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교 과정

(1) 시대적 배경

1925년 4월 18일은 '대동학원'이 창립된 날이다. 수송동에 위치한 한옥의 사랑방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모아 가르침을 시작했던 것 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일제 치하의 암흑기였다.

 3.1운동 때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항일 투쟁에 나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에 큰 타격을 주자, 일제는 종래의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로써는 도저히 지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기만적인 문화 정치를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이 문화정치라는 것은 종래의 노골적인 무력을 바꾸어 우리 민족의 지도층 인사를 매수하고 조선의 지배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다소의 출판물, 집회. 결사의 활동을 허용한 것으로서 보다 교묘하고 교활한 분열 정책의 위장에 불과했다.

 당시의 일본 수상 原敏이 '통치사견'에서 총독부의 이른 바 시정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방침으로 제반 제도를 쇄신하는 것은 금일 가장적절한 조치이며 또한 병합의 목적도 여기에서 비로소 달성 되리라고 믿는다.'고 하여 민족 말살,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문화 정치의 본질이었다.

 당시 齊藤 총독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은 전대 총독들이 이미 군대와 헌병 경찰로 식민지화의 기초 작업을 완료해 놓은 터여서 일제로서는 더 이상 무단정치를 하여 민심을 동요 시킬 필요가 없었덩 것이다.

 이러한 문화 정치에 따라서 총독부는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 대우를 한다는 불평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정무총감 水野鍊太郞은 1921년 10월 28일 전국 중학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의 교육은 民度事情에 적합치 않으면 안 된다. 획일적인 제도를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여야 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민도사정을 달리하는 조선의 교육에 있어서는 한층 이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합병 당시는 ......교육에 많은 비용도 쓰지 않고 가급적 빨리 직업을 얻게 해야 할 필요상 일본인보다 일단 앝은 교육제도를 채택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정세를 살펴보건데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또 민도도 높아졌으니, 이 제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시세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교육 방침에 따라서 총독부는 1919년 12월에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규칙을, 1920년 3월에 사립학교 규칙을, 1920년 11월에 제1차 조선교육령의 일부를 개정하였다. 그 후 총독부는 1922년 3월에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인의 교육에 무성의하였음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통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민 족 별 취 학수                              

학      교

민   족   별

취 학 자  수

인구만명에 대한 비율

비율의 비교

초  등  학  교

한  국  인
일  본  인

386,256
54,042

208.20
1,272.35

1
6

남자중등학교

한  국  인
일  본  인

9,292
4,532

5.01
106.70

1
21

여자중등학교

한  국  인일  본  인

2,208
5,458

1.19
128.50

1
107

실 업 학 교

한  국  인일  본  인

5,491
2,663

2.96
62.70

1
21

사 범 학 교

한  국  인일  본  인

1,703
611

0.92
14.38

1
16

전 문 학 교

한  국  인
일  본  인

1,020
605

0.55
14.24

1
26

대 학 예 과

한  국  인
일  본  인

89
232

0.05
5.46

1
109

                                              참고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25년도

 즉 한국의 교육은 초등학교에 있어서도 취학율이 일본인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올라 갈수록 심하여 졌다. 즉 전문학교에 있어서는 26분의 1, 대학 예과에 있어서는 109분의 1이었다. 결국 그들이 교육기관을 확장시킨 것을 한국인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본인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이르 통하여서도 이른 바 문화 정치란 것의 기민성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인근 교동, 재동학교에는 당시 여유가 있는 집의 자녀들만 입학할 수 있었고 그 밖의 아이들은 거의가 일본인 자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거의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동'의 개교는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에게 커다란 희망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교육방침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즉 일본어와 실업의 교육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 이것은 군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적어도 일본어를 해독하고, 또 어느 정도의 기술를 가지는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쟁말기에 이르러 민족말살정책을 쓰면서는 학교에서 한글의 교수를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일본의 교육 방침은 철저하게 그들의 식민정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었다.그러므로 한국인이 기대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들이었다. 그러나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이나 전문학교는 말 할 것도 없고 중등교육기관이나 초등교육기관조차도 민족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그 수가 적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보조교육기관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서 재래의 서당이 개편되어 소위 개량서당으로 발전하여 농촌 아동들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개량서당 중에는 보통학교로 승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보조교육기관의 하나로서 노동야학이 있었다. 노동야학은 이미 대한제국 말년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지만 3 .1 운동 이후에 또다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이러한 현상이 교육분야에서는 노동야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노동야학은 전국 각지의 도시나 농촌의 도시나 농촌에 두루 퍼져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사립학교가 많지 않던 남쪽 지방에 특히 많았다. 노동야학은 주로 가난한 소작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그 자제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며 부녀자만을 상대로 한 여자야학도 상당히 있었다. 대개 1년 정도의 수학 연학을 가진 노동야학은 한글과 산술을 주로 교육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민족이나 사회의 문제에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업료는 무료였으므로 경비는 유지의도움이 필요했고, 때로는 경영난에 빠지기도 하였다.

 '대동'의 초창기 즉 1925년부터 1927년 사이는 개랭서당,노동야학과 흡사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을 모아 가르쳤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교사가 남의 집 사랑채였다. 그것도 일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봉익동, 신당동 등을 전전하며 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동'의 교육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야학은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한편 하기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운동)도 농민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생활을 개선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등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대동'의 모습도 새롭게 변화되었다. 고창한 선생이 교주가 되어 가회동 208번지에 교사를 건축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1928년 3월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대동' 은 비로소 학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여러 가지 교육적 여건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