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 해방과 6.25동란

(3) 6.25 전쟁과 학교의 수난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가 시무식을 마치고 업무에 한창 바쁜 학년초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남한의 학교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6월 28일 오전 2시에는 한강교가 폭파되어 서울시민은 일부 특수층 인사를 제외하고는 피난의 길마저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시민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워 놓지 못한 채 우선 대전으로 옮겨갔다.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시내 각 학교는 조용한 가운데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했다. 27일 각 학교의 2교시 수업이 끝날 무렵 북괴군은 창동 근처까지 침공하여 교전하는 포성이 들리고 피난민 대열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기 시작할 때 전세가 위급해진 것을 안 서울시 교육국에서는 시내 각급 학교에 무기휴교를 지시했다. 아무런 피난 대책도 세워볼 겨를이 없이 6월 28일 아침에는 서울을 점령한 괴뢰군에 의하여 모든 학교가 접수되고 공산분자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그 후 9월 15일부터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자 시민들은 황폐한 폐허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시 당국은 10월16일을 기하여 시내 초, 중등학교가 일제히 문을 열도록 조치하였으나 적치 3개월간에 파괴된 교사 및 교육 시설과 이산(離散)된 교직원의 파악 등이 어려워 즉시 정상 수업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대동의 상황을 당시 본교의 고흥석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치 3개월 동안에 우리 학교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어요. 강당 뒷편과 신관 앞쪽에 포탄이 떨어져 유리창이 깨지는 정도였지요. 그러나 학교가 비어 있는 동안 많은 서류가 유실되고 훼손되었지요. 그 때 학생들의 학적부가 사라져 나중에 다시 작성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기록 사항들이 누락되었지요.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학적부들의 내용은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10월 16일경부터 각 학교는 서둘러 개교에 들어갔으나 대다수 중등학교는 우선 서울시 교육국의 지시에 따라 적치하에서의 교직원과 학생의 행적에 대한 보고, 파괴 소실된 시설의 파악, 흐트러진 제반 장부의 정비 등 전쟁의 뒷정리로 1개월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서울시 교육국에서 내린 학교 개학에 관한 사항과 승인 신청에 관한 사항을 발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교 개학에 관한 사항(초)

  (1) 공립 초, 중등학교의 개학일을 10월 16일로 결정함. 당일 각 학교에서는 오전 10시 일제히 개학식을 거행하고 시의 에 적합한 훈화를 할 것.

  (2) 학교 교사 시설 등에 급속히 정리 정돈하여 개학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3) 교사 시설이 소실 또는 군대 주둔 등으로 학교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시설을 임시 차용 또는 인접한 학교에 분산 위탁 등 상세한 임시 조처안을 작성하여 전기 개학일 본관의 승인을 받아 개학할 것

 2. 승인 신청인

 국민학교는 구청장이 신청하고 공립학교는 교장이 신청하며, 사립중학교는 설립자가 신청 할 것

  (4) 공산 도배에 협력한 자를 제외한 학교 직원은 그 신분에 관하여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각기 종전 직위에서 당면 부여된 사명을 다할 것

  (5) 개학 당일의 상황을 별지 서식에 의하여 10월 18일까지 보고 할 것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1월말 방학에 들어갔던 시내 중등학교는 또다시 12월 20일 무기휴교하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1951년 1.4후퇴로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간 채 교사와 학생들은 피난지 소재 학교에 등록하게하여 학업을 계속하고, 피난 교사는 변난도(변難道)에 등록하여 피난 학생을 수용한 학교에 강사로 배치하였다. 이어서 2월 16일자로 발표된 전시하의 교육특별조치요강에 의하여 피난지에서의 교육이 개시되었다.

