 선배들의 이상해빠진 군기잡기에 시달리기도하고, 교수란 사람이랑 장단 맞추려고 별별 이상한 일을 다 하는 상황에서 점점 사회에 불만이 쌓여가는 거겠지.

그리고 나서 그런 사람의 장래 직업인 연구원이란게, 절반쯤은 연구소에 딸려 있는 연구소 부지의 탈세를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걸 알게 되지. 거기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라는 신화가 또 사람잡네. 늘 피곤하기 짝이 없는 격무를 당연한 듯이 강요당할 거고, 옛날에 뭘 알고 설치는지 몰랐던 문과 친구들에 의해 산간벽지의 연구소 타운으로 밀려나는 거야.

그나마 불경기에 빠지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니네 연구 사업부를 끌고 나갈지 말지 결정하는 건 아무 상관없는 서류 만지는 사람들이잖아? 야. 우울하지? 미래가 암담하고 불투명한 데, 현실은 힘들다. 이거만큼 견디기 힘든게 있냐?"

사실 그런 사실보다 더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줍잖은 경쟁심이었다. 고등학교때, 학부때 공부 잘한다고 박수를 많이 받고 으스대던 나는 더 이상 으스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내가 비록 다른 사람보다 양송이 포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솔직히, 옛날에 무시했던 내 친구들은 이제는 공무원이나 선생님이나, 대기업 사원으로 나름대로 자리잡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쁜 마누라, 귀여운 아기들. 그런 모습으로 손 잡고 나타나, 자동차 광고처럼 세단을 타고 사라지는 일요일.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내 마음은 "지옥의 질투심 끝없이 불타오르고" 였다.

아직도 학생으로 실험실에서 버티다가 주말이면 썰렁한 학교에서 혼자 맥주나 마시거나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녹화된 영화나 보며 소일하는 나 자신은 낙오자처럼 여겨졌다. 그런 생활이 1주 2주도 아니고, 2년 3년, 4년 5년씩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날 이때까지 도대체 뭘한다고 새벽에 나와서 또 새벽에 들어가면서 이렇게 죽도록 공부만 하고 있는가? 그렇게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록 지금 내 상황에 대해 한숨만 나왔다. 대체 망할 양송이 포자가 뭐란 말인가. 곽재식은 굳이 이런 마음을 아주 헤집어 놓으면서 사람 속을 긁는다. 그러면서도 얻어맞을 각오는 전혀 안한다는 것이 또 저 곽재식놈의 재수없는 특성이다.

"여기에서 결론이 나는거야. 박사 과정 연차초과자란 원래 그렇게 우울하고 주변에 옳은 친구도 몇 없는 그런 상황이야. 바로 그럴때 이 발랄한 약사 아가씨의 생활이 눈에 들어오지. 이제 겨우 실험실에 잠시 발 들여놓는 이 아가씨가 그런 분위기를 알리가 없지? 이 아가씨가 어린 친구들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즐겁게 노는 모습은 은근히 네 마음에 질투심이 생기게 하지."

그러나 곽재식의 추리는 간과하는 점이 있었다. 분명 그런 모습은 질투심을 느끼게도 했지만, 또한 밝은 그녀의 모습은 단조롭고도 무거운 내 주변 분위기에서 유일한 빛이었다.

곽재식놈은 또 부산 어느 호텔로 놀러간다고 가버리고, 그럼 맥주 같이 먹을 사람도 없어서 할일이 없는 주말에도 연구실에 출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도 뭔가 바쁜 일로 나와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반가웠다. 또 어떤 그 밝고 경쾌한 기운이 한없이 밀려와서 전염되어 버렸다.

그런식으로 나는 그녀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정이 들어갔다. 한번은 그녀가 어설픈 솜씨로 만지작 거리다가 조합화학 자동화기기를 완전히 망쳐버린 적이 있었다. 담당하는 전 선배가 그걸 보고 짜증을 팍팍내고 길길이 날뛰다가 가버리자, 멋모르는 그녀는 그만 너무 당황해서 엉엉 울어버렸다. 아, 그녀의 나이는 우리 어머니가 결혼을 해서 나를 임신했을 나이였는데. 그런 그녀가 진짜 어린애처럼 콧물까지 흘리면서 울었다.

