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교 생활

(4) 고창한 선생의 서거(逝去)와 학교 상황

 대동의 설립자 서암 고창한 선생은 1944년, 향년 (享年) 72세로 서거하였다. 대동의 횃불이요 민족 교육의 선구자였던 서암 선생은 가족들이 임종한 가운데 조용히 운명하였다.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루어졌고, 장지(葬地)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위치하였다.

 서거 후 교정에 기념비문이 세워졌고, 부친의 뒤를 이어 고흥석 선생이 재단법인 대동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김두헌 선생이 4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김두헌 교장은 사임하고 5대 교장 한상길 선생이 1945년 10월 1일 취임하였다.

 한편 해방 이전까지 대동은 착실히 내실을 다지며 성장하였다. 학생, 교직원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을 상업학교의 명문으로 키운 것이었다.

 당시에는 3학기제였다. 4월부터 7월까지가 1학기, 8월부터 12월까지가 2학기, 1월부터 3월까지가 3학기였다. 그리고 시험은 매 학기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1년 동안 치루는 시험은 총 6회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대외적인 학생 활동도 뛰어났다.

 초창기부터 농구부는 매우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좁은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운동으로는 농구가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2회 백언기 동문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 학교를 대표하던 것은 농구부였어요. 국내에서는 강팀중의 하나였고, 여러 차례 우승을 했어요. 이러한 활동이 50년 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던 겁니다."

 농구부의 탁월한 활동은 자타가 모두 공인하는 것이었다. 초창기부터 50년대까지는 대동의 이름을 주위에 널리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농구부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농구부의 활동은 혁혁한 것이었다.

 그밖의 학생 활동도 뛰어난 것이 많았다. 특히 2회 졸업생들의 활동 중 웅변대회 우승과 정구대회 우승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2회 박창목 동문은 재학 중에 보성전문 주최 전국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졸업생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 때 대회 장소는 조선호텔 앞 어느 공회당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회 심병식 동문은 전국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애쓰고 땀흘려 학교를 짓고, 그 위에 다시 뜨거운 배움의 열정을 쏟았던 대동인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렇게 대동은 끗끗하게 성장하였다.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민족 해방의 그 날을 향하여 매진, 또 매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