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향일암 '푸른햇살 아래 눈부셔라 한려수도 비경'

 
 

소망을 들어준다는 암자라서

그런가. 향일암을 어렵사리 찾은 장삼이사들은 연신 손을 모은 채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대입합격 사업번창 등 세속적인 바람에서부터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평생 간직해 온 가슴 속의 응어리를 불당 안에 풀어놓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녀 젊은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 지켜보다가 기도 대열에 끼어든다.

만선을 꿈꾸는 고깃배 마냥 기자도 저 멀리 한려수도의 쪽빛 바다를 향해 소망을 외쳐본다. 그리곤 한동안 말없이 남해바다만 바라본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간다. 향일암의 무심한 바다를 가슴에 담아가고 싶다고. 사시사철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범부들의 마음을 궤뚫고 있는 관음전의 관세음보살도 아마 같은 심정일게다.

수 돌산도 향일암(向日庵). 해를 향해 있다는 뜻.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남해 수평선의 일출 풍광이 장관을 이룬다. 기도 효험이 뛰어나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홍련암, 강화 낙가산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국내 4대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사시사철 전국에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향일암이 있는 돌산도는 여수의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아홉번째로 큰 섬이다. 여수와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를 건너면서 향일암 가는 길은 사실상 시작된다.

돌산대교를 지나 향일암까지는 23㎞. 섬 내의 거리치고는 비교적 먼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남도 특유의 갯마을 정취가 물씬 풍기고 한려수도의 풍광이 아름답게 펼쳐져 드라이브 코스로도 그만이다.

돌산도 동쪽 해안도로의 종착지는 임포마을. 금오산 기슭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향일암은 임포마을을 둘러싼 금오산 중턱의 벼랑 위에 올라앉아 있다.

과거에는 임포마을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 길목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주차장이 생겨 반드시 이곳에 주차한 후 무료 셔틀버스를 타든지 걸어올라가야 한다. 도보로 15분 정도.



향일암에 도달하기 위해선 일주문 역할을 하는 이 바위틈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일명 해탈문이다.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인 644년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원통암으로 불렸다. 이후 고려때는 금오산 이름을 따 금오암, 영구암으로 불리다가 조선 숙종때 인묵대사가 일출의 찬란함을 보고 향일암이라 불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암자에 와보면 향일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대웅전 옆에 경봉스님이 쓴 ‘영구암’ 편액이 걸린 조그만 전각이 있을 뿐이다.

향일암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른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바위틈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일명 해탈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들어오라는 무언의 암시다. 해탈문을 통과하면 비탈이 심한 벼랑 위로 영구암 대웅전 종각 관음전 등의 전각이 비좁게 들어서 있다. 어느 곳에서든 남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향일암 경관의 백미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 대웅전 왼쪽 옆 ‘원효스님 기도도량 관음전 가는 길’ 팻말을 따라 올라가면 대낮에도 전등을 밝혀놓은 어두운 바위굴이 나온다. 굴을 빠져나오면 남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보이는 육지같은 큰 섬이 남해도이고 그 오른쪽이 부처님 형상을 닮았다는 세존도다. 영호남의 경계 역할을 하는 세존도 오른쪽으로 금오도 작도 등 다도해의 유·무인도들이 늘어서 있고 푸른 바다에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나아가는 고깃배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금산 보리암은 보이지 않지만 보리암과 세존도 그리고 향일암의 한 가운데 지점에 용궁이 있다는 전설도 재밌다.

향일암에서 보는 바다는 호수 같기도 하다. 남해도와 세존도, 그리고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앞을 가로막고 좌우 양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향일암에서의 일출은 사진으로만 보면 일몰과 구별못할 정도로 잔잔해,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감미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음전 앞에서 조우한 우석 총무스님은 향일암과 거북에 얽힌 전설을 일러줬다.

그에 따르면 풍수상으로 이곳은 거북이 불경을 지고 바닷속으로 막 들어가려는 형상이다. 관음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임포마을의 바다와 접한 둔덕이 거북의 머리, 향일암이 선 곳이 거북의 몸통, 임포마을 입구의 주차장이 거북의 왼발이라는 것. 이 말을 듣고 지형을 살펴보니 어쩜 이리도 맞아 떨어지는지 신통할 정도다.

산이름도 큰바다거북 오자를 써 금오산(金鰲山), 암자이름도 거북(龜)의 영(靈)이 서려있는 곳이라 해 영구암(靈龜庵)이고 향일암 주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거북등 무늬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내친 김에 금오산 정상에도 올라보자. 해발 323m로 그리 높지 않은데다 향일암 자체가 산 중턱이라 넉넉잡아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대웅전의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가 산신할아버지를 모신 삼성각을 지나면 등산로 팻말이 보인다. 그곳이 들머리다. 오르막이 심하지만 곳곳에 있는 철계단과 밧줄이 산행을 도와준다.

정상에 서면 다도해국립공원이 장쾌하게 펼쳐져 적어도 이 순간만은 누구나 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탄생계를 외쳤던 석가모니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우쭐해지고 한편으론 황홀경에 빠져들 정도.

정상에서 만난 마을주민 김용복씨는 “오늘 따라 파도가 거세 거북 머리에 부딪히는 하얀 포말이 더 인상적”이라며 “이런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상석 옆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세운 ‘금오산과 향일암의 유래’ 안내도를 보며 눈 앞에 보이는 섬 이름을 일일이 확인해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 글·사진=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2003-07-30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