그렇게 우는 그녀를 달래면서, 나는 밤새 기계를 고쳤다. 10년 동안 학교에서 버티게 되면 "도통"하게 된다. 박사 6년차의 손이 닿으면 실험실의 기계는 블루스를 추면서 제시카 심슨 노래라도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훌쩍이는 그녀와 같이 밤을 새며 기계를 고쳐서는 아침에 다시 제대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뻐할 때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벽까지 눈물로 범벅이었던 눈으로,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칭찬을 2백번도 넘게 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한 팔십번쯤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며, 아침밥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우유도 사주고, 떠먹는 요구르트도 사줬다. 그 전날 학부생들 시험지 채점한다고 밤새고 50시간째 1초도 못잔 새벽이었지만 진짜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그렇게, 질투도 하고, 같이 지내며 이런저런 일도 겪으면서 너는 그 아가씨한테 사심이 팍팍 생기게 된거지. 이 상황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게 제대로된 솜씨인데, 공대 대학원에서 인생을 묻은 당신이, 무슨 수로 장단과 리듬을 알겠는가. 바로 그 때 엉뚱한 마음이 또 가로막는거야."
"무슨 또 엉뚱한 마음은 엉뚱한 마음이냐. 사람 좀 그렇게 무시하는 투로 말하지 마라."
"두 가지 측면이 있지.

첫번째. 넌 네가 그 아가씨보다 더 멋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고 있어. 네 마음속에는 아직도 명문대학생이라는 자존심과 대학원에서 이 긴긴시간 동안 최고의 실력만 내면서 수많은 논문을 출판했다는 명예가 가득하겠지. 도대체 왜 그걸 탈피못하는지 나는 이해못하겠지만, 한국 "포자 식물학계"의 가장 유능한 학생이라는 생각에도 불타오르고 있고. 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멋있는 학문, 포자 식물학이여.

그냥 그저그런 약대를 들어가서 고분고분 약사가 된 사람이, 인기가 많고 친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썩 미인도 아닌 저 아가씨보다야 왠지 니가 더 그럴듯하다는 이상한 자존심이 있는거야. 그 아가씨가 너한테 먼저 접근해오면 좋겠지만, 아닌 다음에야 네가 그 아가씨한테 목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러면 하다못해 친구들 보기에도 쪽팔린다고 생각하는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친구 곽재식은 이미 나의 쪽을 아주 헐값에 바겐세일하고 있었다.

"두번째. 만에 하나 이 아가씨한테 접근했다가 채였을 때를 두려워 하는 거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실험실에서 같이 일하면서 계속 지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어색한 관계를 견딜 베짱이 없는거야.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역시 또다른 형식의 쪽팔림이야. 이 사방에 친구가 많은 아가씨에게 분명히 어째저째 정들어서 접근했다가 채인 남자들이 몇몇 널려있겠지. 너도 그런 전과의 한 훈장으로 전락하는게, 완전 자존심상 한다고 생각한거야. 이건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이야. 보험료도 엄청 높게 받아야 될걸.

너는 그렇게 놀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거지. 그러다가 그것때문에 1만 7천킬로미터나 날아와야 할줄은 모르고 말이지."

어느새 나는 맥주 한 잔을 다 마셨다. 놀랍다면 놀랍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결론 이었다. 놈은 나와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에 대한 상황파악과 그리고 그녀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모양만으로 모든 걸 헤집고 있었다.

사실 놈은 말을 하면서 꼭 일류 점쟁이가 임기응변 하듯 살짝 살짝 내눈치를 보면서, 맞는거 같은 말은 더 밀어 붙이고, 틀리는 거 같은 말은 슬쩍 접고 그러기도 했다. 그렇긴해도, 곽재식놈은 과연 옛날에 엔트로피 계산하는 로그 방정식 풀던 그 솜씨를 이번에도 엇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떤 사람이 밥먹다 일어선 나이프와 포크의 기하학적인 모양으로부터, 내 마음이 꼬여드는 확률밀도함수를 추측해 내는 것은 사실 감탄할만하다.

