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 상황과 교육의 현실

(3) 4.19 의거와 대동

 우리나라 학생들이 사회 현실 문제를 놓고 교내 또는 가두(街頭)에서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은 교육 내용과 현실 사이가 너무나 괴이(乖離)되어 있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살필 수가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학생들에게 시위운동 전개의 도화선이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거듭된 실정과 3.15 선거가 부정으로 감행되어 마산시에서 학생을 선두로 하는 일대 민중 시위 가 일어났고 김주열 학생의 참사 사건이 터졌다.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체가 해상에 떠오르게 되어 마산 시민의 분노는 재폭발, 4월 13일 제 2마산 사건이 발생하였다. 3.15 선거는 부정이었으니 다시 하자는 학생의 움직임이 암암리에 진행되던 차에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들어갔다.

 4월 19일 서울시내 전대학과 일부 중, 고등학교 학생의 시위가 경무대에 육박하자 불법 발포, 계엄 선포 등으로 서울 시내에서만 불과 수시간 동안에 많은 사망자와 중경상자를 내고 4월 20일에는 시내 모든 학교에 등교 정지 조치를 하는 등 시국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내 중, 고등학교에서는 대동, 대광, 동성, 휘문, 양정, 중동 등의 집단 시위의 물결은 부정과 부패를 씻어 버리려는 일대 홍수와도 같았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 시국 선언과 시위가 전학생, 전국민적 민주혁명의 규모로 확대 되어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고 정, 부통령 재선거 실시를 선포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4.19 의거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되어 전국민의 항쟁으로 전환하여 정의로써 투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포효하던 학도들이 일단 독재 정권을 물리치자 빗자루와 교통신호기를 들고 교통정리와 가두청소에 나서는 그 모습은 오직 그들의 지성과 정의와 용기의 발로로서 민주 한국의 장래를 위해 봉기하였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시위 중 서울 시내 중, 고등학교 남녀 학생들의 희생이 뒤따르게 되었다.

 1960년에 발행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년보'에 의하면 시내 중, 고등학교의 피해는 사망 25, 중상 63, 경상 49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중 대동상업고등학교 학생의 피해는 중상 2명, 경상 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대동인은 나라의 혼란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의연하게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민주 국가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다행히 희생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밖의 대동 학우들도 시위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앞장섰다.

 당시 상황을 14회 이철수 동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뮨을 박차고 시가로 나갔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늦게서야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 와서는 각 교실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또한 본교 교사로 있던 8회 홍선희 동문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학생들은 모두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어요. 이대로 침묵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면서 교뮨 밖으로 몰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에 합류하여 정의와 진실을 외쳤던 겁니다." 

 이렇게 하여 대동 학생들은 비겁한 도피자가 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역사는 본교 학생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록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