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戰時體制下의 敎育

(3) 학생들의 근로동원

 일제말(日帝末) 본교의 상황은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갖가지 탄압과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 중 하나가 근로 동원이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약 1년 5개월 동안 여학생으로 본교에 재학했던 이종임 氏는 "1945년에 들어서자 남학생들의 근로 동원이 부쩍 빈번해지고 선생님들이 인솔 교사로 따라가시게 되면 늘 보결 수업이 생겼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에 1, 2학년은 여학생, 3~5학년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이처럼 태평양 전쟁으로 학교는 완전히 전시 체제로 전환되었고, 노동력의 부족은 급기야 근로 봉사란 이름으로 학원을 어지럽혔다. 그리하여 학생은 신분만의 학생이지 직공(職工)인지 노동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생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종임氏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날 예고가 된 일본왕의 이른 바 '녹음 방송'이 있기 직전까지 우리는 오전 내내 군복에 단추 달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피복 공장에서 나온 두사람의 여공이 배당해준 작업량을 마치기 위해서 꼼짝않고 손끝을 놀리고 있으면 등솔이 마르고 손 바닥엔 땀이 찼다. 우리는 다른 학교처럼 운모작업이 배당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기 때문에 불평을 하지 않았다. 전기절연물이나 내화제로 쓰이는 백운모를 칼끝으로 얇게 벗겨내는 일이 얼마나 지긋지긋한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생들은 수업은 하지 않고 공장의 직공처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근로 작업에 빼앗기고 있었다. 당시 3~5학년 남학생들도 근로 동원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여학생들보다 더욱더 혹독한 노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1942년 매일신보 8월 18일자 3면에는 집단근로작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중등학교 생도 5천명을 동원하여 군기 있는 특별집단근로작업을 실시키로 하였다.

 이 근로작업은 3학년 이상의 생도를 참가케 하여 각 학교별로 매일 오전 8시 용산 총독부 관저 앞에 집합케 하여 점호를 한 후 복장 검사, 궁성 요배, 묵도, 작업을 개시하여 오후 4시까지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 일정표는 다음과 같다.

18일

京中

21일

경복중학

25일

경성상업,선린상업

28일

大東中學,培材中學

19일

龍中

23일

城東中學

26일

양정중학,성남중학

30일

徽文中學

20일

경기중학

24일

京商

27일

普成中學,東星中學

31일

中央中學

 이러한 근로 동원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大東'의 학생들도 관악산, 용산, 삼선평 등으로 근로 작업에 끊임없이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1944년 5월에는 학칙 중 일부분을 개정하여 휴업일 및 일요일에도 수업을 한다는 명목하에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행학일체(行學一體)의 전시교육이념을 충분히 실천케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 行學一體의 교육 실천을 위하여 총독부는 '학도근로동원요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도의 근로 동원은 전력 증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근로 동원은 학도를 노무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교육 실천인의 근로 협력이므로 작업장은 행학일체의 도장(道場)이다.

  3. 학도 동원이 근로 즉 교육이 된다.

 총독부의 거짓과 변명은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行學一體'라는 그럴 듯한 말로 학업에 몰두해야 할 학생들을 근로 동원하여 전력 증강의 한 수단으로 삼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마지막 발악은 항복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