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을 살다간 사람이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은 한마디로 북
새통이었다. 마치 실타래가 엉켜 있는 것처럼 사회는 온갖 비리, 모순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강호 대관료 및 지주의 토지 겸병과 사치 풍조가 극에 달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
갔고 하루도 안심하고 살아갈 날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부득불 무기를 들고 일어나 강
호 대지주들의 전횡과 폭압에 맞서 도처에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중앙관료들도 토지와 정
권을 둘러싸고 유혈투쟁을 벌여 나갔다.
화담이 살고간 시기는 정확히 1489 - 1546년 인데 이 50 여 년의 기간 중에 조선사회에서는
그 유명한 "4대士禍"가 발생했다.
특히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기묘사화(1519)"였다.
이
기묘사화를 통해 조광조 등과 같은 유학자 및 사림학자들이 훈구파에 의해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본 그는 벼슬에 대한 회의와 함께 은거하게 되고 저술과 학문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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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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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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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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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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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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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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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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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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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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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기는 물질적 실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화담은 기는 곧 太虛라고 한다.
이것은
곧 氣不滅論을 말하는 것인데, 화담은 이 입장에 입각하여 세상 만물의 탄생, 발전, 쇠망 및 인간
의 생사 문제를 해석한다.
화담은 이 氣一元論的 사상으로 정통理學은 물론 불교, 불교, 도교도 강하게 비판한다.
정통理
學은 理氣문제에 있어서 객관적 관념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화담은 '주재한다'(宰)의 해석을 정
통 리학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화담의 宰의 해석은 사물이 발전하는 데서 반드시 따라야 할 '법
칙'이다. 즉, 理가 氣를 주재한다는 것은 단지 氣의 작용의 법칙성일 뿐이고 선후가 없다는 理氣
일원론적인 주장을 폈다.
화담의 불교사상 비판은 다음과 같다.
불교 선가의 "空은 大覺에서 생긴다"고 함에 대해 화담은 氣가 곧 虛인데 어떻게 覺할 수 있
는가?라는 의문의 명제로써 비판한다.
또한 노장의 '無가 有를 낳을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그는 기불멸론적 입장에서 "氣가 곧
虛이다"라는 입장을 다시 한 번 주장한다.
화담의 기일원론 철학은 앞 절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氣의 나뉨으로 양과 음이 된다"는 生과
克의 모순이지만 이러한 대립들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聚散의 理가 곧 生과 克이요, 취는 化(둘)
요, 산은 妙(하나)이며 화묘는 취산의 내용이다.
그리고 화담은 대립 통일해 나가는 물질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한다.
즉 드러남과 감
추임이 하나인 道다는 것이다.(顯微無間之道 [送沈敎 義序])
화담은 格物과 독서를 통해 객관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교유한 기능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귀신이 사유를 통하게 해준다는 신비주
의적인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화담은 사물을 바라보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格物과 함께 敬(한가지에 집중해서 다른 데로 나아가지 않는 것 (敬者主一無適之謂
也 [花潭集], 卷2)의 자세로 이치를 보라고 한다.
"둘이므로 化이고 하나이므로 妙"라든지 "機가 저절로 그러하다"는 등의 그의 변증법적 주장
은 한국 철학사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서경덕의 자연관은 16세기 조선 철학에서 뛰어난 것으
로 평가되며, 조선 후반기에 나타난 선진적인 사상가들을 통해 계승 발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