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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 1. 눈을 뜨는데, 여전히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엇다. 내 혀가 그녀의 앞니를 건드렸고, 아직 입술에는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졌던 맛이 남아 있었다. 왠지 붉어진 얼굴에 정신은 멍했고, 잠깐 동안 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그대로 나에게 안기었다. 그녀가 내 허리에 팔을 두르자, 나는 그녀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음, 심장이 아주 콩닥콩닥 뛰고 있군요." 가슴에 귀를 대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언덕배기 길 저편에 늘어선 가로등 빛이 어린 것과, 달빛에, 그 표정이 보였다. 작은 웃음이 가득한 하얀 얼굴과, 스쳐 지나가는 빛이 그대로 담긴 검은 눈동자. 순간 나는 뭔가 확 정신이 깨는 느낌이었다. 수습. 수. 습. 그 두 글자가 만화에서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100톤 짜리 망치처럼 쿵쿵 떨어지는 그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차에, 마침, 그녀가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말을 더 잇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지극히 애매한 태도로 뒤돌아보지 않고 그녀는 사라졌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만 벤취위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통을 꺼내 병뚜껑을 엄지로 돌려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벌써 다 마셔 가는 듯 하다. "아-" 하고 나는 혼자 괴로움의 소리를 내어 보았다. 어쩌냐. 뭔 일이냐 이게. 그러고 나니, 먼저 드는 생각은 한심하게도 이것이 몇백일만에 키스라는 걸 해 본 것인가 꼽아보려는 산수였다. 연화랑 그 때 다음부터니까... 1월은 31일, 2월은 28일, 3월은 30일 하는 식으로 더하기를 하다가 무슨 병신같은 부질없는 짓이냐 싶은 마음으로 관뒀다. 분명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감이 없지 않았고, 그 입술과 혀의 미묘한 감촉도, 그리고 밤공기를 사이에 두고 내 눈을 바라 보던 그녀의 얼굴 표정도 완전 분위기 좋았다. 그렇지만, 어딘지 좀 씁쓸했다. 비대칭적인 커플을 보고 날강도니 도둑놈이니 하는 평이 있는데, 과연 나 역시, 내가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무슨 사기쳐서 어림없는 환상을 심어주고는 넘어오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 죄책감이라고 하면 너무 단정적이고 강한 어감이고, 하여간 그 왜 있지 않은가, 죄책감 비스무레한 약간 어두컴컴한, "내가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는 열등감이 깔린 그런 기분. 결국 이튿날, 나는 덜 떨어진 사람들이 문제가 안풀릴 때마다 갖다 대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술 취해서 필름 끊겨 생각 안나는 척 하자. 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같잖지도 않은 핑계임이 분명했고, 결국은 나에대한 악평을 널리 유포시킬 자폭성 계책임이 분명했지만,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 날 하루 동안, 그녀는 나에게 몇 개의 문자 메세지를 보내왔는데, "날씨 넘넘 추워~ 또 어디서 떨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다녀요^^*" 이런 메세지와 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도 아무런 정보의 유실이 없을 다른 메세지 2개 더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종류는,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_+" 와, 그 뒤를 잇는. "오늘 술 사줘요. 추위에 추위로 맞서는 차가운 맥주!" 였다. 나는 첫 문자 메세지 하나에는 아무 대꾸를 안하고, 그냥 전화기 꺼놓은척 하고 못본 걸로 위장하려고 했다. 두 번째 문자 메세지를 보니, 문자메세지 하나를 보내는 데도, 문구와 이모티콘, 문장부호의 어감을 생각하며 고민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걸 그대로 무시하자니, 그녀의 그 마음이 상상되어 왠지 가슴한켠이 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래, 고맙습니다." 하고 답을 보내었다. 문제는 두 번째 제안이었다. 보통 "술 사달라"라는 제안은 9할 7푼 3리 정도의 비율로, "대화를 할 기회를 갖자, 다만 그 주제를 정확하게 내 입으로 제시하기는 싫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고, 남의 그런 제안도 좋게 보지는 않는다. 특히, "추위에는 추위로 맞서는 차가운 맥주" 이 부분은 좀 더 껄끄러웠다. 내가 겨울에도 항상 맥주를 갖고 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마신다는 것은 여기 저기 소문에 나도는 이야기 였다. 또 그녀는 "뮤직맨"에 오면, 중앙에서 오른쪽 두 번째 테이블에, 거의 항상 단골인 내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장하건데, 그녀는 차가운 맥주를 전혀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추위에는 추위로 맞서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것이라는 사상은 그녀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갖고 있지 않았다. 즉, 그녀는 나와 마음이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어떻든 내세우기위해 치장용으로 그런 어구를 덧붙인 것이였다. 뭔가 내 마음과 소통하기 위한 좀 자기에게 안어울리는 과시용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또 물통을 꺼내서 맥주를 마셨다. 거기에 대한 대응 때문에, 나는 꼭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이라도 되는양, 강의를 하는 중에도 계속 고민을 했다. 항상 써먹던 유머와, 어림없는 개그 몇 개를 섞어 내었으므로, 학생들은 오늘도 내 강의가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머릿속에서는 반응역학도 전도공학도 아닌 그녀에 대한 대응 방법 문제만 궁리하고 있었던, 그런 성의 없는 강의들이었다. 결국 저녁 해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뮤직맨에 정말 갈 시간이 되었다. 이제와서, "헉, 오늘은 안되겠다" 하는 것도 예의 없는데다 사기꾼 같아 보일 듯하였고,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일곱시에 뮤직맨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다섯시 반부터 뮤직맨에 죽치고 앉아 텔레비전의 시트콤을 보고 있었다. 가게 주인인 최박사님과 함께 이런저런 잠답을 하면서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하루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가는... 사실 말끔히 씻어간다고 하는 건 사기고, 그나마 스트레스가 좀 사라지는 듯한 일이었다. 최박사님은 술잔에 맥주를 가득 채워 주시고 덤으로 내 물통에도 맥주를 채워 주셨다. 일곱시가 되고, 나 말고 다른 손님도 술집 이곳저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나는 별로 안 초조한척 하면서도, 계속 시계를 살폈다. 분명히 그녀는 일부러 약간 늦게 나올 것이 틀리없다. 이유는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요즘 관찰한 바로, 요즘에는 약간의 감정교류가 오가는 남녀가 만날 때 여자가 한 10분쯤 늦게나오는게 유행인듯하다. 과연 19시 10분. 그녀가 뮤직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단번에 이목을 사로잡을 듯한 분위기였다. 바른 말로 하자면 그게 아니라, 내가 그녀에 대해 워낙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하고 있었기에, 내 이목이 확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녀는 2주에 1일 꼴로만 입곤 하는 토끼털 코트에 안어울릴듯 하면서도 아주 어울리는 재미난 문구가 크게 쓰인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상상도 해본적 없는 큰 가방을 의자 오른편에 놓고, 그녀는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어, 쪼끔 늦었죠? 죄송합니~다." "그래, 너 저녁 안먹었지? 저기요, 최박사님-" 그녀가 술을 사달라고 했지만, 내가 알기로 그녀가 맥주를 좋아할리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괜히 그녀에게 술을 갖다 놓고 고역을 치르게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저녁 안먹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최박사님께 삶은 감자 요리와 따끈한 양파 수프를 달라고 했다. "바로 갖다 드리지." 최박사님은 계산서에 볼펜으로 체크했다. 그리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일부러 나를 보고 엄청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슬쩍 저으며 뒤돌아섰다. 꼭, "자식, 기술도 좋지" 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정곡을 찌르는 조롱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띠동갑 커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꽤 난다고 할만한 나이차이에, 더군다나 그녀는 이제 대학 2학년으로 지난 학기에 내 강의를 들은 적 있는 학생 아닌가. 누가 봐도, 심지어 내가 봐도, 이건 "수작부린 것" 이라는 말로 폄하 당하기에 아주 적절해보이는 그림이었다. "이거 의외로 되게 맛있네요." 그녀는 감자를 잘라 먹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감자를 정말 맛있어 하는 표정으로 먹다가 전화기가 부웅~ 하면서 한 번 진동하고나니까 문자메세지를 확인하고 열심히 두 손으로 타이핑해서는 답을 보내고. 그 모든 모습들은 확실히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가득 안겨줄만한 것이었다. 너무나 좋아 보였다. 나는, 물통을 꺼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셔야 했다. 그런데 나는. 나이는 이만큼 먹었지만 실직해서, 대학 강사로 떠돌아다니면서 겨우 겨우 끼니를 잇고 있었고, 그외에는 유네스코에서 가끔 내려오는 의뢰가 유일한 수입이다. 