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學事 槪要 

(1) 한상길 교장의 취임과 校名 변경

 해당 직후 김두헌 교장의 후임으로 한상길(韓相吉) 교장이 취임하였다. 한 교장은 1957년 사임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교장의 임무를 수행하여 여러 가지 고충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교육의 공백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학교 부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상길 교장의 공로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6.25 당시에 한 교장은 피난지 부산에 임시 학교를 세워 교육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동래군 서면에 위치했던 학교는 중동과 대동의 연합으로 이루어졌고, 학생수는 130여명에 달했다. 그곳에서 한상길 교장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1954년에 복간된 교지 '大東' 제10호에는 한상길 교장의 교육 철학이 담긴 글이 게제되어 있다.

 지난 6.25 이후 어지러운 환경 가운데서 일시적 혼란을 면치 못했으나 남하의 쓰라림 가운데서도 우리 교육계만은 판자집 가교사(假校舍)일지라도 대한 학도들의 우렁찬 배움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서울이 아직도 일선지구에 속했던 재작년 그 어느 기관보다 제일 먼저 우리 교육 기관을 복구하여 파괴된 교사 속에서 재건의 최선봉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얼마나 교육 재건이 절실히 요구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중략) 우리 학교로서는 대동의 설립자이신 서암 고창한 선생님의 "무지는 최대의 가이다."를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미 30년전 우리 학교의 창립 당시 절규하신 이 말씀이 오로지 대동 의 교훈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대한의 교육이념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대동의 교명이 바뀌게 되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동은 '대동여자상업학교'라는 교명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것은 총독부 학무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여학교로의 전환은 전시체제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일제의 횡포였다. 조선의 청년들을 가능한한 많이 일선으로 끌어내고, 후방의 빈 자리를 여성으로 메우려는 정치적 책략이었던 것이다.

 대동여자상업학교라는 교명이 막을 내린 것은 1946년 10월이었다. 이 때 대동은 문교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교명을 '대동상업중학교'로 변경한 것이다. 이로써 수업 연한이 6년이 되었고, 학급수는 12학급이 되었다. 즉 한 학년에 2학급이었고, 오늘날의 중, 고가 결합된 형태로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학제 변경으로 인하여 1951년 중, 고가 분리되어 대동중학교 12학급 인가를 51년 8월 31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 5월 18일 대동상업고등학교 9학급 인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명은 이 때 마련된 것이다.

 학제 변경에 따라 과거 6년제 대동상업중학교에 재학하던 학생들은 고등학교 해당 학년으로 편입되었고, 47년과 48년도 입학생은 각각 4년제와 3년제로 하여 졸업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