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교 과정

(4) 대동상업학교 인가

 1925년 개교 당시부터 1930년 까지 소학교의 형태로 운영되던 '대동'은 약 3년 동안의 전수학교 시절을 거쳐 마침내 5년제 상업학교로서의 출발을 하게 된다.

 그 이전 즉 1932년 8월 고창한 선생은 私財 30만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대동학원'을 설립하고 그 이듬해 1933년 10월 2일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의 30만원은 매우 큰 돈이었다. 또한 그 돈은 고창한 선생의 전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쌀 한가마니에 4원50전 할 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주저없이 희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한 선생의 교육에 대한 숭고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설립자의 평소의 주장은 '일본을 이겨야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전재산을 기꺼이 학원 설립에 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4년 2월 6일 마침내 대동상업학교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3월 26일 김만수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4월 5일에는 가희동 校舍에서 현재의 계동36번지로 교사를 옮기게 된다. 신축 건물로 이전한 대동은 본격적인 상업학교로서의 출발을 하게 된다.

 대동상업학교는 5년제 갑종 학교로 출발하였다. 3년제 을종 학교도 있었으나 대동은 경기도상, 동성, 선린 등과 함께 5년제 학교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또한 대동은 민족 정신이 투철한 학교였다.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두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창한 선생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고 있던 총독부는 3.1절만 되면 교내에 형사들을 배치하여 교직원과 학생들을 감시했다고 한다. 2회 졸업생 백언기 동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

 "그 때는 수업 시간에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상부기관에서 감사가 있을 때는 마지못해 일본어로 수업을 하는 척 했지만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우리말로 수업을 하곤 했지요. 또한 고창한 선생께서 평소에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항일 의식을 키울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총독부에서는 저희 학교를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거지요."

 이렇게 대동상업학교의 출발은 튼실한 민족 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비록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식민지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는 시대 정신으로 험난한 세월을 헤쳐온 것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미션계, 또는 관립학교로서 출발했지만 대동만큼은 순수한 민족 자본으로만 이루어진 학교라는 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 이었다.

 이런 학교를 이끈 사람 중 설립자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초대 김만수 교장이었다.

 고창한 선생과 의기 투합하여 대동을 세우고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 분이었다. 5회 졸업생 김동진, 이범직 동문은 김만수 교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 분은 민족혼이 매우 투철한 분이 었어요. 항상 근엄한 표정이 었고,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선생님의 훈화는 괸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한 훈화였지만 지금도 그 때의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어요."

 졸업생의 회고대로 김만수 교장은 대동학원의 초석이 된 분이었다. 김만수 교장은 1940년 사직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학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고창한, 김만수 선생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날의 대동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만큼 그 분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숭고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