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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조  │연안의유래│연안이씨실상│가문의 선조│  종    파  │종파항렬자│대장군공파상계│족보개요│보첩종류│족보 용어

 

가문을 빛낸 선조들  

이분희(李汾禧)  ?∼1278(충렬왕 4)

대장군(大將軍) 송(松)의 아들이고 분성(汾成)의 형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 행수지유(行首指諭)가 되고, 이어 장군(將軍)에 올라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았다. 그 후 대장군(大將軍)·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1274년(충렬왕 즉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지주사(知奏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분성(李汾成) 일명 이습(李이습.bmp)  1240∼1278(충렬왕 4)

고려의 무신. 대장군 송(松)의 아들. 형 분희(汾禧)와 함께 김준(金俊)의 심복이 되어, 고려 고종의 궁첩(宮妾)의 딸과 결혼하여 국서(國參)라 자칭했다.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아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오르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추밀원 집주(樞密院執奏)·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뒤에 상장군(上將軍)·승선(承宣)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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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령(李貴齡)  1345(충목왕 1)∼1439(세종 21)

고려·조선조의 문신. 자는 수지(修之), 시호는 강호(康胡), 고려 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청주등처 관군만호(靑州等處 官軍萬戶) 등을 역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잠저(潛邸) 때의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394년(태조 3)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서 사신(使臣)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병조판서(兵曹判書)·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변정도감(辨定都監) 제조(提調)등을 역임하고, 1415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을 거쳐 이듬해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이 되었다가 곧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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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형(李石亨)  1415(태종 15)∼1477(성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백옥(伯玉), 호는 화헌(화軒), 시호는 문강(文康), 증좌의정(贈左議政) 회림(懷林)의 아들. 1441년(세종 23) 수석으로 진사·생원이 되고,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 부교리가 되고 1447년 응교(應敎) 때 문신중시(文臣重試)에 급제, 집현전 수직제학(守直提學)에 보직되었다. 1451년(문종 1)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직,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 이어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 참의를 거쳐 1457년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로 나갔다가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漢城) 부윤(府尹)에 올랐다.
1460년 황해도 관찰사,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 부사(副使)로 경기도 관찰사를 겸직하고, 1462년호조(戶曹) 참판(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7년 동안 재임, 1466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품되었다.
팔도(八道) 체찰사(遞察使)로 나가 지방의 호패법의 시행을 독찰(督察)하고 1468년 세조가 죽은 후 고부(告訃) 겸 청시승습사(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469년(예종 1)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1470년(성종 1)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글씨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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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형 필적

  이석형 신도비

이석형 묘

이숙함(李淑王咸)

조선의 문신. 자는 차공(次公), 호는 몽암(夢菴)·양원(楊原), 시호는 문장(文莊), 연성부원군 말정(末丁)의 아들. 1454년(단종 2)생원으로 증광문과(贈廣文科)에 급제,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고, 이듬해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감찰(監察)이 되었다.
1457년(세조 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9년 사경(司經)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응교(應敎)가 되어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2等으로 급제했다.
1470년(성종 1)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을 거쳐 1480년 군기시정(軍器寺正), 1484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이듬해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의 편찬을 끝냈다.
1488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듬해 수전라도관찰사를 겨쳐 149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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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李崇元) 1428(세종 10)∼1491(성종 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시호는 충간(忠簡), 참판(參判) 보(補)의 아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贈廣文科)에 장원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459년(세조 5)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설화사건(舌禍事件)으로 파직당했다가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재등용, 이조정랑(吏曹正郞)·부지통례문사·검상(檢詳) 등을 역임, 사인(舍人)에 승진하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1468년 판결사(判決事),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어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都承旨), 1474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죽었다.
중종(中宗)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1648년(인조26)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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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초상

이숭원 초상

이숭원 현동사

이숭원 어서각

이숙기(李淑琦) 1429(세종 11)∼1489(성종 20)

조선의 무신. 자는 공근(公瑾), 시호는 정양(靖襄), 연성부원군 말정(末丁)의 아들. 1453년(단종 1)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사온서령(司온 署令)을지낸 뒤, 세조의 가전훈도(駕前訓道)로 뽑혔다.
1459년 평양 판관, 1461년 영변 판관을 역임하고, 1467년 특진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等으로 이조 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으로 봉해졌다.
이 해 겨울 건주위(建州衛)의 정벌에 나가서 다시 크게 공을 세워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받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뒤에 황해도 관찰사·영안도 관찰사, 영안도(永安道)·전라도 및 경상도의 절도사(節度使) 등을 역임, 형조 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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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李山夔) 1493(성종 24)∼1547(영종 2)

조선의 문신. 자는 사고(士高), 호는 정헌(靜軒), 대호군 수장(壽長)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대죄(待罪)했으나 무사했다.1545년 대호군에 오르고, 1546년(명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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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백(李後白) 1520(중종 15)∼1578(선조 11)

