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교 과정

(5) 설립자 고창한 선생

 고창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검소한 생활 자세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었다. 비록 무학(無學)이었지만 성실하고 꼿꼿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전수과 2회 졸업생 김형술 동문은 "평소 술을 좋아 하셨고, 술을 드시면 시조창을 하시곤 했어요. 항상 얼굴이 온화하셨고, 술을 자주 드시긴 했지만 술안주는 김치나 장아찌 정도였어요." 라고 회고하고 있다.

 한편 5회 졸업생 경태호 동문은 설립자를 다음과 같이 회고 있다.

 "민족 정신이 투철했던 분이었어요. 학교 행사 때 교육 칙어를 낭독하면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경청해야 했어요. 그 때는 총독부 지시와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고창한 선생은 短杖을 짚고 뚜벅뚜벅 그냥 걸어오시는 거예요. 서술이 퍼렇던 그때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 그 분의 꼿꼿한 정신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아무튼 무서운 게 없었던 분이예요."

 그리고 8회 졸업생 홍선희 동문은 고창한 선생이 자주 하셨던 말씀 중에 하나가 "너희들 나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였다고 한다. 절대로 길 게 이야기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 마디 하면 그것이 끝이 었다고 한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졸업생들은 그러한 한두 마디의 말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말들이 평생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고창한 선생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동창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金載瀅동문은 고창한 선생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계산(桂山) 언덕에서 자라난 大東 건아들의 정신 속에 흐르고 있는 고귀한 교훈는 서암(曙庵) 고창한 선생님이 몸소 체험하시어 가르쳐 주신 不學謂貧의 교훈입니다. 그 뜻은 배우지 않으면 가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서암 고창한 선생님의 생활 철학을 통하여 고찰한다면 不學이란 지식의 표피적인 知가 아니라 깨달음의 학문을 의미한 것이며 貧이란 마음 속에 숨어드는 가난을 가난으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 즉 능동적인 의지를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고창한 선생님의 청소년 시절에는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가난이라는 것을 굳은 의지와 용기를 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난이 숨어들 때에는 가난을 한탄하며 실망하기 쉽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가난을 역경 극복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보시는 貧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만년에 오셔서는 피와 땀으로 모으신 전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불학위빈(不學謂貧)'이라는 교훈과 더불어 우리 학교를 창립하셨던 것입니다.

 어느날 아침 조회 시간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돈을 많이 벌어라. 그리고 참다운 일을 하기 위하여 미련을 갖지 말고 써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면 '불학위빈'이란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물질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금전을 모으고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땀 흘려 버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른은 참으로 어두운 세상에 종을 울리신 분입니다.

 김재형동문의 회고에서 보듯 서암 고창한 선생은 많은 학생들에게 '불학위빈'의 진리를 깨우쳐 주신 분이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실이었다. 실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얻어진 귀중한 삶의 진실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학생들은 설립자의 정신과 고귀한 뜻에 공감하였고 졸업생들의 삶은 그 정신의 울타리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편 대동여자중학교장 김용선(金容璇) 선생은 1954년 교지 '大東' 제 10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 설립자 고창한 선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하루바삐 여러분의 뒤를 따라 그 이름을 대한민국에 떨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여러분의 학교 '大東'이나 산골에 있는 이곳 大東은 창립의 유래와 목적이 모두 동일하다.  우리 양교(兩校)의 창설의 원조이신 故 고창한 선생이 생존시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는 교가(校歌)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학원의 교가는 창설자가 동일하므로 대동상업의 교가와 동일한데 "애쓰고 땀 흘려 모인 정성을"이라는 구절은 그의 고난 가득한 생애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유시(幼時)에 그는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시고 어머님이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그 대가로서 바가지에 밥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먹고 성장하였다. 그가 성장하고 경제적인 노동의 중심지가 바로 대동여중(大東女中)이 자리하고 있는 이 고을이다. 이 고을에서 그가 어머님 품 안에서 열다섯이 되었을 때 30년이란 장구한 계획과 목적을 세우고 어머님이 아시면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는 눈물은 머금고 어머님 몰래 집을 나온 것이다.

 남처럼 어머님을 편안히 잘 모시는 것이 그의 급한 문제였고 그 방도로서는 경제적인 여유를 획득하는 것이 화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10년간 노력해서 안 되면 또 십년을 더하여 20년간 자기의 전 노력을 기울이면 안될 리가 없다. 만약 20년간 노력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30년간이면 달성 못할 리가 없다라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집을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어린 그로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상업의 자금을 조금이라도 마련하려면 남의 집 머슴을 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는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 어머님에게 편지를 한일이 있었다.

