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桂洞)의 유래  

 한말에 법어드는 헌종 때까지만 해도 계동의 마을 이름은 계생동(桂生洞)이었다. 계생동 하면 기생동(妓生洞)으로 들린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싫어 하고, 싫어하다 보니 生자를 없애고 그후 계동이 되고 만 것이다. 순조 말년에 편찬된 "한경지략"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계생동이란 이름은 이 마을에 제생원이 있었기에 제생동이라 했던 것이 후세에 제생이 계생이 되어 계생동이 되어 버렸다."

 제생원은 일찍기 태조 때 설치한 복지기관으로 약재를 마련해 두었다가 서민에게 의료를 베푸는 시민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과부나 홀아비, 그리고 고아나 실업자, 행려병자로 몸이 아픈 자를 제생원에 데려다가 양호, 치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양이 커지면서 집을 잃은 미아가 생기게 되고 간사한 무리는 이 미아를 데려다 숨겨 길러서 노비로 삼거나 팔아먹는 인신매매업자가 생겨나자 세종대왕은 이 미아를 숨겨 기르는 것을 엄금하고 미아가 생기는 경우에는 반드시 제생원으로 보내어 수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이를 잃은 부모가 있으면 제생원에 가 찾도록 하였고, 만약 찾게 되면 그 동안 먹여 기른 값으로 저화 30장을 물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팔도의 별의별 약재가 제생원에 집산하였고 한약재인 계수나무에서 계동이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설도 나오게 되었다.

 세종 때까지 제생원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그 후부터 중단되고 있음은 일찍 이를 폐하고 그 하던 일을 같은 기능을 하는 혜민국에 통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의 도시 풍수는 예로부터 말이 많았는데 세종 15년에도 풍수 지관인 최양선이 한양 풍수의 주산이 북악산이 아니라 계동 뒷산이 주산이기에 바로 승문원과 제생원이 자리잡고 있는 터가 도읍 풍수의 명당이니 그곳으로 왕궁을 옮겨야 만세지리(萬世之利)를 얻을 수 있다고 상주를 하였다.

 왕궁을 옮긴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자 명당에 궁궐을 짓지 못할 양이면 이곳에 백성이 집을 짓고 살아서는 안 되기에 이들을 옮겨 살 게 하고 수목을 심어서 지맥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세종대왕은 황희, 정인지 등을 북악과 남산에 올려 보내어 지형을 간심(看審)케 하는 등 조야가 떠들썩 했는데 결국 명당터에 있던 승문원만을 경복궁 안으로 옮기고 제생원만은 풍수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황희 의 주장에 따라 인근 인가의 이전을 중지 하였다.

 제생원의 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재동국민학교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인근 가회동과 재동, 계정의 경계목에 세종 때 정승 맹사성이 살았었다. 이 계동, 재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명감사 고개, 간추려서 명현(孟峴)이라고 불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