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 해방과 6.25동란

 (1) 美軍政期의 敎育

 1945년 8월 15일 한국인은 35년간에 걸친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武裝解除)를 구실 삼아 38선 이북에는 소군(蘇軍)이 이남(以南)에는 미군(美軍)이 진주하게 되었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한 통일의 탐색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義)에 의한 신탁통치안이 한국민의 반대에 봉착하게 되자 남북의 분단은 하나의 기정사실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민족의 분단이라는 새로운 비극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 이남에는 3년간에 걸쳐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 3년간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의 영향 밑에서 주권의 제약과 생활의 간섭을 받아야 했으며 미소(美蘇) 양대국(兩大國)의 영향 밑에서 민족과 국토의 분단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종식되었으나 이에 대치되는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와 더불어 교육 체제가 정립되기에는 시간이 걸려야 했고, 과도적 혼란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한때 학교는 폐쇄되었으나 곧 우리의 손으로 자치적 운명이 시작되었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것은 9월 8일이었으며, 그들은 바로 질서의 회복과 국민 생활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는 먼저 폐쇄된 학교를 열고 많은 일인(日人)들이 담당하였던 교육을 한국인으로 대치하여 교육의 이념과 제도, 내용과 방법 등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태도는 될 수 있는 대로 한국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이른 바 민주주의 교육 이념에 따라서 보다 개방되고 기회가 확대된 교육을 실시하도록 도우려 한 것이다. 그들은 한국이 그들 자신의 나라를 모형으로 하여 민주 국가로 발전하고 한국의 교육이 민주 시민을 양성하며 신생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지향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을 잘 몰라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고 교육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財源)이나 인적(人的) 자원(資源)의 면에서도 커다란 제약이 있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각급 학교의 개학은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가 1945년 9월 24일부터, 중등학교가 10월 1일부터 하도록 되었으나 이미 미군정 당국의 지시에 앞서 자치적으로 문을 열고 우리말 우리 글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 적지 않았다.

 가장 시급한 일은 교원을 새로 보충하고 우선 급한 대로 수업을 개시하는 일이었으며 위에서 밝힌 대로 처음에 일부 학교는 자치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는 9월 말경부터 10월 초를 기하여 초중등학교가 개교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일본 색채를 없애고 우선 종전의 일본인 관공립학교를 한국인 학교로 전환하여 새로운 체제와 환경에서 교육을 계속하면서 점차 기회를 확충하고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에 교육심의회(敎育審義會)를 조직 발족시켰으며 12월에는 학제(學制)를 비롯하여 몇 가지 중요한 새로운 제도를 개정하였다.

 미군정하(美軍政下)에 결정된 새 학제는 6, 6, 4 제(制)였으며 중등학교에 있어서는 따로 3년제 초급중학교를 두었으므로 6, 6, 4 制와 6, 3, 3, 4 制의 병행 체제가 채택된 셈이었다. 또한 1946년부터 학기제를 9월 1일부터 시작되는 2학기제로 시정하였다. 이것은 일제 시대의 4월 1일에 시작되던 3학기제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학제하(學制下)에서 중등교육은 일제 시대의 폐쇄 정책을 지양하고 새로운 기회의 확대와 내용의 개혁이 전국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사학(私學)도 크게 권장된 가운데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 1947년에 서울 시내의 중등교수(中等校數)는 63校였으며 동년 9월의 신학기에는 국민학교 졸업자중 65%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등학교에의 수요가 격중한 반면 시설의 증설과 여건의 정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였으며 1948년도에는 취학율이 50%로 격하된 실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