 문자를 이용했다고 하나 그는 공부를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어깨 너머로 문자를 배웠다는 것이다. 어머님이 품을 팔러 나가면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 것이 어릴적 일과 였는데 그는 이침에 나갈 때나 저녁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서당 있는 곳을 지나서 서당 어린이들의 공부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산에 올라가 혼자서 큰 소리로 외치면 그 큰 소리는 다시 자기의 귀에 반응되므로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입으로 무슨 자 무슨 자 하시었지만 실제로 잘 쓰지는 못하였다. 그의 서신은 대부분 대필(代筆)이었고 나도 대필을 한적이 있는데 그의 유식함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한자(漢字)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대학생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어머님에게 "어머님! 어머님을 편안히 모실 때가 얼마남지 아니하였으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요." 하는 안부의 편지를 올렸다. 그러나 독자(獨子)를 둔 어머님이신지라 얼마 아니 가서 병이 들어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득병하여 다리 밑에 누워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허둥지둥 다리 밑에 쓰러져 있는 어머님을 찾아가서 사과를 올리고 모자가 부등켜 안고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실수를 수차 거듭하면서 차차 상업에 대한 경험을 얻었다. 소년 때의 눈물겨운 이야기나 청년 때의 그의 활동, 장년기의 역사는 눈물나는 비극 그대로였다.

 35세 때의 일이다. 과거 20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그는 10년간의 곤란을 각오하고 상인으로 나섰다. 그때에는 이미 어머님도 세상을 떠나시고 활동하기에는 자유스러윘다. 제 3기에 이르러( 1기는 15세~25세까지, 제 2기는 26세~35세까지) 제 1기와 2기에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이번 3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살까지 각오하였다. 이러한 각오를 한지 수년 후 "모든 상업적인 경험과 지능이 나를 도와 주었다."라는 말씀을 세상에 하직할 때까지 하시었다. 즉 "노력을 한 후에 천운(天運)을 기다리라."는 금언을 항상 말씀하시었다.

 그의 역사를 일일이 말하려면 한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횡성(橫城)에서 서울 쪽으로 80리의 길을 가면 용두리(龍頭里)라는 마을이 있다. 애쓰고 애쓰면서 획득한 금액으로 횡성에서 물품을 많이 사고 부족한 것은 차금도 한 후에 당나귀를 사서 물품을 당나귀 등에다 실었다. 이 물품을 용두리의 장날 가서 팔고 그 날은 오지를 못하고 다음날 출발할 예정으로 일행 30여명과 숙소에 나눠서 들었다는 것이다. 물품을 매도한 금액이 당시에는 엽전이어서 그 분량이 너무 많아 그것을 당나귀에 싣고 왕래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각자가 방에서 전대를 베게 삼아 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돈 보따리를 들고 나와 길 옆의 논두렁 속에 남몰래 누워 있었다. 그러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십여명의 강도가 나타나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빼앗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홀로 화를 면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30여명이 다시 모여서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으로 일행은 당나귀를 앞에 세우고 긴 행진을 하게 되었다. 상인들이 가는 도중에는 '도둑머리 고개'라는 고개가 하나 있었는 데 이 고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도둑이 나타나서 행상들을 괴롭히던 곳이었다. 지금도 버스를 타고 용두리를 지나서 약 30리를 더 가면 이 고개에 닿는다. 이 고개는 강원과 경기도의 경계이기도 하다. 현재는 산에 나무가 없지만  6.25전만 해도 차가 이 곳을 지나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일행이 도둑이 가장 많은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그는 당나귀의 말굽이 빠져서 할 수 없이 옆으로 비켜나 다시 말굽을 박고 뒤늦게 혼자서 고개를 넘으니 비참한 광경이 눈에 보였다. 고개에는 먼저 간 일행 전부가 강도의 습격을 받아 혹은 몸만 달아나고 혹은 죽고 혹은 부상을 당하여 신음을 하고 있지 아니한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밤의 손해도 매우 컸는데 설상가상으로 금일의 강도 습격으로 일행은 모두 걸인이 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그는 홀로 의기 양양하여 귀향하였다. 횡성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은 "그 사람은 천운(天運)이다."하는 소문이 돌 게 되었고 원님까지도 돌보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30여년간의 모든 고난은 비로서 성공의 길로 변하였다.  우리인간 생활에서 고난 중에 획득한 금액을 호화스러운 생활로 허비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남과 같이 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참으로 검소한 생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님 제사 비용은 조금도 아끼지 않고 동네 사람을 모아서 일 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잘 대접하였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베푸는 야밤에 그는 어머님의 고난의 기록을 머리에 떠올리고 통곡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그가 일본인의 압정으로 청년들이 공부를 못하고 헤메는 모습을 보고 "애쓰고 땀 흘려 모인 정성을" 일조일석에 사회에 바쳤던 것이다.

