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교 과정

(2) 大東의 설립과정

1925년 4월 18일은 '大東'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날이다. 민족의 운명이 일제 침략 밑에서 암담했던 그 당시에 겨레릐 脈을 가늘 게 나마 이어보려는 민족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不學謂貧'이란 기치를 올리고 亡國恨이 지식의 빈곤에 기인됨을 통탄한 설립자 고창한 선생은 순수한 민족자본인 私財를 통털어 대동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본교의 설립이념인 '不學謂貧'을 곰곰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민족적 분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의 교육은 자국민의 교육에 중점을 두어 한국인은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소외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있던 고창한 선생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주게 된 것이다.

 당시 순수 민족 자본에 의하여 설립된 사학은 몇 개의 인문계 私學(5대 사립)에 불과하였으나 실업계 사학으로서 대동상업학교는 대표적인 갑종학교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영재들이 앞을 다투어 치열한 입시 경쟁을 거쳐 합격의 영광을 만끽하였으며 이들은 긍지를 가지고 면학에 매진하여 사회 각계에 거두로 그 기반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본교의 설립 과정에 대하여 손표수(교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교육, 문화, 경제 방면에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애국 계몽운동은 무장 독립 투쟁만큼이나 중요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큰 뜻이 열매로 맺어진 것이 1925년 4월 18일 본교의 개교였습니다.

 우리 대동의 설립자이신 고창한 선생은 1873년 강원도 횡성군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편모 슬하에서 가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청년 시절에 서울과 횡성을 오가며 행상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지만 20년만에 횡성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47세 되던 때 서울 가회동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선생에겐 친아들처럼 돌보던 고광수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나진에서 자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뒤 어느 날 선생께선 귀가 도중 한 가족의 서러운 통곡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생은 걸음을 멈추고 그 사연을 물어보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통곡하는 거요?"

 "우리가 비록 인력거꾼으로 살고 있지만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재동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지만 가난한 인력거꾼 자식이라고 불합격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었습니다. 이에 고창한 선생은 민족 독립을 위한 교육 사업을 결심하였습니다.

 당시 서복조(김구 선생 가족 보호 책임자), 이인(초대 법무부 장관), 박순천(정치인), 임영신(중앙대 설립자), 김만수(본교 초대 교장) 등과 협의하여 곧바로 학교 건립에 착수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온 장안의 인력거꾼과 물장수들은 내 자식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며 매일 수십 명씩 공사장에 나와 무보수로 일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학교가 준공되는 날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뜻을 다지며 노래하고 춤을 추니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답니다.

교가에 "애쓰고 땀흘려 모인 정성을 마음에 새겨서 잊지 맙시다." 라고 한 것은 바로 고창한 선생의 고생과 학교를 짓는데 무보수로 땀 흘린 모든 사람들의 큰 듯을 잊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大東의 설립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고창한 선생의 숭고한 뜻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동은 존재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두산은 장엄타 우뚝 서 있고    

한강수는 흐른다 쉬지 않고서
화려강산 정기 받은 우리 대동은
어두운 세상에 좋을 울리네
애쓰고 땀 흘려 모인 정성을
마음에 새겨서 잊지 맙시다
도동은 우리 학교 우리 집일세

'어두운 세상에 종을' 울린 '大東'의 초창기, 1925년 당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수송동에 처음 대동학원을 창립했을 때에 초대 교장은 金萬壽씨였다. 이때 대동은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다. 남의 집 사랑채를 빌려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초대 교장의 의욕은 대단했다.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당시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였다.

이러한 체제에서 좀더 나은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1928년 3월이었다. 서님 아동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전국의 인력거 車夫 3천여 명으로 조직된 大夫協會에서 경영하여 오던 것을 섭립자 고창한 선생이 校主가 되어 校舍를 가회동 208번지 (현재 재동국민하교 뒤쪽)에 건축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大東學校 설립 인가를 정식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학교의 형태는 전문적인 상업하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육의 열기는 대단했다. 서민의 손에 이러어진 학교라는 점에서 학교 관리자나 학생, 학부모 모두가 혼연 일체가 되어 교육에 매진 하였다. 당시에 순수한 민족 자본에 의해 설립된 학교는 매우 드문 형편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졸업생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 민족 자존의 얼을 지키고 교육의 대로를 열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