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
·1971년 4월 19일생
·2남중 막내
·173cm, 53kg
·서울대 작곡과 재학중
·'93년 <달빛의 노래>로 제 4회 유재하 가요제에서 대상
·'94년 TOY 1집 발표 이후 해군 홍보단 입대
·'95년 11월 제대
·현 MBC 라디오 FM 음악도시 진행
·전자우편 : toy@df.co.kr
·팬레터 주소 : 서울시 강남구 대치4동 889-11 대치빌딩 18층
음악제작 2팀 토이 (우 135-284)
Toy
토이는 원래 유희열과 윤정오로 결성되었는데 '94년 발표한 1집 <내 마음속에>라는 잔잔한
노래로 인기를 모으던 중 윤정오의 유학과 유희열의 입대 문제로 아쉬움 속에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본격적 (물론, 군복무 중에도 유희열은 이장우와 이승환 앨범에 곡을
주기도 하며 완전히 음악계에서 손 뗀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활동을 하면서 그룹명 '토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는데 솔로로 자신의 이름을 걸려하니 많은 객원가수들이 참여해
주었고 토이의 이미지를 그대로 붙여가는 게 옳을 것 같아 'TOY'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2집
앨범을 낸 토이는 유희열의 프로젝트 그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외로운 천재 유희열
글/구성희
1971년 4월 19일 한국의 현대사를 바꿔놓은 혁명을 기리며 전국의 대학생들이 4·19 기념 마라톤
대회를 연 그시간. 어느 산부인과 작은 병실 안에선 가요계의 혁명을 일으킬 한 사내아이가 세상에
모습을 들어냈다. 신생아 희열은 가요계를 책임질 대부답게 간호원들을 향해 여유있게
웃어주었다. 그 특유의 웃음으로 말이다. (으하하하하~)
희 열 :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혼자있는 시간을 즐겼다.
사색을 즐기는 소년이었다고나 할까.
한편의 시를 읽으면 시상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고 이런걸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가히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진달래꽃을 읽고난 유희열은 감명을 받고 이런 음악을 생각해 내었다고 한다.
진달래 짜라라짠~ 진달래 짜라라짠~ 진달래 꽃 피었네~~~
이렇듯 음악에 대한 소질을 남몰래 키워오던 그는 음악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게 된다.
중3때 였다. 우연히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들어간 작은 콘써트장. 그곳엔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대엔 기타를 메고 땀에 흠뻑 젖어 열창하는 가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희 열 : 그때 들국화의 노래를 듣는 순간 머리 끝까지 전율을 느꼈고 눈물이 핑 돌 정도의 찡한 감동을 받았어요
나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기타를 치게 되었어요
이렇게 기타에 흠뻑 빠져있는 모습을 본 그의 사촌형이 놀라운 그의 기타 실력을 듣고 "야~ 너
한 기타 치는데 노래 한번 만들어 봐라" 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를 꺼냈고 그렇지 않아도
쉼없이 떠오르는 악상을 주체할 수 없었던 유희열은 단 30분만에 노래 한 곡을 만들어 냈다.
"야윈 어깨로 흘러 내리는 너무 슬픈 미련때문에~~"
김형령(?)의 최고의 히트곡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희 열 : 그냥 한 번 만들어 본 곡이었는데 사촌형이 덜컥 앨범에 넣어 버렸어요.
그리고 조금 알려지기 시작을 했죠. 그때 저의 나이는 15살 이었습니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희열. 하지만 그가 이렇게 음악에 빠져들고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들게된 이유는 정작 다른 곳에도 있었다.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부모님께서 이혼을 결정하셨고 그는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에 대한 천재성은 사실 남몰래 삼켜야 했던 외로움을 그 어떤것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던 외로운 천재 유희열의 고백서 같은 것이었다.
나 이제 음악해요
유희열이 어느덧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어 "푸른 돛"
이라는 밴드를 만들었고 성격도 비슷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도 비슷한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난 김세황이라고 해. 나도 너처럼
한기타 치는데 들어볼래? "
"그리고 난 지누라고 해. 나도
한노래 하는데 들어볼래?
형 난 잘 모르겠어~ 내입엔 쓰기만해.
어른들의 세곈 이상해~ "
희열은 공부도 공부지만 이렇게 음악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원래 미술을 전공하고자 했던 그는 음악의 묘미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고
급기야는 고3 시절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이 왔다.
희 열 : 아~ 난 왜 모든지 다 잘하는 걸까? 법대 의대도 갈수 있을꺼 같애. 하지만 난 결심했어.
난 작곡과야. 작곡과를 들어갈테얏!
그때부터 그는 작곡과를 들어가기 위해 피아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시기다 라는 신념을 가졌던 그는 정말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희 열 : 실기 시험 볼때 커튼을 치고 연주를 하고 손모양 같은건 안본다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빠른곡으로 시험관을 감동시켜야겠다고 짧은 머리로 생각을 했죠.
닭발같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연주했던 희열의 실력에 시험관들은 감탄에 감탄을
하게 된다.
"대단한 실력인데~"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저런 연주를..."
희 열 : 그리고 평소 정말 좋아하던 유재하씨의 추모가요제에 나가 작곡실력을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출전을 했고 정말 뜻하지 않게 대상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가요계에 조심스럽게 입문한 유희열은 성큼 성큼 그의 음악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간다.
해군 홍보단.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그가 평소 하던 음악과 거리가 먼 음악을 해야 했다.
희 열 : 섬으로 다니면서 마을 주민들을 위해 공연을 했어요. 그때 연주했던 곡들이 주로 전부 이런(트롯트) 곡들 이었죠.
그나마 연주를 할 수있고 고등학교때부터 음악을 함께 했던 지누가 있었기에 그의 군대생활은
외롭고 힘들진 않았다. 제대를 할 무렵 본격적인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윤정오라는
친구와 함께 토이를 결성하게 된다. 물론 아는 사람들만 아는 무명의 그룹에 불과했고 배고픈
예술가의 설움을 만끽해야 했다.
마지막 로맨티스트 유희열
유희열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은 모두 느끼지만 그의 노랫말에는 그가 겪었던 사랑에 대한
기쁨이, 이별의 아픔이, 또다른 만남에 대한 행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노래가
히트를 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겪었던 모든일들이 솔직한 느낌으로 표현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첫사랑. 때는 바야흐로 대학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 열 : 러브 어페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네트 베닝의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고 계실꺼예요.
바로 그런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고 저는 그 여인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지만 그녀에게 다가서기엔 그가 가진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선물 가게에서 본 인디언 블루 빛의 목도리를 사주고 싶어 다른 가수들의 세션맨으로 열심히
쫓아다녔고 밤을 지새며 곡을 쓰곤 했다.
한푼 두푼 모아지는 돈을 보며 행복해 했고 인디언 블루 빛의 목도리를 예쁘게 포장해 들고
소년같은 들뜬 마음으로 그녀앞에 선 유희열은 그녀에게 절망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는...
인생의 절대적인 행복을 안겨다준 그녀가 떠난 후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못마시던 술도
마음껏 마셨고 외롭다 라고 차마 얘기도 꺼내지 못할 만큼 그녀가 떠난 마음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뻥 뚫린 가슴 사이로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공허한 느낌. 하지만 그렇게만 지낼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쩌면 어릴적 부터 그는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
음악보다도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유희열.
난 누구보다도 그가 행복하게 살꺼라는 확신을 한다. 그는 사랑을 베풀줄 알고 사람을 사랑할줄
알고 사랑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