게다가 내가 한 번 결혼하고 한 번 이혼했다는 것은 왠지 성격에 문제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영혜에게 위자료를 주고 난다음에는 모아놓은 저축도 홀라당 날아가서 그야말로 우중충한 신세다. 대강 입으로 뜯어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감자를, 그녀는 굳이굳이 칼로 조각조각 썰어서 포크로 콕콕 찍어 먹는데 성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 옛날 영혜에게 마음을 빼앗겨 갖은 노력 끝에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던 그 때를 정말 사무치도록 생각나게 했다. 그래, 그러니까, 어제 그렇게 된 거 였지. 그녀는 분명, 자신이 똑똑하며 처세에 능하고, 어떤 사람이든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무슨 일이든 정말로 잘못되었을 때는, 인터넷에다 몇몇 친구들만 보는 곳에 뜻모를 무진장 우울한 글 몇 줄 남기는 거 말고는 딱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전히 어린 사람이겠지. 그래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거다. 강사랍시고 강의 때 나타나서,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이해와 해결이 나지 않는 깁스 자유 에너지에 대해서 유쾌한 이야기 몇몇을 들려주고 묘한 설명으로 깔끔한 결론을 맺어준 것. 그 기술이 나에게는 그나마 대학의 강의들을 빼앗기지 않는 유일무이한 방패였고, 거기에 그 열심히 하는 학생 중에 하나였던 그녀는 관심을 가졌다. 대학가에 들뜬 채로 돌곤 하는 소문에, 나의 몇몇 경력들은 전설이 되어 허황되게 퍼져나갔고, 그 덕분에 이상한 동경을 갖고, 강의 후에 "스스로 답을 아는 질문"을 억지로 만들어 가져 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녀도 그런 학생 중에 하나였는데, 아직까지도 옛날 마누라를 잊지 못하는 칠칠치 못한 홀아비인 나는 그녀에게 필요 이상으로 정답게 대했다. 받아 들이자. 사실 분명 내 마음속 어느 곳에는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매듭을 맺자. 이건 뭔가 아니다. "내가 항상 물통에 맥주 넣고 다니면서 술을 마시잖아. 그래서, 어제 그 일은 술 취해서 벌어진 거예요." 라고 말을 하면 안된다. 이건 너무나 무책임하다. 또 무슨 알콜 중독자 폐인으로 스스로를 규정지어야만 납득이 되는 설명이다. "어제 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술 먹고 필름 끊겨서 생각이 않나는데." 이렇게, 아예 어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이 않나는 것처럼 넘어가면 어떤가. 하지만 그것도 안된다. 그렇게 하려면, 그녀가 먼저 어제 일에 대해 말을 꺼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내가 어제 일이 화제가 되도록 말을 끌어가야 하고, 그러면 어제 일이 기억 나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이 된다. 귀류법. 어쩐다. 그녀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는 결국 그냥 물통의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왜, 항상 그렇게 맥주 담아다니면서 홀짝 홀짝 마셔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어... 그게 뭐냐면..." 내가 답을 더듬고 있자니, 그녀는 더 궁금한 표정이 되면서 살짝 걱정스런 표정이 얼굴에 비쳤다. 혹시, 알콜 중독 같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자기가 그 아픈데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하는 듯 했다. 말 한마디마다 남을 배려하는 성격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맨날 물통에 맥주를 담아 다니면서 한 시간에 한 모금씩 마시곤 하는 나였지만, 그래서 운전하기 싫을 때나 말 실수 한 거 술취해서 한 실수라고 할 때는 그 사실을 악용하기도 하는 나였지만, 명명백백히 나는 알콜중독은 결코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의사 처방이라고나 할까..." "술마시라고하는 의사도 있어요? 나는 확실히 멍청해 보일 소지가 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되었다. 항상 맥주를 마시곤 하는 내 버릇 이야기가 나왔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미처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드디어 헤쳐 나갈 구멍이 보였다. 아주 부드럽게 나는 이 이야기를 어제의 사건과 연관시켜서, 어제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할 것이다. "하여간, 어제도 그래서 꽤 술을 많이 마셨었거든, 그래서 어제..."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아차. 말을 끊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나니, 꼭 이 다음에 하는 대사가 엄청나게 진지한 대사를 할 듯한 분위기가 되지 않았는가. 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는가. 실수였다. 꼭, "당신은 앞으로 3개월 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런 말 하기 전 같은 분위기 말이다. 나는 "그래서 어제는 내가 좀 장난기가 심해졌나봐요" 라고 말을 갖다 붙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심각한 분위기가 "어제는 장난,그냥 장난이었어요", 그러다가는 뺨을 한 대 맞던지, 혹은 한 2천대 정도 맞던지, 아니면 그녀가 부끄러움에 평생동안 인형에 바늘로 나를 찌를듯 나를 저주하고, 또 이 상황을 저주할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생각해도 꽤 비열한 놈이었다. 기묘한 정적. 정답고 재미난 분위기에서 갑자기 차갑게 끊긴 대화. 그녀는 냅킨 몇장만 뒹굴고 있는 테이블 위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문득 나를 쳐다 보았다. 그 표정은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가 어떤 뜻이 될지 짐작한다는 듯도 했다. 시험기간이 막 지난지라 굉장히 피곤할텐데, 충혈기 하나 없던 그 맑은 눈에, - 이건 나 혼자 지레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 눈물이 살짝 어리는 듯 보였다. "There were bells, on a hill. But I never heard them ringing" 하는 노래가 뮤직맨에는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때 최박사님이 오셔서 이 심각한 분위기의 눈치를 한 번 보시고는, 다 먹은 그녀의 감자 요리 접시를 치워 가셨다. 그리고, 내 물통을 다시 맥주로 채워주러 들고 가셨다. "그래서 내가, 왜 맨날 물통에 맥주를 담아서 들고다니면서 마시는지 이야기를 꼭 지금 해 줘야 겠어요?" 나는 말을 확 돌렸다. 뉴질랜드의 숏오버 강을 내달리는 제트보트가 폭포로 떨어지는 급류 앞에서 180도 방향을 잡아 돌리는 느낌이랑 같았다. "응. 지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노랫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그녀는 조그맣게 웃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옛날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2. 사실 이야기의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드래고니언 주식회사 주웅길 회장의 비서가 나를 찾아왔던 그 때부터 이야기를 하면 된다. "회장님께 선생님이 꼭 필요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서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 절묘한 내 심정을 설명하자면, 한참 이전의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기나긴 대학원 생활의 터널을 빠져나와서 내가 처음 취직했던 때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보수 좋고 일 적기로 유명한 환상의 직장, 드래고니언 주식회사의 CPU 연구소에 들어갔다. 보수 좋고 일 적기로 유명한 드래고니언 CPU 연구소라는 명성에 나는 드디어 오랜 시간 사귀어 오던 영혜와 결혼했다. 드래고니언 CPU 연구소가 보수 좋고 일 적기로 유명하다고는 했지만, 역시 생각보다 보수는 좋지 않았고, 생각보다 일은 많았다. 나보다 몇 년이나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영혜는, 내가 그렇게 꿈꾸며 들어간 직장이 사실 별 볼일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좀 실망한 눈치였다. 나도 영혜의 그런 실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좀 더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급 조금 더 받는다고 해도, 결국은 자기만 손해거든요. 적당히 하세요." 최박사님이 진심어린 충고를 그렇게 해 주실 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내 능력에 대한 일종의 질투가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없이 일했고, 연구소를 관리하는 임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임원들은 급한일, 어려운일, 힘든일은 능력있는 나에게 모두 쏟아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마치기 위해 미친듯이 일했고, Eight Days A Week 일한 덕분에, 경이로운 성과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히 대가는 없었다. 우선 다른 연구원들의 불만을 예방하기도 해야 했던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사항은 임원들은 "사원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을 적절히 시키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내가 특별히 능력을 초월하는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인사팀에 보고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적절한 일"만 시켜도 결과는 남들에게 자랑할만큼 멋지고 좋아야 했기에, 나에게는 항상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연구결과만을 요구했다. 덕분에 나는 영혜와 함께 살면서 연구소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소에 살면서 집에 들렀다 오는 식"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나는 장비 옆의 따뜻한 라디에이터 위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고, 주말 밤에 연구소에 난방이 끊기면 차에서 자고 나와서 새벽 연구를 하곤 했다. 