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戰時體制下의 敎育

(2) 제 4차 교육령과 학원의 兵營化

 1941년 12월 본교는 제 7회 졸업생 78명을 배출하였다. 시대의 상황에 따른 조기 졸업인 셈이었다. 그 해 12월 8일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한 후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일제는 이 때 , '대화민족(大和民族)만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망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새로 부임한 제 8대 조선 총독은 "조선통치의 근본 방침은 일시동인(一視同仁)에 있다. 구체(國體)의 본의를 명철히 해야 한다. 황국신민된 자각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황민(皇民)의 연성(鍊成)을 강조하였다. 이 연성(鍊成)이란 말은 정무총감 田中武雄이 이땅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는 이미 충청북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경무국장을 역임한 자로 한국인을 부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득이 아니라 강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쟁이 무제한의 인력과 물자를 요구하는 때에 동화정책(同和政策) 따위는 한국인을 효과적으로 부릴 수 없다는 이유로 첫째도 연성(鍊成),둘째도 鍊成이라고 주장하였다.

 학교의 鍊成은 남녀 학생에게 일본 정신의 주입과 동시에 주로 근로 작업을 시켰다. 따라서 1942년경부터 학원은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후방의 전투대(戰鬪隊)로서 혹은 근로대(勤勞隊)로서 동원되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미국의 반격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던 1943년부터는 정상적인 학과 공부보다는 교연(敎鍊), 그로 동원 등으로 사실상 학교의 실태는 말만 교육이지 병영 생활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각 학교에서 군사 훈련이 강화되었다. 교련시간이 증가되고 비상훈련, 폭격기 대피 훈련, 방공 훈련 등이 연이어 행해졌다. 그리하여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교육 활동이 어려워졌다.

 한편 1943년 3월에 제 4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다.

 제 4차 조선교육령 중에 "황도(皇道)에 입각하여 국민의 연성(鍊成)을 주안(主眼)으로 한다."라고 중등학교 교육 목적을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이 교육 목적은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을 기초로 하는 것으로서 학원의 병영화 내지 교육의 전쟁 도구화(道具化)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육은 그 본래의 목적과 당위성이 결여되었고 정상적인 교육과정의 운영이 불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