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大東의 상징

(4) 초대 교장 金萬壽 선생

 김만수 교장은 대동의 초석을 마련한 분이다. 수송동에 대동학원을 창립하고 개량 서당의 형태로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칠 때부터 김만수 선생은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오늘날 대동이 있게 된 것은 고창한 선생과 김만수 선생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분들이야말로 대동의 역사적 증인이요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함경도 북청 출신의 김만수 선생은 교육적 신념이 매우 투철했고, 일제 치하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준 민족주의자였다. 대동학원을 창립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밖에 없다는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교육 사업을 위해 매진하였고, 대동상업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일한 1940년까지 대동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초창기 졸업생들의 회고에 의하면 김만수 교장은 민족 정신이 투철했고 항상 근엄한 표정으로 교육에 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훈화가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길지 않고 간단 명료한 훈화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경태호(5회 졸업) 동문은 김만수 교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 분은 순수한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우리 학교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어요. 그리고 늘 한국어를 사용하였고, 매주 '수신(修身)' 시간에는 직접 교실에 들어 오셔서 교육을 하셨어요. 그 때의 귀한 가르침이 평생 저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어요."

 이렇게 졸업생들이 기억하고 있는 김만수 교장은 한 사람의 훌륭한 교육자였음을 알 수 있다. 서슬 푸른 일제하에서도 학생들에게 당당한 기개와 민족 정신을 심어 주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였다.

김만수 선생의 영향으로 학생들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갖게 되었고, 암흑기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무렵의 일들을 백언기( 2회 졸업) 동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 분이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총독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어요. 당시 大東으로서는 훌륭한 교육자를 잃은 셈이었죠."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김만수 교장은 1940년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학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학생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본교에는 많은 통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지역의 거주 학생들은 상당수가 통학을 하고 잇었다. 그 중에 인천에서 기차 통학을 하고 있던 어느 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그 학생은 기차의 화장실 벽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써놓았다.

                                   일본 천황을 죽여라 !

 격문이 발견되자 서울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각급 학교는 바짝 긴장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총독부는 범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여러 날의 조사 끝에 범인이 바로 대동상업학교의 재학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형사들이 몰려들고 격문을 쓴 학생은 연행되었다.

 그 때부터 총독부에서는 대동상업학교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학교 설립자와 김만수 교장에 대해서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일 앞에서는 김만수 교장은 의연했다. 어쩌면 그는 속으로 매우 통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일제 치하의 상황 이었지만 학생들의 의식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김만수 교장은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간파했는지 총독부는 김만수 교장에게 사임을 강요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총독부의 강경한 지시 앞에서 김만수 교장은 결국 학교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러 해 동안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지난 날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일해야 될 것이 아직 많은데 당장 학교를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허망하고 비통했다. 그러나 자신은 식민지 백성일 뿐이었다. 아무런 힘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이 올바른 민족 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아이들이 있는 한 기필코 해방의 그 날은 올 것이라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김만수 교장이 사임한 후 1940년 9월 16일 이원찬(李源讚) 선생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강화도 군수로 재임하던 중 할당된 공출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죄로 군수직에서 해임되어 대동의 교장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찬 교장은 대동에 부임한 뒤에도 일제의 충복(忠僕)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2년 후 이원찬 교장을 해임하고 김종식 일본군 대좌를 새 교장으로 취임시켰다. 취임일은 1942년 12월 2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