연구소 근처에 있는 사우나에 자주 들르게 되었고, 한 번은 아무생각 없이 퇴근하다가 버릇이 이상하게 들어서, 집이 아니라 사우나로 차를 몰고 간 적도 있었다. "우리 연구소가 세금 때문에 세운 거라는 거는 알죠?" 그러던 어느 날, 최박사님이 사우나에서 말씀하셨다. "예. 연구소에 기술개발비로 쓰는 돈은 세금을 면제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 연구용이라고 하고는 컴퓨터, 볼펜, 종이, 잉크 이런거 다 사다가 쌓아 놓고, 드래고니언 그룹 회사 사무실마다 트럭으로 날라서 공급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 "예... 뭐, 다른 데서도 다 그렇게 하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연구용으로 모든 비품을 다 사서 돌릴 수 있다는 거 때문에 절약되는 세금이 엄청나단 말이야. 사실 우리들이 CPU 기술 개발한다는 건 그냥 덤으로 하는 거고, 연구비로 비품사서 돌려 쓰려고 연구소를 세운 거거든. 그거 때문에 우리 연구소가 세워진 건데... 이번에 진용섭 의원이 낙선했거든." "회장님 처남, 그 진용섭 의원이요?" "예. 그래서, 진용섭 의원이 지금까지는 국회에서 잘 막아주고 있었는데, 인제부터는 편법으로 그렇게 연구소로 세금 떼먹는게 규제될 거 같아요." 청천병력 같은 이야기 였다. 과학기술부에서 세금 떼먹기를 위해 연구소를 왜곡해서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제부터 엄격한 기준으로 감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이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연구소를 폐쇄하거나 헐값에 외국에 팔아 넘길 것이고, 그러면 나나 최박사님은 실직할 가능성이 컸다. 나는 차마 그 이야기를 영혜에게 하지 못했다. 그나마 자리잡았다는 직장이 한심하기 그지 없다는 것에 영혜는 일단 실망을 했고, 그나마 일에 휘둘려 집에 들어오는 날과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반반인 생활에 영혜는 짜증을 많이 내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결혼 이후에 계속 같이 사는 생활에 내리막길의 감정만을 느낀 그녀에게 내가 어쩌면 곧 짤려서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 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좀 쉬엄쉬엄해, 그러다가 몸 망칠라." 여전히 영혜는 나를 그렇게 걱정해 주고 있었지만, 나는 영혜가 다른 사람의 결혼생활을 여러모로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모퉁이에 몰린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더 미친듯이 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과연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나는 굴지의 컴퓨터 회사이자, 세계적인 대기업인 일본의 주식회사 테스투딘에 경력직원으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최박사님도 함께였다. 우리는 최고의 팀이었다. 주식회사 테스투딘이라면 이바닥에서는 꿈으로 불리울만큼 높은 곳에 있는 회사였는데, 그 곳에서 그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은 내 실력을 그만큼 인정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연구소가 망해도, 살아날 구멍이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일단 안심했다. "불안한데..." 하지만, 최박사님은 괜히 불길한 말씀을 하시면서 일이 지나치게 잘 풀리는 것에 두려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영혜에게 우리도 이제는 아이를 하나 낳자고 이야기했던, 그 다음, 다음, 다음, 다음날 저녁에, 갑자기 국가정보원의 요원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드래고니언 CPU 연구소에서 근무하시는 연구원이시죠? 일본 테스투딘사에서 연구원을 빼돌리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예?" 저녁밥을 먹던 것이 입에 있어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는데, 우선 검찰청에서 나왔다는 수사관 하나가 수갑을 채웠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떤 수사관 하나가 대뜸 욕부터 했다. "하여간 배운 놈들이 더한다니까. 더러운 놈. 우리나라 기술을 외국에 빼돌려 니 뱃속만 채우려고 해?" 나는 그 길로 잡혀 들어갔다. 당황한 영혜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수사관들이 목과 어깨 팔을 내리 눌러서 나는 그녀의 얼굴 한 번 돌아보지 못하고 붙들려 갔다. 구치소에서 쇠창살 밖으로 텔레비전을 보니, 최박사님도 구속된 상태였다. 우리가 일본 테스투딘사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가 일본 회사에 기술을 빼돌리려 했다고 국정원에 회사측이 신고했던 것이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당황스럽고도 황당한 생각으로 감방에 갖혀 있었다. 한참만에 어렵사리 최박사님과 연락이 닿았다. "연구소를 다른 회사에 M&A 형식으로 팔려고 하고 있나봐. 그런데, 회사에 연구원들이 다른데로 빠져나가면, 연구소가 값을 제대로 못받잖아. 그래서 연구원들이 딴데로 못빠져나가게 하려고 일단 본보기로 우리부터 집어 넣고 보나봐." 왜 우리가 구속되었는지 상황을 알 때 쯤이 되어서는, 이미 온 세상에 우리가 한국의 2조 3천억원짜리 기술을 일본에 팔아넘기려한 매국노로 보도 된 뒤였다. 나는 최박사님과 통화하면서, "다른 회사에 취직한다고 기술 팔아넘긴 매국노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나마 우리는 아직 회사를 옮기지도 않았잖아요. 아직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뭘 죄라고 우릴 잡아 두는 겁니까." 라고 울부짖었지만, 우리끼리 아무리 억울하다고 피토한다고 해봐야, 신문에 기사 한 줄 나는 것 아니었다. 급하게 돈을 얻을 곳이 없어서 집을 잡히고 빚을 얻어 보석금을 내고 구치소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드래고니언사의 법률팀, 국가정보원 법률팀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야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꽤 대단한 변호사들이 필요했고, 그 비용은 막대했다. 덕분에 영혜와 함께 샀던 - 사실 대부분 영혜의 저축으로 무리를 해서 샀던 - 집을 팔고 셋집으로 이사가야 했다.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재판이 1년 반쯤 진행되었을 때 였다. 그 때 드래고니언 주식회사는 연구소를 다른 회사에 매각하는데 성공했다. 연구소를 사들인 회사는 일본의 테스투딘, 바로 우리가 스카웃 제의를 받았던 그 회사였다. 연구소는 사상 최대 금액으로 매각되었고, 그 판매 차익만 30억 달러에 달했다. 텔레비전에 드래고니언사의 회장인 주웅길이 나와서 말했다. "이는, 세계 굴지의 업체인 테스투딘이 우리나라의 기술을 세계 최고로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번 거래에서 3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거기다 모든 연구원들이 그대로 직장을 유지하면서 테스투딘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좋은 조건입니다." 주웅길 회장이 테스투딘의 후지와라 회장과 악수하는 장면은 몇 번 씩 텔레비전에 방송되었다. 연구원과 연구소를 통째로 해외에 비싼 값에 판매한 주웅길 회장은 경영의 황제이자, 우리나라 경제의 영웅으로 온갖 신문, 방송, 잡지에서 칭송을 받았다. 한편, 주웅길이 연구소를 홀라당 팔아넘기기 전에, 테스투딘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 번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된 최박사님과 나는, 아직도 재판에 불려다니고 있었다. 이미 드래고니언의 CPU 연구소는 없어지고, 그 모든 연구원과 보유기술은 주웅길 회장의 거래에 의해 테스투딘에 통째로 팔려 넘어간 뒤였지만, 우리는 예전의 소송 때문에 아직도 붙들려 있어야 했다. 다만, 우리는 드래고니언이 테스투딘에 넘긴 자료에 "불순 직원/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라는 딱지를 붙여 놓았으므로, 불순 반동 직원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테스투딘이 회사를 사들이면서 정리해고한 27명의 직원 중에 한명이 되었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실직자가 된 것이었다. 눈물나게 멋진 것은, 매각계약과 정리해고 규칙에 따라서 퇴직금은 근무일수당 최저수준으로 계상하여, 도합 8천3백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마지막 재판을 받을 때 즈음, 드래고니언 사가 연구소를 비싼 값에 테스투딘에게 팔아 넘겨 남긴 이윤으로, 드래고니언 사가 임원들에게 사상최고액 1200%의 성과급을 지급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신문 경제면은 드래고니언 사를 임직원들을 능력에 맞게 대우하는 우량기업이라고 칭찬했다. 반면에, 우리는 완전히 잊혀져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무죄판결을 받고, 그제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아무도 몰랐다. "검사들이 항소를 안하겠다고 하거든. 그래서 감사비 조로 한 사람당 천만원씩 내야 할 거 같다는데..." 최박사님이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정말 검사들이 그렇게 악질적인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끼어들어있는 변호사들 중 하나가 돈을 가로채려고 괜히 그렇게 분위기를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만원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또 항소를 당해 재판에 끌려다니기를 지겹게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결국 최박사님과 나는 천만원씩을 현금으로 비닐봉지에 싸서 보내야 했다. 그렇게해서, 최박사님과 나는 모든 것을 날렸다. 유일한 차이점은 최박사님은 이혼까지는 당하지 않았고, 나는 이혼해야만 했다는 점 뿐이다. 그동안 구치소, 재판장, 변호사 사무실, 은행을 오가면서 나는 자주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따라서 나는 십원 한 푼 벌어오지 못하는 주제에, 집을 날리고도 모자라 어마어마한 금액을 계속 쓰기만하고 있으면서, 매일 인상 팍팍 찌푸리고 다니는 셈이었다. 