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戰時體制下의 敎育

 (1) 시대적 상황

 본교는 1933년과 1934년에 wjstnrhk(專修科) 1, 2회 학생들을 졸업시키고 1934년 2월 6일 대동상업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3월 26일 김만수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하여 본교는 비로소 대동상업학교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4월 5일 계동 36번지로 신축 이전한 '大東'은 본격적인 상업 교육의 첫발을 내딛었다. 부푼희망과 설렘은 학생, 교직원, 학부모 등 모두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은 암울하기만 하였다. 갈수록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는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욕과 굴욕감에 몸을 떨게 하였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전시체제(戰時體制)를 강화하기 위하여 한국에 대한 강압적인 여러 정책을 감행하기에 이르렀고, 또 한번 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를 도구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경성국치(庚成國恥) 이후 그 시대에 상응하는 제1차 교육령이 공포되었고, 3.1운동 이후에는 당시의 융화정책에 어울리는 제 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3차 교육령은 중일 전쟁 다음 해인 1938년 3월에 공포되었다.

 이 개정 교육령은 일제의 침략적 야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 교육령에서 형식적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하에 한국의 교육제도를 일본과 동등하게 개편하여 한국인으로 하여금 차별 의식을 갖지 않게 하면서 한민족 전체를 그들의 봉사자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즉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투철한 사명을 주입시켜 그들의 양순한 신봉자가 되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의 총독은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선 통치의 목적은 이 지역 동포로 하여금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본질에 철저하게 하며 내선일체 치하의 기쁨에 의지하여 동아(東亞)의 사태에 처하게 하는데 있다. .....교육의 칙어에 따라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은련(忍苦銀鍊)의 교육 방침을 철저히 실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방침 하에 나온 제 3차 조선교육령은 한민족으로서 볼 때는 민족말살의 교육체제를 굳혀 놓은 것 이외는 별 변화가 없었다. 즉 전쟁 수행 계획과 더불어 일본과의 정신적 유대를 전제로 한 "내선일체론"이 한국 지배의 중추적 이념으로 등장하여 교육정책에 있어 한국인의 철저한 일본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3차 조선교육령에 의하면 한국인이 다니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그 명칭을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의 명칭 즉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의 명칭의 차이를 없앤 그 이면에는 한국인을 보다 철저하게 일본인화 시킨다는 저의가 뿌리박혀 있었다.

 그것은 특히 3차 교육령이 한국어 교육을 폐지시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제는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남긴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았으나 사실은 조선어 교육을 하지 못하게 종용하고, 끝내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시켜 우리 민족의 숨통을 막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민족주의자들을 투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본교의 상황을 5회 졸업생 경태호 동문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38년 4월부터 일제는 황국신민 선서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우리 학교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조선어 시간을 폐지하고 일본어 교육을 대폭 강화햇어요. 그리고 1주일에 1시간씩 중국어도 배운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는 3차 교육령의 공포와 동시에 더욱더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7대 총독 南次郞의 취임과 동시에 한층 가속화된 일인화(日人化) 정책은 신사 참배 강요에서부터 '황국신민선서' 제정,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감행되었다. 그밖에 한국인 학생들을 일본인화 시키기 위해서 실시한 중요한 사항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명(校名)을 개칭하였다. 종래의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로 바꾸어 한국인과 일본인간의 차별 정책을 철폐시킨 그들의 저의는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국인 학생들을 철저히 일인화(日人化) 시키는 데 있었다.

 둘째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는 대신 일본어, 일본사(日本史), 수신(修身) 등의 교과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서는 학칙을 개정하여 교육 목적을 "...국민 도덕을 함양함으로써 충량유위(忠良有爲)의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혹은 "...황국의 도(道)에 기(基)하여 국체관념(國體觀念)의 함양 및 인격에 유의함으로써 국가필요(國家必要)의 재(材)로서 족한 충량유위(忠良有僞)의 황국신민을 련성(鍊成)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바꾸었다.

 총독부는 일본어와 일본사야말로 "반도 동포의 황국신민화를 강화하는데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체육교과도 그들의 전통적 무도정신을 수련하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황국신민 체조'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서양식 체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음악 교육에 있어서도 군국(軍國) 음악을 강요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교육 내용은 모든 학과목에 걸쳐 군국주의 사상이 중요한 핵심 내용이었다.

 셋째 여러 가지 행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황국신민 정신을 은연중에 주입시키려 하였다. 예를 들면 교실마다 '황국 신민의 선서'를 걸어 놓았으며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식 분위기에 젖게 하려고 줄곧 애국일, 신사참배일, 기원절, 천장절, 육군기념일, 명치절 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중일 전쟁 때에는 일본군이 어느 지역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축하 제등행렬을 하는 등 일제는 지속적으로 일인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신사 참배 강요, 조선어 사용금지, 일인화(日人化)를 위한 각종 행사 등으로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던 일제는 그것도 부족하여 창씨개명까지 강요하였다. 그들은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 같은 뿌리라는 주장을 내 세웠다. 두 민족이 비록 지리적 환경이 다르고 풍속과 문화가 다를지라도 합병이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어진 정치로 말미암아 내선융화(內鮮融和)로 통합되었다고 강변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