나는 좀 진지한 표정으로 곽재식에게 물었다. 사실 그러려고 하다가, 안티아가 너무나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애써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곽재식에게 물었다.

"자, 니말이 다 맞다고 치자. 그런데, 왜 걔가 날 좋아한다는 건데."

사실 문제의 가장 큰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 그것은 그녀의 친절한 성격으로 빚어진 그녀 주변의 수많은 관계중의 그저 하나일 뿐인 것일까. 아니면 그녀 역시 나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과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그녀의 인기 관리의 희생양일까, 아니면 수줍은 아가씨에게 먼저 용기를 내야할 기사일까.

그것 때문에 내가 밤마다 고민하고, 걸어다니면서 고민하고, 비행기타고 오면서 고민하고, 밥먹으면서 고민하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거기에 대해서, 세계 최고의 다국적 보험회사의 2등급 컨설턴트가 가장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해주마. 핫핫핫."
"안 웃기다. 재수없기만 하다."
"첫째."
"첫째?"
"이 아가씨는 테이블 매너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만, 음식을 좀 빨리 먹었지. 그런데,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서 남들과 속도를 맞춰나가는 것은 그건 기본중의 기본이란 말이야. 뭔가 맞아들지가 않는거야."
"먹으면서 그냥 맛있게 안즐기고 남 먹을때 속도 맞춰준다 뭐 그런거 내가 제일 싫어한다. A급, 특급 짜증나."
"이 아가씨가 너같이 이상한 놈이라면 물론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아니란 말야. 자 이건 뭔가 초조하다거나 신경쓰인다는 증거야. 그래서 음식 먹는데 좀 지나치게 집중해버린 결과란 말이야.

그런데, 왜 뭐가 신경쓰일까? 차분하게 비가내린 런던의 저녁에, 베이스가 솜씨 좋게 재즈를 연주하는 레스토랑에서. 뭐가 신경쓰이는 걸까? 혹시, 정이 듬뿍들어서, 곁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떨어져 지내면서 자꾸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 순박한 남자 대학원생 때문은 아닐까?"
"둘째는 뭔데?"
"내 졸업 논문은 MEMS에 관련된 것으로 썼지만, 곽재식이 개발한 인류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이론은 싱크로나이재이션 테오리, 동기화 이론이야. 동기화 이론이 두 번째 이유야."
"지겹다 그만해라."

동기화 이론이란, 곽재식놈이 또 새로운 여자와 눈이 맞았을 때나, 아니면 술맛이 좋아서 술에 취했을 때마다 항상 꺼내는 이야기였다. 그놈은 온갖 경험과 증거를 내놓지만, 그 어림없는 이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사람이 사람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지하게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니카 벨루치 포스터나, 박예진 나오는 주류 광고를 볼 때의 그냥 "이쁘다"는 느낌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채워 줄 수 있고, 자기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정말로 짝이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국에는 상대방도 자신에게 끌린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시간의 문제이지 그 상대방 역시 자기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좋아하는 여인을 위해서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색함 없는 정직한 순수함과, 오바없는 진지한 진심뿐이다. 바로 거기에 인생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숭고함이 있다나.

"말도안되는 소리는 관두고, 세 번째는 뭔데?"
"첫번째가 두번째가 사실확인에 의한 근거라면, 세번재는 당위적 근거야."
"쓸데없는 보험사기 비슷한 소리 하지말고."
"원래 해외학회나 아니면 그냥 해외 배낭여행이라도 나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괜히 들뜨게 되잖아. 낯선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돌발적인 추억. 재미난 이야기. 그런걸 솔직히 기대하잖아. 그런게 아니라, 그냥 죽도록 식물세포벽이랑 뿌리혹박테리아 이야기만 하는거라면, 도대체 그 많은 학회들을 휴양지에서 여는 이유는 뭔데?"
"내가 기분이 들뜨니까 오바하란 거냐?"
"그게 아니라, 그 아가씨 기분이 들떠 있을 거란거야.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과 예상치 못했던 추억. 바로 그거 아니냐. 솔직히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몰라서 그렇지, 니가 이 아가씨에게 호감이 없지는 않다는 걸 그 아가씨도 알거 아냐.

