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최근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서 드러난 일본의 극우세력들의 역사인식 태도나, 종군위안부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 시대의 일제의 행위에 대한 보상문제의 해결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가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전후보상문제에 대한 재판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의 국민들에 의한 청구 소송으로 일본에서 이루어졌지만, 승소와 함께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보시고 계신 일람표에 나타난 1971년 손진두피폭수첩 재판 이래 2000년 9월 12일까지의 66건의 소송 건 가운데 32건의 소송이 한국인에 의해 제기된 것입니다. 유형별로 나누면, 종군위안부 재판, 원폭피해자 재판, 사할린 잔류자 재판, 군인 군속재산 손해보상청구소송, 기업상대 징용자 소송, 재일한국인 소송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소송 가운데에서 승소한 건은 놀랍게도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종전 직후, 한국 정부 수립과정부터 60년대까지 계속된 한 일 교섭사에서 찾을 수 있고, 따라서 저희는 해방 후부터 65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까 합니다.

본론


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한일국교정상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적극적인 전쟁 배상의 요구를 준비
하게 됩니다. 즉, 이승만 정권은 한국병합에 이은 일본의 조선통치 
자체가 불법이라는 인식 하에, 전쟁으로 인한 손해에 대한 배상 요구를
 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연합국 주최로 이루어지는 대일 
강화조약에 연합국 측의 교전국 자격으로 참여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
졌습니다. 그러나 '교전국 자격'의 타당성에 대한 연합국 소속의 국가
들의 의견이 분분한데다가,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어 일본에 
전쟁 배상 요구를 하고, 상당한 액수가 될 그 배상액을 일본이 응해
야 할 경우가 생기면, 결국은 일본의 부흥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점령
국으로서의 미국에게도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
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으로 한국은 공식적인 강화 조약
의 서명국 자격은 얻을 수 없었고, 비공식적인 옵저버 자격으로만 강
화회의에의 참석을 허용받았습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의 계획과는 달리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
이 붕괴되기 전까지 4번에 걸쳐 이루어진 한일회담은 양국 간에 일어
난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 때문에 모두 결렬되었습니
다. 혁명 후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고, 신정권은 일본과의 현안해결
과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밝혔습니다. 이 시기에는 
일본에서도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였는데, 새로 등장한 이케다 정권 역
시 한일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권 교체 후 이
루어진 5차 회담은 5. 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기는 했지만, 회담 중 
이루어진 여러 번의 토의를 통해 '경제협력방식'을 통한 청구권 문제
의 해결이 논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5차 회담에서는 현재의 보상문
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인의 보상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는데, 철
저한 법적 근거를 요구하는 일본측의 태도 때문에 구체적인 금액의 산
정에까지는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그 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한 박정희 장군은 보다 적극적인 대일 외교 정책을 수립하였고, 일본 
역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최전방블록으로서의 한국이 하루빨리 경제
적인 기초를 구축하기 원했으며 그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국교정
상화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회담에서 보상금
액의 명목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났습니다. 즉, 배상금액의 명목에 대
해 한국측에서는 우리의 청구권 행사에 의한 일본의 배상금 지불이라
는 표현을 쓰기를 원했지만 일본측에서는 독립축하금이나 경제협력의 
표현을 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국제적으로는 냉전 구도
가 더욱 심해지는 60년대였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는 일본의 관여를 통
해 하루 빨리 한국 경제가 재건되기를 원했고, 한국의 박정희 정권 역
시 경제개발 및 재건이 군사정권의 제1목표였기 때문에 청구권 자금
을 비롯한 일본의 자본을 도입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상황이었습니
다. 그래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오히라 당시 일본외상
은 '무상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민관 차관 1억 달러 이상'이
라는 총액과 이로써 양국간의 청구권문제를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간
주하기로 잠정적 합의를 했고, 1965년 양국간의 한일기본조약의 체결
로 마무리지어졌습니다. 