아무리 검은 머리와 파뿌리를 두고 맹세한 나의 사랑하는 아내일지라도, 나를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세상 어디에 가서라도, 내가 영혜를 정말로 사랑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바란 것은 영혜와 그냥 재미있게 평범하게 사는 것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술 빼돌린 매국노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버러지처럼 취급하는 가운데, 나는 직장도, 돈도, 그녀의 집도 다 먼지처럼 흩어 버린 사람이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영혜는 내가 생각해 봐도, 나와 함께 그 나락에 같이 빠져들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아 있던, 내 자존심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직, 집 잡히고 은행 대출 좀 얻으면 쓸 수 있는 돈이 조금은 있거든. 맥주 집을 하나 해보려고 해." 재판과 구치소의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최박사님과 나는 한 동안 서로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랫만에 만났을 때, 최박사님은 그렇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억울한 생각에 하루 종일 그냥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밤이 되어 곧 비워주어야 할 텅빈 집에 들어오곤 했다. 집에 와보면, 영혜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강하게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웅길 회장과 드래고니언 사의 인간들을 떠올렸고, 아무렇게나 기사를 휘갈기던 기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라의 기술을 지킨다는 국가정보원과 범죄자들을 잡아들인다는 검찰을 생각했다. 마구잡이로 매국노인 나를 잡아 죽여야 한다고 텔레비전을 보며 이를 갈던 세상 사람들을 떠올렸고, 무죄로 내가 풀려난 지금 이 모든 것에 무심하기만한 모두를 떠올렸다. 다 찢어 버리고 싶은 연구 기록들과, 옛날부터 인생을 걸고 들여다보던 책이며 논문들이 눈에 들어오면,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들이며, 임원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었는데. 교수님들도 다른 연구원들도 최박사님과 내 작품이 최고라고 치켜 세워줬었는데. 나는 드래고니언 사의 제품을 보기만 해도 울화가 도져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던 드래고니언 전자의 텔레비전, 컴퓨터, 냉장고 따위를 모두 제대로 쳐다 보지를 못했다. 다시 예전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로또를 해 볼까. 다시 이 악물고 무슨 고시 공부 같은 것을 해 볼까. 주식투자를 크게 해 볼까. 경마나 도박을 해 볼까. 별별 생각을 하며, 더욱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는 가운데, 나는 의욕을 잃었다. 제대로 옷을 다려 입는 것도, 면도를 하는 것도, 집안을 치우고 이를 닦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의 몰골은 점차 헝클어져 갔다. 언제 내가 잠이 들고, 언제 깨어나는지도 애매해져 가는 정도로 썩은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나는 기막힌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밤이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혹시 검찰이거나 국정원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그냥 베란다로 뛰어내려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 때문에 머리가 아찔한 느낌이었다. 초췌한 몰골로 잔뜩 겁에 질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정말 조마조마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나를 벌레 보듯 바라 모며 서 있는사람은, 근사한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의 경멸적인 시선과는 달리, 그가 나에게 한 말은 공손한 바로 그 말이었다. "드래고니언 주식회사의 회장님께 선생님이 꼭 필요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3. 드래고니언 주식회사의 연구소에서는 회사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구소 안에서는 직원들의 컴퓨터 사용 내용, E-mail, 인스턴트 메신저, 전화 통화 내역 그 모든 것을 검열한다. 도대체 그게 무슨 큰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모르게 겁에 질린 모든 대기업 연구소들은 자기 직원들에게 그런 짓을 한다. 그런데, 드래고니언 사에서 나에 대해 감시하고 있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 년에 두 번씩 회사에서 공짜로 받게 해주는 건강 검진 결과의 세세한 내역 역시 그들은 엿보고 있었다. "고용계약서 8번항에 명시되어 있듯이, 저희는 저희가 선생님에게 제공한 모든 복지에 대해 그 경과정보를 입수할 권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이 받은 모든 건강 검진 내역도 합법적으로 입수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제 건강검진 내역이 도대체 주웅길 회장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드래고니언사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보기만해도 미칠 것 같아서 나는 그 비슷한 것만 어디 나오려고 해도 무조건 피하고 있었기에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웅길 회장의 신상에 대해서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중요한 보도가 있었다. "TV에서도 보도되었습니다만, 회장님께서 지난주 청와대에서, 국가 과학 기술 발전 공헌상으로 훈장을 받으실 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과로라고 보도되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현재 해외 유수의 병원으로 비밀리에 옮겨지신 상태입니다." "뭡니까?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겁니까?" "......간암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생각해 보라. 그 무거운 "간암"이라는 말을 듣고 내 기분이 어땠을지. 그 때 내가 느꼈을 그 유쾌 상쾌 통쾌한 감정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것이었을까, 한 번 생각을 해 보란 말이다. 나는 망했고, 마누라도 나를 버리고, 세상에 손가락질 받는 외톨이가 되어 의욕도 희망도 잃고 그냥 무너져 내리는 처지였다. 그리고, 나를 망하게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면서 나를 망하게 했던 주웅길 회장은 천하의 부를 움켜쥐고 만인의 칭송을 받는 영웅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법의 심판은 오히려 나를 짓뭉개는 선두에 서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은 도리어 냉담함으로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런데, 오직 죽음의 신만이 지금 그 공명정대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신, 그가 가장 통렬한 저주로 우주의 모든 생명에게 휘둘렀던 수명의 단두대는, 나에게는 수십년은 호흡하고 사고하고 운동할 건장한 육체를 주었으면서, 주웅길 회장에게는 끔찍하게도 귀여운 간암덩어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때처럼 신나고 즐거운 복수감의 순간이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조금은 문제가 있으셨던 교우관계 때문에, 회장님께서는 성병을 얻으셨습니다. 때문에 몸의 다른 부분이 많이 망가지셨습니다. 급히 간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시면 회장님께서는 당장 반년도 내다보기 어려우십니다." "저는 CPU 연구원이지 의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드래고니언 주식회사 정보부에서는 회사 임직원들과, 드래고니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던 일반시민들의 의료기록을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회장님이 면역체계를 거스르지 않는 HLA 패턴을 갖고 있는 사람은 두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 두 명의 간이 회장님께 이식해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둘 중에 한 명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한 명은 72세의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기꺼이 회장님에게 간을 기증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수술중에 심장이 견디지 못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간을 찾아 선생님께 찾아 온 것입니다." "왜, 저를 먼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칠십이 넘은 노인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다가는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건 뻔한데요."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선생님과 저희 회사의 좋지 못한 관계의 기억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협조해주시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도와 주십시오. 선생님. 간의 25%정도만 절제해서 이식하면 됩니다. 그 정도로는 일상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운동도 마음껏 하실 수 있습니다." 뻔뻔해라. 뻔뻔해라. 아, 뻔뻔하고도 뻔뻔해라. 돈 좀 더 받고 연구소를 외국 회사에 팔아치우기 위해서, 그들은 나와 최 박사님을 매국노로 몰아 감방에 집어 넣지 않았는가. 그들은 내 인생이 어떻게 깨어질지, 내가 내 사랑하는 아내 영혜를, 또 내 인생의 모든 꿈이었던 작은 미래를 잃고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게 될 지, 그 딴 건 한 번 잠깐 생각도 해 본 적 없을 작자들 아니었는가. 그런데, 지금 문란한 엽색행각 덕분에 병을 얻어 두목이 죽을 위기가 되자, 나에게 찾아와서 내 간을 떼어 달라고 한다라. "간 수술을 했던 노인에게 저희는 8억원의 금액을 제안했습니다. 그 영감은 8억원에 자기 목숨을 걸고 간을 내 놓았습니다. 