그 아가씨도 너를 보면 은근히 뭔가 기대는 할거라고. 물론 거절할 마음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안하는건 아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할 지언정, '제가 날 갑자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을까'하고 은근히 상상은 한다는 거지. 그럼 넌 딱 적당한 장소, 적당한 시간에 나타난 적당한 인물이야.

여긴 밤안개속에서 빅벤의 불빛이 반짝거리고, 비가 지나간 청량한 기운이 가득한 런던 아니냐. 해리 코닉 주니어 노래가 울려퍼지는 이 그럴듯한 레스토랑에 와서, 그냥 무던무던하게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것도 엄청 썰렁하고 실망스러운거야. 그거만큼 한심한 일도 없다고.

국제 학회에 해외 출장이라고 해서 괜히 들떠서 온 저 아가씨에게, 삶의 작은 활력을 주는게 그렇게 베풀지 못할 일이냐? 사람은 누구나 인생이 고달프고 삶은 힘들게 느껴지는 법이지. 저 작은 체구의 아가씨도 분명히 그런 인생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네가 사랑하는 그 아가씨가 그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는데, 뭔가 재미있는 추억, 잊지 못할 이벤트 하나 마련해주지 못한단 말이냐?

누군가 진지하게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데, 그게 어떻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지금같은 이런 상황이라면 참 기분좋을 수 있는 일 아닐까."

나는 내가 이 영국에 와서 기념품으로 산 노턴 앤솔로지 책이 생각났다. 베오울프로 시작해서 조나단 스위프트로 끝나는 영국 고전문학 책을 사는 게 여기에 와서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추억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오히려 그녀가 계약기간이 끝나고 우리 실험실을 떠난 후였다. 그녀가 눈앞에 사라지자 무의미한 자존심 세우기와 엉성한 질투심은 더 이상 솟아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 대한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나는 혹여 그녀가 안부전화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에도 사백 스물 여섯번씩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고, 그녀의 홈페이지에도 하루에 몇 번씩 들어가 보았다. 나는 캠퍼스의 커플들을 볼 때나, 멜로 영화를 볼 때나, 노래를 들을 때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가 좋아하던 1000 조각짜리 퍼즐 맞추기나, 팥빙수를 볼 때도 그녀가 떠올랐다.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두부였다. 두부를 볼 때마다, 같이 다이어트 하자며, 저녁 대신 커다란 두부를 슈퍼마켓에서 사와서 실험실 구석에서 둘이 같이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식당 가서 간장 훔쳐오기 하던 그 생각이 떠오르면,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었는지 하는 생각에 빙그레 웃는 웃음속에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의 천방지축이면서도 여리고 밝은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세상에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밝고 명량하고, 그러면서 명예와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있는 그런 마음은 정말로 세상에 흔한게 아니다. 그런 마음은 사람을 멋있게 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힘을 준다. 나는 그걸 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정말로 귀한 사람임을 뼈저리게 안다. 하지만, 그런 소중한 그녀의 생각들을 그저 철없는 썰렁한 유머나, 방정맞으면서도 콧대만 높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놈들이 세상에는 미세먼지처럼 가득하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상처를 받지 않도록 목숨바쳐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박사과정 연차초과자로 성격도 좀 이상해지고, 도무지 사람 대하는데 재주를 잃어버린 나에게 그녀의 그런 점은 내 삶에 가장 보석같은 에너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을 왜 사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저녁에 자고 하는 이유가 뭔데? 영국까지 와서는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못하는데. 한 번 사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될거 아니냐."

