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교 생활

 (1) 입학 및 졸업

 당시 신입생 선발은 교장 재량에 의하였다. 1차 시험은 학과 시험이었고, 2차 시험은 구두시험(口頭試驗)이었다. 학과 시험은 지원자 전원에게 실시했으나 구두시험은 학과 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실시 되었다.

 지원자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5회 졸업생이 입학할 때였다. 무려  20 : 1 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하였다. 그 후 해방 전후까지 본교의 입시 경쟁은 평균 10 ; 1 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본교 5회 졸업생 김동진 동문은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저는 그 당시에 두 군데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보성과 대동, 모두 합격이 됐던 겁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도 하고 저 자신 고민도 하면서 결국 대동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우선 20 : 1 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쳤다는 사실이 저에게 어떤 자부심을 갖게 했었고, 일단 상업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대동으로 결정을 하게 된 거죠."

 이 처럼 당시에 상업학교에 대한 인기는 대단했다. 취업이 보장되고, 생활에 필요한 실질적인 공부를 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해방 이전까지 연도별 졸업생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33년

1934년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1941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졸업  회수

전수과  1회

전수과  2회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10회

졸업  생수

20

19

56

79

117

132

93

109

98

112

111

100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1941년도에는 6회와 7회가 졸업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당시의 조기 졸업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즉 1941년 3월에 6회가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에 7회가 앞당겨서 졸업한 것이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지원과 인력 오도를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는 인력 자원의 조기 이용을 목적으로 일찍 졸업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렇게 3 ~ 4개월씩 앞당겨 졸업을 시키다 보니 나중에는 4년만에 학교를 졸업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1944년과 1945년도에는 여학생만 입학하였다. 그 이유를 고흥석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하루는 총독부의 일본인 국장과 과장이 저를 보자고 해요. 그 때 제가 이사장의 신분으로 그 사람들을 만났더니, 대뜸 이런 말을 해요. 현재의 학교의 자리에 일본공과대학을 설립할 것이니 학교를 옮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곤란하다고 여러 가지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공과대학 설립 계획이 취소되고 저희 학교는 그대로 남게 된 겁니다.

 그 후 일제 말기로 들어서면서 난데없이 저희 학교를 여학교로 바꾸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남학생들은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니 여학교로 변경하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명을 대동여자상업학교로 바꾸고, 1944년과 1945년에 여학생만 선발했지요. 그러나 교명 자체는 여자상업학교로 바뀌었지만 3 ~ 5학년은 그대로 남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어요. 결국 두 개의 학교가 공존했던 셈이죠. 그러다가 1946년 학교명이 다시 대동상업중학교로 변경된 겁니다.

 그리하여 본교에는 1947년과 1948년에 졸업생이 없었다. 44년과 45년에 입학했던 여학생들이 해방이 되면서 서울여자상업학교와 그 밖의 다른 학교로 학적을 모두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12회와 13회는 3년의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한편 해방 이전의 교직원 명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

 김오진(金嗚鎭), 김병성, 조병인, 현창영, 이민두, 이진형, 문승도(文丞都). 최석찬, 이호근(李皓根) , 김진찬(金振璨), 서정권, 홍성한, 김관성, 김용선, 김형술, 고흥석, 배경열(裵庚烈), 변숙철(邊淑喆), 김구승, 박도채, 김하구(金河龜), 정학제, 한석연(韓錫演), 김성기, 서인석, 이준하, 전성찬, 남원우, 안용순, 전봉곤(全鳳坤), 山田善次(일본인), 兒玉金吾(일본인), 中尾豊(일본인),

 위의 일본인 교원은 총독부의 지시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당시에 일본인 교원을 채용하는 것은 각급 학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