그 정도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돈입니다." "저는 이미, 인생이 충분히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지금 이 목소리와 내가 지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악랄해 보이는 표정을 그대로 주웅길 회장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저희 회장님께서는 선생님이 누구보다 유능한 연구원임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만약 선생님이 협조해 주신다면, 선생님을 연구 개발 담당 상무로 드래고니언 사에 다시 채용하겠습니다. 채용 계약금으로 20억원을 드리고, 매년 연봉 2억5천만원의 연봉을 드리겠습니다." 대충 그 정도로 말을 맺고 회장의 비서는 돌아갔다. 괜히 더 간곡히 사정하는 모습을 보여봤자, 점점 내 기만 살게 해 줄 것이었으므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기 위해 일단 등을 돌린 것이다. 20억원에 매년 2억 5천만원이라. 그리고, 드래고니언의 임원자리이다. 나는 간을 잘라야 하고, 덕분에 주웅길은 살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계속 모아 놓은 돈으로 밤에는 변태짓을 일삼으며 돌아다니고, 낮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영웅행세를 할 것이다. 하지만, 20억원에, 드래고니언 주식회사의 상무다. 그 돈이면, 그 자리면, 내가 잃은 모든 것들을 다시 살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간곡한 마음으로 청하면 분명 영혜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혜가 옛부터 나를 사랑하던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단 말이다. 눈 딱감고 내 간을 조금 잘라 주기만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미 그 놈이 놀아나는 데 쓸 돈을 더해주자는 목적으로 내 직업을 빼앗겼고, 내 명예를 빼앗겼고, 내 집과 아내를 빼앗겼다. 그리고, 구치소와 재판정과 심문실에서 내 자유와 시간을 빼앗겼다. 나는 낙천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마음을 놈에게 빼앗겼고, 연구와 과학을 동경하던 내 의지와 내 가족을 이루고 친구와 부모에게 떳떳할 수 있는 미래마저 빼앗겼다. 그런데, 내 간을 잘라 놈에게 주라고? 그래서 다시 그 놈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 주라고? 분명히, 이것은 놓치면 안되는 기회임에 틀림 없다. 주회장이 죽으면 잠깐은 재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여전히 나는 빚쟁이에 매국노 쓰레기이고, 주회장은 영웅으로 추대 받으며 그 아들딸들은 계속 갑부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빌빌거리며 답답한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 불쌍하게 죽을 것이고, 주회장의 명성과 드래고니언 주식회사는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이 기회를 잡고, 돈을 받자. 그냥 죽어가는 생명 하나를 살려주고, 나는 다시 새 인생을 찾자. 어떤가. 장기매매가 불법이라는 사실 따위는 아무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소위 그 "법"이라는 걸 따진 결과, 무고한 무죄 피고자였던 내 인생이 재판에 끌려다니다가 이따위로 망가진 것 아닌가. 장기매매에 관한 불법성 문제는 어차피 이미 나 자신을 상대로 실력을 톡톡히 과시한바 있는 드래고니언사의 법률팀이 깨끗하게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가? 모두가 주웅길 회장의 돈냄새를 맡아 나에게 등을 돌린 지금, 삶과 죽음의 단순한 진리가 유일하게 공평한 심판을 내렸는데, 그걸 방해하는게 과연 옳은가. 그런 미신과 같은 의문이 계속 나를 혼란 스럽게 했다. 그렇게 고민속에서 며칠이 지났다. 사실, 나는 내 간을 자를까 말까 하는 그 고민을, 행복한 고민이라고 부르고 싶다. 적어도 그 동안은 내가 주웅길 회장과 그 머슴들인 드래고니언 주식회사를 완전히 쥐고 흔든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놈의 목숨을 내 손에 쥐고 있었다. 아, 이 피냄새, 간에 가득할 신선한 피냄새 얽힌, 나와 드래고니언의 싸움에서, 이 때만큼은 내가 확실한 주도권을 쥐어 판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주웅길 회장의 비서가 찾아 왔을 때도, 여전히 그는 전문가 답게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거는 조건에서는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회장님의 상태가 악화되셨습니다. 계약금 30억원에, 연봉 3억원을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상무 이상의 지위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연구를 계속하실 수 있도록 새 연구소를 건립하실 의지도 있으십니다." 그 조건, 그것은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특히 새 연구소를 세워서 주겠다는 이야기는 당장 "그래 그럽시다"라고 하고 싶을 만큼 달콤한 제안으로 들렸다. 이제는 세금 떼먹기 가짜 연구소가 아닌 연구소를 만들 수 있다. 연구소 팔아 넘기려고 연구원들에게 누명 씌워서 재판에 몇년 묶어 놓는 연구소가 아닌, 진짜 기술을 연구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그런 연구소를 내가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거야 말로 정말 꿈꿀법한 내용아닌가.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한 번 더 거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신중하자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나는 이미 그들의 제안에 넘어가 있었다. 다음날, 나는 회장 비서와 마지막으로 담판을 지었다.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약간 조건을 바꾸고 싶습니다. 계약금은 죽은 노인과 같은 8억원이면 충분합니다. 또한 상무 직위는 필요 없고, 더 이상의 연봉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제가 드래고니언에서 근무하던 그 때의 직위, 그 때의 연봉 그대로 복직만 시켜 주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간단한 요청 두 가지를 더 하고 싶습니다." "보상 조건을 더 완화해 주시다니, 정말 의로운 분이라고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두가지 요청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주웅길 회장이 사퇴하고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퇴기자회견 장에서 지금까지 기술유출범죄로 재판을 받은 연구원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사죄하고 명예 복권을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회장님의 사퇴라고요?" "둘째, 드래고니언사에 연구원과 모든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눈치가 빠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그 때 비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주회장의 사퇴와 노동조합의 설립. 그것이 내가 하루 동안 생각해낸 조건이었다. 옛 직장을 회복하고 8억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다. 20억, 30억의 돈은 분명 이끌리는 액수이긴 하나,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내가 무슨 열혈 시민 운동가라거나, 극히 고결한 인품의 도덕가라서 회장 사퇴와 노조 설립을 내 돈 대신 조건으로 내 건 것은 아니었다. 회장 사퇴와 노조 설립은 무슨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전과 바로 연결되는 문제였다. 지금 일시적으로 회장에게 30억의 돈을 받아낸다고 해봤자, 그것은 어차피 회장에게는 5억이나 10억과 아무 다를바 없는 푼돈에 불과하다. 그 돈을 받아내고 회장이 되살아나고 나면, 회장은 예전에 나를 망하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나를 망하게 할 수 있다. 나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 연구원 그 누구의 인생도 같은 방식으로 망칠 수 있다. 지금 100억을 받아내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돈 한 푼 못받고 다만 명예만 회복한다 하더라도, 그걸 앞으로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더 이상 내 인생이 놈의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지킬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편으로 내가 생각해낸 것이, 회장의 사퇴와 노동 조합 설립이었던 것이다. 돈을 많이 받더라도 회장이 다시 빼앗아가면 그만이다. 그럴 바에야, 돈을 조금 받더라도 그 돈과 내 인생의 바탕을 보장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따지고보면, 내 이익을 위해서 계산하는 간단한 산수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일이 잘 풀리길 바라겠습니다." 굳은 표정 그대로, 비서는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내 조건이 받아 들여질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나는 전화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고, 초인종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계약이 이루어졌고, 나를 채용하고 노조를 설립하고 회장이 사퇴하겠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물론 회장으로서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드래고니언사의 직원과 연구원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 아깝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 놓는다고 해도 여전히 회장은 어마어마한 억만장자였다. 어차피 이렇게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겪은 마당에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가 그냥 쌓아놓은 돈이나 쓰면서 별 욕심없이 평화롭게 여생을 즐기면서 보내면 될 것이다. 새 목숨과 평화로운 생활. 그것은 지금의 높은 자리와 교환할만한 것이다. 내 간을 떼 가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조건을 수락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짐짓 승리감에 들떴다. 