 이로 인하여 부산, 대구, 대전, 수원, 안성 등지에서는 서울시 각 학교가 단독 또는 연합으로 임시 가교사에서 개교하여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하여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2년 반 동안 피난지에서의 교육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비록 노천 교실, 임간 교실로부터 시작하여 천막 교실, 생벽돌 교실에서 또 모든 것이 핍절하고 여의치 못한 비참한 환경이었지만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 당시에 대동도 마찬가지였다. 14회 이철수 동문은 6.25 전쟁 때의 학교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대동은 부산에서 중동중학교, 수송전기학교와 연합 교육을 실시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가 환도하자 학교는 다시 옛모습을 찾아 학교 발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본교 9대 교장을 역임했던 조은택 선생도 피난 학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대동을 알 게 된 것은 5대 교장선생님 이었던 한상길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어. 그 때 난 중동중학교 교장 이었고, 한 교장선생님과는 옛 친구로 서로들 신임도 두터웠고 학교도 가까운 거리에 있고 해서 왕래도 자주 있었지. 그런데 5.25 사변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 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1.4후퇴 후 3월달에 정부에서는 학생수가 많은 학교는 분교를 설립해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렸어. 그래서 학생들을  모아 보니 부산에 피난 온 학생이 중동이 70명 정도이고, 한 교장선생님께서 모아 온 학생이 60명 정도로 너무나도 적은 숫자였지. 할 수 없이 한 교장선생님과 의논을 하여 대동과 중동을 합쳐 수업하기로 했어. 장소는 동래군 서면에 내가 아는 한 제자가 산을 빌려줘서 그곳에서 복반수업을 시작했지. 선생님들이 적어서 나와 한 교장선생님도 학생을 가르쳤어. 남 수학이 전공이니까 하루에 5~6시간 수업을 했지. 그 때부터 대동과는 더욱 밀접하게 된 거야. 그 땐 또 대동상고는 갑종 상업학교로 군립하던 때라 이름도 많이 났었고, 환도 시에는 중등학교에 미군이 주둔하여 수업을 할 수 없었지만, 대동은 군용차가 올라오지 못했던 관계로 그대로 수업을 할 수 있었지. 그 땐 지금의 정문은 없었고 서측문을 이용했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교실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어."

 한편 피난을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던 학생들과 1951년 여름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피난지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훈육소'에서 수업을 했다. 1951년 7월경부터 훈육소라는 명칭으로 사용 가능한 중등학교 교사에 합동 임시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이 때 거의 모든 훈육소는 시내 각 학교의 학생들을 구별없이 수용하였으며 교사진도 피난지에서 돌아온 여러 학교의 교사로 구성되었다. 이로부터 각 훈육소는 복귀 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점차 각 학교 단위로 분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4월 1일 서울시 교육 당국에 의하여 훈육소가 해체되고 각기 원교 개교 조치가 내려졌을 때에는 시내 훈육소 수가 55개 소에 이르렀다.

 한편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1953년 후반부터 서울시 중등학교는 3년여간의 고난과 역경을 벗어나서 점차 시설 재건과 교육 내용의 내실을 갖춰나가기에 이르렀다. 특히 교육 시설의 복구와 재건은 유엔 당국과 미국의 협력을 얻어 1952년부터 1957년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교육 목표는 민주 교육을 표방하여 이념적 교육을 전개 하였던 광복기에 비하여 전쟁을 통한 현실적 문제가 교육의 영역이 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서울시 중등 교육의 목표는 복구와 재건에 촛점을 두고 정상적인 학교 운영에 접근해 가면서 전란으로 미흡했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정착시키려는 데서 설정되었다. 또한 교육의 방향도 이른 교육이 아닌 행동교육으로, 이념 교육이 아닌 실천교육으로 전환되어 갔다.

 교과 운영은 교육과정 기준에 대한 각 학교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교과 단위 이수시간을 확보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되어 전쟁으로 인한 교육의 혼돈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교과 운영의 중심 방향은 학생들의 사상 선도와 민족의식의 고취, 애국정신의 발휘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반공 도의교육이 강화되었으며, 한자 교육이 부활 실시되기도 했다. 또 전란으로 인한 교육제도상의 미결 상황도 이 시기에 정착되었는데, 중등학교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학교 운영에 완전 도입되고, 이로부터 1955년도에 들어 새 교육과정 개편의 실행이 가능해지는 등 서울 중등 교육의 기반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 학제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우선 1951년 3월 20일 부산 피난 국회에서 교육법이 개정 공표됨에 따라 중학교의 수업 연한이 3년으로 바뀌고 고등학교를 병설하는 6, 3, 3, 4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여기에 따라 이 해 8월경부터 피난지에서 서울 중등학교의 중, 고 분리 작업이 이루어졌다. 학제의 변경에 따라 1945년에 입학한 학생은 6년제로 1947년 입학생은 4년제로 1948년 입학생은 3년제로 모두 3가지 경우의 졸업장이 수여되었으나, 이것은 6년제로 졸업하는 졸업생 외에는 명목상 졸업이었고 1951년 9월 1일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다시 1946년에 입학한 5년 수료생은 고등학교 3년생으로 개편하고 이들 졸업생들 중 희망자를 입학 연도에 따라 입학 전형 없이 각각 고등학교 해당 학년에 편입시켰다.

 한편 당시의 학기제는 미군정하에서 9월로 시작되도록 개정하였으나 다시 개정하여 4월로 앞당겼다가 1950년도에는 6월 신학기제가 실시되었다. 또 서울 중등학교에 대하여는 6.25전란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6개월여간의 수업의 양과 질을 보충하기 위해 동, 하계 방학 없이 수업을 계속 시켰으며 52년도부터는 4월 학기제를 정상 운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