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설 확충 및 교과 운영의 실태

 계동 36번지로 이전한 대동상업학교는 본격적인 상업 교육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935년 7월 10일 강당 겸 별관을 신축 낙성(落成)하였다.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운동장 확장 공사를 준공하였다. 물장수협히와 인력거부협회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교사(校舍)와 운동장을 마련하고 비로소 학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이다.

 한편 1936년에는 학칙 변경 인가를 받아 10학급이 되었다. 즉 한학년에 2학급씩 편성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교과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34년~1938년의 교과목>

<1939년~1944년의 교과목>

학  과  목

학  과  목

 修身, 公民, 國語(국어강독, 문법, 작문, 습자), 조선(조한강독), 영어(讀方解譯, 문법, 작문, 회화), 商英, 역사(산업사), 일본, 지리, 수학(代數, 機何, 商算), 理科(生理, 物理, 化學), 부기(商簿, 銀簿), 商事要項, 商品, 실천(實踐), 會計學, 商用文,주산,民法, 工大意,圖書, 체조(體操)

修身, 公民科, 국어(강독, 한문, 문법, 작문, 습자), 수학(珠算, 算術, 代數, 機何), 지리, 역사, 理科(博物, 物理, 化學), 영어(문법, 회화, 작문) 支방語, 圖書, 唱歌, 商事要項, 부기, 회계학, 商品, 商業文, 商業算術, 상업법규, 상업영어, 經濟事情, 産業大意, 實踐(商取引, 상업경영), 체조(교련, 武道, 체조)

 이상의 내용을 살펴 보면 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어가 폐지되고 대신 일본어 교육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교에서는 조선어가 교과목에서 사라진 후 지나어(支那語) 즉 중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30년대 후반부터 교련과 무도가 대폭 강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 통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성적 평가는 優, 良, 可로표시하여 나타냈고, 낙제 제도가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100점을 만점으로 채점하여 전과목 평균 60점 미만이면 낙제가 되었는데 때로는 평균점에 다소의 유동(流動)이 있었다. 그리고 과목 낙제 점수인 40점 미만의 학과가 3과목 이상이면 역시 낙제가 되었으며 학년당 낙제 해당자가 여러 명씩 있었다.

 8회 졸업생 홍선희 동문은 그 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당시에는 성적이 안 좋으면 무조건 낙제였어요. 그래서 선배가 동급생이 되고 동급생이 선배가 되는 웃지 못할 일도 많이 있었어요. 이렇게 낙제 제도가 엄격하게 적용되니까 학생들은 기를 쓰고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밖에 조행(燥行)도 진급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조행이라 함은 평소의 학생들의 품행, 즉 몸가짐을 말한다. 조행은 優,良,可 또는 甲, 乙, 丙 등으로 평가하였는데, 조행이 가로 평가된 학생은 성적과 관련없이 무조건 낙제가 되었다.

 한편 학생들의 수업은 주로 주입식으로 진행되었고 평일에는 6시간, 토요일에는 4시간 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중기에 들어서서는 오전에만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군역(軍役)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다급해지면서 오전 두 시간 정도의 수업을 하고 전적으로 군역에 종사하거나 아예 온종일 군역에만 종사하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44년~45년에는 본교의 여학생들은 군복 단추 달기 혹은 보수, 건빵주머니 만들기, 운모 벗기기 등에 동원되었다. 결국 해방 직전까지 학생들은 비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