그리고, 이제는 곧 모든 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제대로 된 직장에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영혜를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꿈꾸기 시작했다. 드래고니언에 대한 강박증은 점차 사라졌고, 나는 다시 드래고니언 제품인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마도 오늘 저녁 쯤에는 회장의 비서가 찾아 올거라고 생각하고 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드래고니언 신제품 텔레비전에서 기막힌 영상이 나왔다. 그것은, 어떤 돈에 환장한 놈이 자기 장기를 밀매할테니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는 뉴스였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에 커다랗게 내 얼굴과 내 이름이 나왔다. 4. 나는 넋을 잃고 뉴스를 바라 보았다. 뉴스에서는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오고,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기술강국, 과학강국으로 이끌어온 기업가 영웅 주웅길 회장이 지금 간암으로 목숨이 위태롭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앵커의 목소리는 정말 걱정스러웠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는 주웅길의 모습은 정말 불쌍해 보여서, 망할 나 자신까지 그 자식이 측은할 정도 였다. "주 회장의 유일한 희망은 간 이식 수술 뿐입니다. 그러나, 희귀체질인 주 회장에게 간을 이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장기 이식의 대가로 거액의 불법자금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자의 그 대사와 함께, 다시 한 번 내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었다. 내 본명을 공개한 것은 드래고니언이 스폰서로 있는 방송사 한 곳 뿐이었지만, 내 얼굴과 이 뉴스 자체를 보도한 것은 온갖 방송, 신문, 잡지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것이야 말로 보기 드문 아름다운 대특종이었다. 억만장자 기업가가 죽는데, 그 목숨을 담보로 끼어든 불법 장기 밀매꾼이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극적인 소식이었다. 나는 어디든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큰일이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전화 옆으로 걸어 갈 수가 없었다. "검찰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법을 위반하고 환자를 우롱하는 불법 장기 매매는 엄정히 다스려야 한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따라서 간 이식을 미끼로 거액을 요구한 용의자는 구속 및 형사처벌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 그렇게 방에 울려 퍼졌다. 혼자 방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그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몇 달 째 혼자 앉아 있는 그 방에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다시 예전의 삶을 되찾을 거라고 즐거워했던 내 희망을 산산히 박살내는 그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는 일단 구속부터 되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구속 수사와 불구속 수사를 판단하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고니언 사측의 제보를 받은 검찰은 일단 나를 구치소에 집어 넣고 보았다. "용의자의 장기 이식 대가로, 30억원의 계약금과 3억원의 연봉, 그리고 상무 이상의 직위가 조건으로 걸렸다고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용의자는 일전에도 우리나라 기술을 일본으로 빼돌리려 했다는 파렴치한 지능범의 의혹을 받은 바 있음을 저희 방송사에서 단독으로 보도 해 드립니다." 방송과 신문은 미친듯이 불타올랐다. 내가 제시한 조건이 아니라, 드래고니언이 나에게 제시했던 조건이 마치 내가 목숨을 담보로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그리고, 내가 분명히 무혐의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두고, "의혹"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를 매국노 기술유출범으로 몰아붙였다. 사실, 그래야 사건이 재미있어 지는 것이다. 나는 돈에 미친 썩어 빠진 지식인으로, 회사의 기술을 빼돌리려다 걸린적 있다. 다행히 기술유출은 막았지만 나는 미꾸라지처럼 처벌을 피해갔다. 그리고, 그 놈이 거기에 앙심을 품고 이제는 회장의 목숨을 담보로 불법 장기 밀매로 거액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속, 우리들의 영웅은 지금 산소호흡기를 달고 초라한 몰골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악당이. 이 따위 나라를 좀 먹는 벌레가. 나는 무슨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악마처럼 선전 되었다. 사람들은 모였다하면 내 욕을 하곤 했다. 사람들은 "주웅길 회장을 살립시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수천명씩 모여 촛불 시위를 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분명 주웅길 회장 같은 훌륭한 분이 있으시기 때문이거든요. 우리 국민의 힘으로, 꼭 살려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내 뱃속에서 간을 잘라 끄집어 내자고 외쳤다. 곧, 간 기증 운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절절한 글을 올려, 주웅길 회장을 위해서는 간이 아니라 심장을 나눠주고 목숨도 내어 줄 수 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감격했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 감동적인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 시대의 의인으로 보도하며 칭송했다. 드래고니언 병원 앞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사람들이 자기 피를 검사하며 간을 기증할 수 있는지 알아 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희생적인 작은 영웅으로 보이고 싶어한 국회의원들이나 지방자치 선거 후보들도 꽤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회장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회장의 체질에 맞는 간은 몹시 드문 것이며, 그걸 달고 살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것 말이다. 그들이 간을 기증하느니, 목숨도 내 놓느니 쇼를 하며 설치지만, 결국 간을 떼내야 하는 사람은 나다. "그렇다면 인간의 간의 25%의 적정 가격은 얼마인가?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5천만원에서 1억원 사이가 현실적인 가격이라는 것입니다." "암시장에서 보통 간의 가격은 5천만원 이상 1억원 이하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다만 희귀체질의 경우는 2억원에서 5억원을 호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내 실정법상 장기 매매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설령 장기매매 용의자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터무니 없는 조건을 철회한다고 하여도, 그에 대한 대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인간의 생명의 필수요소인 장기를 매매하고 돈으로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사고 판다는 것이거든요. 이건 법정의상으로도, 도의적으로나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텔레비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기매매가 불법이다. 그런즉,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된 지금, 내가 회장에게 간을 떼어 준다고 해도 10원, 100원이라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불법을 저지른 것이 되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갈 것이다. 물론, 내 간은, 나의 간인 만큼, 내게는 간을 떼 주지 않을 자유도 있다. 문제는 내가 내 간을 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당장 밟아 죽여야할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줄잡아 수천만명이라는데 있었다. 나는 강제로 간을 뜯겨야 할 판이었는데, 아무런 대가도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할 상황으로 몰려버린 것이었다. 내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번에 구치소에 처박혔을 때는 지난 번과는 다르게 그렇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번 겪었던 일인 만큼 자포자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이번에는 사건을 조사하는 수사관들과 검사들이 진실을 금방 알아챘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내가 먼저 회장이 간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또 비밀리에 그 HLA 패턴을 알아서 내 간을 떼 주겠다고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에는 수사관들 중에도 심정적으로 나에게 동정적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쇠창살 속에 갖혀 있다는 사실과,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비난한다는 사실은 아무 변함이 없는 데, 몇몇 사람들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준다는 그 옹졸한 점 하나가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굉장히 서글퍼졌다. 그만큼 나는 비참한 처지가 되어, 누가 조금의 동정을 보이는 것에 좋아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있던 것이었다. 