곽재식은 정말로 간곡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간만에 10년이 넘게 묵은 옛친구의 진정한 의리가 묻어나는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트랜지스터 트랜지스터 로직과 운율을 맞춘다면 곽재식의 말들은 테이블 테이블매너 로직이라 할만했다. 꽤나 그럴듯 했다.

더군다나 내가 처한 상황에 꼭 맞게 이리저리 마음속의 대사들이 휘감아져갈 때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정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몇 번 째 포크를 집었나 하는데서 시작해서, 그녀가 내 일생의 사랑이라는 식으로 끝나는 논리는 좀 막가는 느낌이 있긴 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근사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진실의 후보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놓치기 어려웠다.

곽재식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보았다. 놈은 항상 사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디텍팅하고 있었다. 꼭 지가 무슨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이라도 된 것 처럼. 곽재식은 그녀가 오기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안티아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이 몸은 자리를 비울테니, 귀국하기 전에 히드로 공항에서 뒷이야기 한 번 해보자."
"잠깐만, 잠깐만. 뭐라고 말하는게 좋을까. 다짜고짜 사랑해. 그러면 이상하잖아. 어떻게 뭐라고 말해야 될까. 좋아한다고 할까? 그건 좀 식상하잖아. 뭐 좋은 대사 없냐?"

나는 다급해져서 그 놈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절대 그 놈에게는 걸려들지 않는 다는 초장의 맹세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사람을 동하게 해 놨으면 뭔가 해결책도 줘야지.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 놈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왜? 중간 포크 크기가 제일 작아서 그걸 쓰면 사랑이 이루어지니까? 시차 때문에 배 고파서 밥 빨리먹은 아가씨는 무조건 널 사랑하니까?"

그리고나서, 그 놈은 안티아의 팔을 잡아 끌며 뒤도 안보고 사라졌다. 여유롭게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건내는 곽재식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안티아와 즐겁게 웃으며 괜히 그녀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었다.

허탈한 그놈의 뒤통수에 나는 딱 나이프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영국 형법을 조금만 알았어도 왠만한 형량은 감수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아, 말년의 랜슬롯을 보는 아더왕의 기분이 이랬을 것인가.

"미안."

그녀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파란 스웨터와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그녀를 나는 다시 한 번 똑똑히 쳐다 보았다. 망할 곽재식이 내 마음을 완전히 휘저어 놓아서 뭔가 도무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없는 동안 학교를 거닐며 얼마나 그녀의 모습을 많이 떠올렸는지 나는 다시 돌이켰다. 그리고, 그녀가 동료 약사와 알콩달콩 정다운 연인사이가 되어 한 1년후에 다시 나타나면 얼마나 몸서리치게 배아플지 상상하며 거의 공포감마저 느꼈던 것도 돌이켜 떠올렸다.

대도시의 회사에서 또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그녀 특유의 인기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겠지. 그런 그녀를 상상하며, 가끔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지금 혹시 그녀도 같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내가 몽골의 사막을 날아, 시베리아 툰드라를 지나, 우랄 산맥을 넘고, 차디찬 북해를 건너, 연구비 부족으로 싸구려 비행기 티켓을 쥐고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세 번씩 갈아타면서, 이 섬나라에 온 것은,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제약회사 참가자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한 두 달 전부터, 어쩌면 나는 지금 이렇게 테이블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할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애써 스스로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그리고 결심했다. 내 평생을 살면서, 오늘 하루, 이 저녁, 지금 이 순간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가슴이 더욱더 중저음 강화버전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옛친구는 얼토당토 않은 농간으로 아무것도 모르게 사태의 진실을 꼬아놓았지만, 나는 적어도 한가지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저, 할 말 있는데요."
"예? 뭐요?"

엑스칼리버에 손을 대고 아더왕이 칼을 뽑으려 할 때가 왔다. 과연 나는 그냥 괜히 칼에 끌린 동네 청년일까, 아니면 전설에 길이 남을 아더왕일까. 그건 바로 다음 순간이면 판가름 날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꿈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때, 궁금함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녀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맹세코 내 평생 본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 2004년 11월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