2. 한일조약의 문제점

 이렇게 양측 정부의 필요에 따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의 이면에는 많
은 문제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선 기본조약 제 2조를 살펴보
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는 조항에 대해서, 
한국측은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을 조약하던 날부터 무효라고 해
석하는 반면에 일본측은 '합방'조약은 독립한 후 지금 상황에서는 무
효가 된 것이지만 조약 당시에는 유효한 것, 즉 '합방'이 합법적이었
던 것이라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 드린 3억불의 
무상공여와 2억불의 대여를 해석하는 것도, 한국측에서는 우리의 청구
권 행사에 의해서 얻어진 배상금이라는 해석을 했지만, 일본측에서는 
합법적인 지배에 대한 배상은 성립될 수가 없고, 단지 유무상의 경제
협력을 해주는 대신 한국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은 더 이상 이야기 하
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은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 경제논리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해주고, 그에 따라 어떠한 사죄와 책임추궁도 이끌어내
지 못한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3. 한일조약 체결 이후 양 정부의 과거사 인식

 처음에 보여드린 챠트를 통해 설명해 드렸듯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사람 중 승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일조약으로 
국가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국가와 
관계없이 개인이 일본 정부에 대해 가지는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것은 
한일 모두 인정하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재판부는 '위안부' 문
제 등의 대부분의 전후보상문제를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시키
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에는 '인도에 대한 범죄는 시효가 없
다'고 규정하고 있고, 일본 국내의 사법 제도에 의하서 인권유린이 구
제 받지 못할 때는 국제인권기관에 구제신청을 낼 수 있게 되어 있습
니다. 물론 국제인권법이라는 것이 힘에 의한 강제성을 바탕으로 하
는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서 일본 정부에 계속적인 권
고와 비판을 제기해야 하는 우리 정부 역시 일본 법원에서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된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 의
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척결하
는 데 국회의원들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양국의 보상문제가 마무리됐다
는 입장이지만, 의회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미군포로 등 개인 피해자들
의 대일 보상청구권을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그 결과 일본제국군 관
련 문서공개법이나 징용배상특별법, 미국포로정의법안 등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또 이런 의회의 움직임을 미 행정부는 대일 외교카드
로 적절히 활용해왔습니다. 또한 일본이나 한국에 없는 집단소송제도
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이고 빠른 소송을 기대할 수 있고, 종
합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습
니다. 

4. 개인청구권을 통한 전후보상문제의 처리

 정부가 이렇게 과거사 처리에 대해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함에 따
라, 필연적으로 민간 단체, 국제 단체 간의 네트워크는 더욱 긴밀해졌
습니다.‘강제연행 기업책임 추급재판 네트워크’(이하 재판 네트워
크)라는 이름의 일본 민간단체는 일본에서 이뤄지는 한국인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민간단체로 위안부·강제징용 피해보상 
입법화를 요구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60건 이상의 위
안부·강제징용 소송이 진행중이고, 미국에서는 세 개의 소송팀이 일
본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강제징용 소송을 제기한 상황입니다. 그 중 
LA소송팀은 위안부 소송도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LA소송팀에는 한국
인 변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고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와 대학
생들이 중심이 된 한인단체들 역시 전폭적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으
며, 이들은 한국의 정대협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의 민
간단체를 비롯해 일본의 민간단체들과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변호인단 역시 정보교류를 목적으로 한 긴밀한 채널
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9월14일 강제징용 피해자 집
단소송에서 모처럼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1999년 10월 캘리포
니아주 징용배상특별법에 따라 제기된 정재원(79)씨의 오노다 시멘트
회사 상대 소송에서 담당판사가 일본쪽의 소송기각 요청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판결문을 낸 것입니다. 이번 판결은 현재 계류중인 한국인 
피해자의 징용소송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권 다른 나라 
피해자들의 징용소송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매우 중요
한 케이스로 평가됩니다.

결론

모든 보상문제의 법적 문제 제기는 방대한 규모의 진상규명이 선행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은 민간단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그 기능을 담당하지만, 그러한 민간차원의 조사는 한계가 있고, 한시적인 정부차원의 총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가 해야할 일이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65년 한일협정의 개정운동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렸듯이 한일협정의 졸속처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만 정당화 해주고, 이후 우리 민간 단체의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한일협정의 개정을 통해 진정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고, 집단소송에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합니다. 미국의 예를 한 번만 더 들겠습니다. 작년 5월 18일, 미국 상원 법률위원회는 일본이 2차대전 중 자행한 인체실험 등 전쟁범죄에 대해 미국 정부가 보유한 자료를 완전 공개하도록 촉구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6월 19이 미 하원은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원과 함께 채택했습니다. 또 9월에는 행정부 주도로 100여명의 전범특별조사단을 구성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피해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80살 이상 고령이므로 이대로 가다가는 3년 이내에 90% 가량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뜬 후에 어마어마한 거액의 배상판결을 받고,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죄를 받는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민간단체의 활발한 활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