나는 열흘만에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검찰측에서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거라고 했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다. "입조심, 몸조심 하세요. 시체에서 간을 빼내는 것은 동의 없이도 간단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사방에서 당신 한 사람 죽이고 대신 주 회장 살려야 겠다는 사람들 많아요." "예?" "물론, 말 뿐이겠지. 제정신에 정말로 그런 짓하는 사람이 없을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도 있고, 또 술취한 사람들도 많거든. 그럴 가능성이 많지는 않겠지만, 세상 막사는 조직폭력배나 그런 애들 중에 갑자기 영웅심리에 불타서 주회장 살리는 일이랍시고 당신 죽이려드는 사람도 있을거고... 사실, 일이 이렇게된 마당에 그런 애들 한테 몇 푼 쥐어주고 주회장 쪽에서 사주할 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야." 내 나이 또래의 한 젊은 수사관은 나를 붙들고 그렇게 이야기 했다. "미안해요. 나도 내 인생이 있고, 가족이 있거든요. 워낙 드래고니언쪽하고 깊숙이 관련된 일이라, 내가 나서서 선생님을 보호해주는 것은 너무 저한테 위험합니다. 이해하시죠?" 암. 백번천번, 뼈저리게 이해하고 말고. 바로 저렇게 몸을 사렸어야 했는데.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그 수사관이 빌려준 검은 양복을 입고 구치소에서 나왔다. 거기 잡혀갈 때 입었던 가로 줄무늬 면티는 이미 사진이 수천번도 더 신문 방송을 탔기 때문에 자칫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무슨 영화 팬이나 코스튬 플레이 하는 사람 비슷하게, 우스꽝스러운 꼴로 나는 그렇게 한 밤중에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고 집에 걸어 왔다. 나는 계속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했다. 왠지 나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혐오의 말이나, 살의의 단어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불쑥 칼든 사람들이 나타나 나를 두들겨 패고 쓰러뜨려 잡아 죽일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매국노를 죽이려 한다"는 벽보를 붙이고,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저마다 몽둥이와 칼을 들고, 혹시 내가 나올지 모르는 구치소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들은 불법 무기 소지죄로 곧 검거되긴 했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만큼 무서워졌다. "오늘 익명의 제보자가, 문제의 장기매매 용의자가 구치소에서 출소했다는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출소사실이 비밀에 붙여지고, 불법 장기매매 용의자를 풀어준 것은 검찰에 가해진 모종의 외압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흘째 되던 날, 도대체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 내가 구치소에서 나왔다는 소식이 온갖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제 내 집이 알려지고, 내 집 앞에 무기를 든 성난 군중들이 몰려드는 것은 잠시 후일 것이다. 나는 도무지 어디에 보호를 요청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고민고민 끝에 내가 떠올린 것은 UN 산하 유네스코의 건강 보건 윤리 위원회였다. 특별히 대단한 힘이 있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라도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국제 기구 뿐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 사실 내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정말 죽을 힘을 기울였다. -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을 조사하고 분석한 보고서를 꾸몄다. 유네스코 건강 보건 윤리 위원회의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나는 어떤 것이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지 내가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갖추고, 정말 귀중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내용을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유네스코에 보낸 보고서는 예상대로 관심을 얻는데 성공했고, 유네스코의 건강 보건 윤리 위원회는 우리나라 정부에 나의 신병과 인명에 대해 책임감 있는 보호 조치를 취하라는 권고 서한을 보내왔다. 유네스코에서는 그 사실을 나에게 E-mail로 알려왔고, 나를 측은하게 여긴 담당자는 나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하고, 정 안심이 안되면 스위스의 자기 집으로 피신하러 오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유네스코의 권고 서한이라면, 전통적으로 UN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부는 생색내기용으로라도 무언가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경찰관 두서넛 쯤은 집에 배치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충동에 달려들 생각 없는 열혈용사 몇몇 쯤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속보 입니다. 드래고니언 주웅길 회장 장기 매매 협박 사건을 검찰이 수사 중인 가운데, 사건의 용의자를 빼내라는 국제기구의 압력이 있었다는 소식입니다." "최근 선진국의 세계화 관련 압력이 거세지고, 국제 기구의 통상 압박이 극심한 가운데, 드래고니언 주웅길 회장의 목숨을 노린 용의자를 국제기구가 나서서 보호하겠다는 서한이 전달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드래고니언 주웅길 회장의 목숨을 앗아가고야 말겠다는, 선진국들의 의지가 개입된 처사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은, 유네스코의 행동에 걸었던 내 기대를 저버렸다. 유네스코가 내 목숨을 보호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나라 경제의 상징인 주웅길 회장과 경제 약탈자인 외국 열강들의 대결구도로 와전 되어 버렸다. 드래고니언 사의 제품에 타격을 받은 미국과 일본의 전자회사, 반도체 회사들이 국제기구에 압력을 넣어 주웅길 회장을 죽이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침탈하는 강대국의 악랄한 음모에 맞서자!" "겉으로는 세계 평화, 속으로는 살인 침략" 문제가 애국주의로 비화되자, 사태는 겉잡을 수 없어 졌다. 주웅길 회장을 살리는 것이 드래고니언을 살리는 것이요, 드래고니언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것이며,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었다. 누대에 걸쳐 약소국을 침탈해온 저 악마같은 강대국 부자들에 맞서는 것은 무엇보다 숭고한 멋진 일이었고, 그 강대국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탐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제 배를 채우려고 한 나는, 내 간을 내놓고 몇백번이고 죽어야 마땅했다. 사방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쓸데없이 미국 대사관이나 일본 대사관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며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전투 경찰들과 성난 군중들 사이의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지키려는 마지막 애국자를, 들개같은 강대국놈들과 거기에 결탁해 피를 빠는 악랄한 매국노가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감격에 차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시위대의 여인은 소리를 질렀다. 수사관이 전해 오는 흉흉한 소문에 따르면, 이 골치아픈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CIA이나 일본 방위청 쪽에서 요원을 보내 나를 잡아 죽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리해도, 어떻게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망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30억원 받고 간 떼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게 세상에 밝혀진 지금은 나는 괜히 간만 떼주고, 사람들에게 욕은 있는대로 다 들어먹고, 돈은 한 푼도 못 받고, 영영 어디를 가더라도 매국노의 낙인만 따라다닐 것 아닌가. 이미, 나는 직장과 재산과 가족을 잃은 상태였다. 억울했다. 울화가 치미는 그 심정은 지난 얼마간의 시간동안 나에게는 산소를 들이쉬고 이산화탄소를 내쉬는 것과 같게 늦겨질 만큼 항상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렇다해도,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또다른 공포였다. "우리 경제와 기술 발전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주웅길 회장. 이제 그는 어쩌면 우리가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내가 봐도 불쌍하기 그지 없는 주웅길 회장의 지금 모습이 나왔다. 그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채, 온 몸에 수십개의 관을 꽂고 갸냘픈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그래픽처리로, 그가 얼마전 회사 광고를 촬영하며 찍었던 해맑은 미소의 사진이 겹쳐져 지나갔다. 주웅길 회장의 그 모습은 정말 나라의 영웅에 걸맞는 위풍당당하고도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그는 곧 생명이 꺼질듯한 모습으로 어느 먼 외국의 병원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마치 악령처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내 등뒤에 붙어 이 긴시간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영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오랫만에 내가 사랑하는, 내가 아내라고 불렀던 유일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던 것 뿐이다. 