 이것이 대동상업의 시작이었으며 우리 대동여중도 그가 희망한 횡성재단으로서 창립한 것이니 여러분 학교와는 동일 동체의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상호 협력하여 애쓰고 땀 흘려 모인 정성에 보답하여 우리나라의 향상에 힘쓸 역군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동여중(大東女中) 김용선 前교장의 회고는 고창한 선생이 많은 재산을 모으기까지의 과정과 어린 시절의 고생을 매우 소상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역경을 딛고 일어나 대동학원을 설립하고 전 재산을 희사한 고창한 선생의 큰 뜻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오로지 교육밖에 없다는 그 분의 확고한 신념이 이 세상에 '대동(大東)'을 낳게 한 것이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그 재물을 올바로 쓰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고창한 선생은 그 많은 재물을 기꺼이 사회에 희사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학교에서 얻어준 전세방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고귀한 뜻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고창한 선생의 장남이며 1944년부터 1961년까지 본교 이사장직을 역임했던 고흥석 선생의 회고는 설립자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일제에 대한 반감, 투철한 민족 정신,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등은 고창한 선생의 숭고한 삶의 이력이다.

 고창한 선생은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두메산골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홀로 이 산 속에서 외아들을 키우셨다. 그 당시에는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서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정도였다. 쌀이라는 것은 구경도 못하고 오직 목피(木皮), 나물, 열매가 주식(主食)이며 육류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홀어머니는 높은 산의 중턱을 개간하여 밀, 보리 등을 심으면서 생활이 좀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아들이 점점 자라서 산에 가서 화목(火木)을 해가지고 20리나 되는 횡성에 가서 팔아 가끔 보리밥을 먹어 보게 되었다.

 그 무렵 오고 가는 길에 서당이 있어 공부하는 소리가 들리면 문밖에서 중얼중얼 따라 하면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학교에는 가본적이 없는 그였지만 한문 실력만큼은 뛰어났다.

 하루는 횡성에 가서 나무를 파는 데 관가(官家)에서 나무를 사러 나왔다. 나무를 창고에 두고 나와 보니 바로 그 집이 원님댁이었다. 이런 일이 수차 계속 되었다. 고을의 원님(지금의 群守)은 반씨(盤氏)였다. 그가 조선시대의 관복을 입고 출입하는 것도 보게 되었다. 당시 원님에게는 그 지방의 재판권과 죄인에게 사형 언도를 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원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고창한 선생은 6척(尺) 거구에 75kg의 체중으로 남자다운 기상과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기백의 소유자였다. 그가 나무를 가지고 가면 밥도 주고 나무값도 후하게 주면서 원님의 부인께서 자기 아들과 같이 사랑해 주었다.

 18세 때였다. 원님이 그를 불렀다.

 "서울 판서댁에 가서 이 편지를 갖다 드리고 답장을 받아 오는데 될 수 있는대로 속히 갔다 오너라."

 그는 아침 일찍 떠나 용두리, 양평을 거쳐 힘을 다하여 걸어서 서울까지 오니 저녁이 다 되었다. 즉시 판서댁에 가서 편지를 전하니 답장을 주었다. 그는 이튿날 아침 짚신을 갈아 신고 고향으로 가니 늦은 저녁이었다.

 원님이 그를 보고 크게 놀랬다.

"너는 서울을 어찌 그리 빨리 다녀 오느냐? 이 고을에는 너 같이 빠른 사람이 없다."

 횡성에서 서울까지는 300리나 된다. 보통 사람은 왕복 5일도 어려운 거리이다.

 그 후부터 그는 관의 일을 보아주고 돈을 모으기 시작하여 그 수입으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처음 서울에 갈 때는 등에 다듬이돌, 맷돌 등을 지고 올라가서 팔고, 올 때는 광목을 사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의 어깨는 수없이 피가 흐르고 깊은 상처 자국이 생겼다.

 그 동안 어머니를 읍내에 모시고 결혼도 하였다. 또한 당나귀도 한 마리 매입하였다. 당나귀 등에 물건을 싣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니 수입이 수배나 올랐다.

 이리저리 피와 땀을 흘리며 20년간을 고생하고 나니 횡성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다.

 "인생의 목표를 높이 세우고 10년을 정진 노력하면 아니 되는 일 없으나 그래도 안 되면 10년을 더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