하지만 신호가 가는 가 싶을 때,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영혜도, 영혜도 지금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영혜도 분명히 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 않을까. 영혜는 나를 사랑했고, 그런 그녀도 마침 지금 내가 전화를 걸다가 못다하고 전화를 끊었던 것 처럼, 바로 지금 이순간 전화를 들고 망설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전화를 걸다말고 바로 나처럼 끊었던 것 아닐까. 갑자기 나는 영혜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영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빌어먹을 놈의 간이 콩알만해졌지만,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그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신호가 갔다. 그리고 또 그만큼 계속 전화기속의 전자음이 귀에 울렸다. 영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좀 더 기다리며 계속 신호 울리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영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기다려 보았지만, 영혜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외로워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데,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뺨에 웃기지도 않는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평생 가장 오랫동안 전화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날이 밝자, 나는 나에게 선글라스와 검은 양복을 빌려 주었던 수사관에게 연락했다. "간을 기증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주회장 쪽과 연결해 주십시오. 다만, 조건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제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그 시신으로부터 간을 적출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앞으로 그냥 조용히 사는 것만 바랄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곧, 주웅길 회장의 비서 쪽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 내 입을 막으려면 정말로 나를 없애고 내 시체에서 간을 빼내는 것이 더 유리했겠지만, 그들은 내 마지막 조건은 수락했다. 그것은 내 목숨을 존중해서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기다릴 여유가 없이 주 회장의 목숨이 위급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제안에 따라, 나는 비밀리에 이송되기 위해 내 집앞에서 마취되어 비닐 자루에 들어가 주회장이 입원한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병원은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바깥으로 이국적인 하얀 집들과, 멀리 파란 바다가 보였다. 바다, 조용하고 넓게 펼쳐진, 시원한 바다였다. 한참동안이나 누운채로 쳐다보고 있었도, 그 바다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경치일 뿐인데도 실증 나지 않았다. 하늘은 더할 수 없이 깨끗하고 맑았고, 뭉게구름들이 조용히 떠 가고 있었다. 평화롭고도 기분 좋을만한 오후의 햇살이 온 세상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병원으로도 그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키가 작고 재미있게 생긴 백인 의사가 들어왔다. 간호사가 내가 정신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Kaló mesiméri!" 언뜻 듣기에, 이탈리아나 그리스, 루마니아 쯤의 말 같은 말로 그가 인사했다. 목소리는 경쾌했다. 곧 드래고니언 직원으로 보이는 통역이 들어와 그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여기는 그리스 미코노스의 드래고니언 병원 입니다. 회장님께서 상태가 많이 안좋으셔서요, 어쩔 수 없이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획보다 간을 좀 더 절제 했습니다. 40%정도 떼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환자가 발작을 일으켜서 실수가 있었고요, 결과적으로 총 60% 정도 간을 떼어 내야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십니다." 나는 25%만 떼낸다던 내 간을 절반이 넘게 잘라냈다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창밖 경치를 봤다. 경치를 보려고 앉으려고 하니까, 배가 정말 많이 아파왔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초록색 언덕과, 그 언덕에 가득 핀 들꽃들은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한국의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이곳은 따뜻했고, 한 줄기 바다 바람은 시원했다. 통역은 계속 의사의 말을 통역했다. "선생님 간이 원래의 40% 밖에 없으시기 때문에, 관리를 안해 주시면 갑자기 마비나 발작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대씩, 간 자극제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 약은 그렇게 비싸지는 않습니다만, 보험 적용이 안되는 품목이라, 아마 돌아가신 다음에 사시면 1회분에 30 달러 정도 들겁니다. 이곳 병원에서 1개월치를 한 꺼번에 사시면 1회분당 20달러 정도로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회복 되는 대로 밖에 나가, 미코노스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그리스의 미코노스 바닷가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론, 여기로 끌려올 때 돈은 한 푼도 가져오지 못했고, 실직 후에 신용카드도 정지되었던 터라 나는 돌아갈 비행기표조차 살 수 없었다. 주회장이 지옥에서 돌아온 영웅으로 손을 흔들며 인천공항에 나타나 지지자들의 꽃다발을 받을 때, 나는 돈이 없어서 그리스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나는 계획대로 술집을 차리신 최박사님께 돈을 빌려 비행기표를 산 후에야 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한 유네스코와의 인연으로 그때부터 유네스코 연구과제를 맡을 수 있었고, 거기에 틈틈히 최대한 교수를 뽑지 않으려고 버티는 대학들을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뛰면 적당히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내 간을 절반쯤이나 떼어간 덕택에 주회장은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내 간은 정말 건강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7개월 뒤, 주웅길 회장은 미국 LA 헐리우드의 저택에서 배우들을 불러모아 비밀 파티를 열다가, 자기집 풀장에서 죽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익사라고 했다. 5. 어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나는 분명히 누구보다 말짱한 제정신이었다. 하지만, 오늘 술집에서 정말 무슨 영감처럼 이렇게 길게 옛이야기를 하는 지금은, 분명 어느 정도 취기에 젖었음이 확실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나 애들 붙잡아 놓고 자기 이야기하는 그 고전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늙수레함. 과연, 나는 그녀에게 어울릴 사람이 아니다. "간이 40% 밖에 안 남아서, 간 자극제를 하루에 한 대씩 안 맞으면 안되거든. 그런데, 간 자극제라는게 하루에 30달러 씩이니까 이게 꽤 비싸다고. 그래서 그 대신에 간 자극용으로 알콜을 조금씩 마시는 거예요. 생리학과 교수들이랑 의사들에게 물어보니까, 취하지만 않으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도수가 높은 걸로 마시면 자주 마시기 전에 간에 무리도 가고, 또 술취하면 일도 못하니까, 도수 낮은 맥주로 계속 마시는 거예요." 나는 웃어 보이려다가, 그러면 너무 유치하게 무용담 자랑하는 사람처럼 보일 거 같아 관뒀다. 대신 그냥 물통을 입에 대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얼굴 표정을 막았다. 왜 그런거 있지 않는가, 어린아이가 맹장수술하고 나면, 자기 배에 엄청 큰 흉터 있다고 자랑하는거. 정말 엄청 아팠다고 자랑하는 듯한 그 유치한 모습 있잖은가. 그렇게 보이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항상 맥주를 들고 다니는 거구나. 그래서, 어제도 술에 취해서 그냥 그런 거구나."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던 그 두 눈에는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눈물이 맺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안타까운 눈빛은, 세상을 안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을 다 우습게 보이게 할만큼, 진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주려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바보 같은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분명히 언젠가는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끝날 것이 뻔한 그 마음에 온 정신을 맡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어제는 분명,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취해서." 그리고 나는 일부러 좀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 농담에 그녀는 하. 하면서 한 번 웃고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그녀는 콧물도 닦았다. 내 표정은 반사적으로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보더니, 그녀는 그게 무슨 코메디라고, 웃으면서 더 많은 콧물을 닦았다. 나는, 예상과는 또 달라진 상황에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면서 보니, 유리잔을 닦고 있던, 최박사님이 이쪽을 보면서 아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2006년 1월, 서대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