조선의 문신.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 관찰사(觀察使) 숙함의 증손, 국형(國衡)의 아들. 16세 때 향시(鄕試)에 수석 합격하여 상경, 이의건·최경창·백광훈 등에게 사사했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7년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에 보직,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1567년 전한(典翰)이 되고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대사헌·부제학·이조 참판을 역임, 1573년(선조 6)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죽어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만2년상을 주장하여 실행하게 했고, 1578년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함안(咸安)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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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李 熹) 1532(중종 27)∼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수(子脩), 호는 율리(栗里), 참의(參議) 인문(仁文)의 증손, 위수(威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중우(張仲雨)의 딸이다. 李滉의 문인.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성균관 · 이조 ·호조 · 병조에서 여러관직을 역임하고 지방의 현령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군수를 지내다가 난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적과 싸우다 전사 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 주(李 澍) 1534(중종 29)∼1584(선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언림(彦霖), 호는 분봉(盆峯), 시호는 정목(靖穆), 군수 경종(慶宗)의 아들. 1558년(명종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중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13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재직 중 죽었다.
죽은 뒤에 아들 광정(光庭)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追贈), 연녕부원군(延寧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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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李 輔) 1545(인종 1)∼1608(선조 4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임(景任), 호는 남계(南溪), 성리학자 진(軫)의 동생, 군위(軍威) 출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서 1580년(선조 13)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 의병으로 활약하면서 전란으로 황폐해진 인동(仁同)을 임시로 맡아 다스리는 한편, 관찰사의 명으로 모속관(募粟官)이 되어 군량미 조달에 노력했다.
후에 김응남·정곤수 등의 추천으로 받아 당진(唐津)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인동(仁同) 주민들의 청으로 인동 현감(縣監)에 보직되어 선정을 베풀고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쌓을 때 그 역사(役事)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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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정(李光庭) 1552(명종 7)∼1627(인조 5)

조선의 문신.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눌옹(訥翁), 정언(正言) 주(澍)의 아들. 1573년(선조 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예조 좌랑(禮曹佐郞)·전적(典籍)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고, 160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연원군(延原君)으로 봉해지고 뒤이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에 진봉(進封) 되었다.광해군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대북(大北)의 난정을 보고 병을 이유로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이조(吏曹)·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가 되었으나 사퇴, 1626년(인조 4) 개성부(開城府) 유수(留守)가 되었다가 이듬해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강화에 들어가 병사했다. 선조 때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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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정 필적

이호민(李好閔) 1553(영종 8)∼1634(인조 12)

조선의 문신.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峰)·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 연안군 숙기(淑琦)의 증손.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뽑히고 이어 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집의(執義)로 응교를 겸했다.
1592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에 왕을 호종(扈從), 그후 요양(遼陽)에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 군대를 이끌어 들이는 데 크게 활약했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 등을 역임,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했고, 이듬해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1599년 동지중추부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601년 예조 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이듬해 대제학·예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608년 선조(宣祖)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장남(長男)을 등극(登極)시켜야 한다는 입장론을 주장했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향리(鄕里)에서 시주(詩酒)로 소일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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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설(李基卨) 1556(명종 11)∼1622(광해군 14)

조선의 문신.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박지화(朴枝華)의 문인. 효행으로 1585년 참봉에 발탁, 이듬해 청산 현감(靑山縣監)에 특진, 1592년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고, 이 해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난이 끝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갔다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1599년 상원(祥原) 군수를 거쳐 1601년 쳥백리에 녹선, 이듬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603년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거쳐 1605년 사도시정(司道寺正),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발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부호군(副護軍),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이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직, 고향에 내려갔다.
만년에는 학문에 전심, 경사를 비롯하여 천문·지리·율학·병술(兵術)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상소로 이조 참판에 추증, 1633년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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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李 貴) 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 정화(廷華)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으로서,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고, 강릉(康陵) 참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 선유관(宣諭官)으로 우마(牛馬)·군졸(軍卒)·대두(大豆)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이듬해 장성(長城) 현감·군기시(軍器寺) 판관·김제 군수를 역임,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안산 군수·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백천(白川)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09년(광해군 1) 함흥 판관(咸興判官)을 겨쳐 1616년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무고를 입고 수삼된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 기(崔 沂)를 만나 본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당했다.
그 후 평산(平山)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개탄, 1623년 김 유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을 추대, 호위 대장·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참찬·대사헌·좌찬성이 되었으며,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병조 판서·이조 판서를 지내고, 이 해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만2년으로 주장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했다.이듬해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왕을 강화도에 호종(扈從),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인조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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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 초상

이귀 필적

이홍로(李弘老) 1560(명종 15)∼1612(광해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유보(裕甫), 호는 판교(板橋), 군수 간(侃)의 아들. 1579년(선조 12) 진사(進士)가 되고, 1583년 정시문과에 장원(壯元),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하다가 도망, 뒤에 함경도 도검찰사(都檢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지내면서 또 도망, 다시 선전관이 되었으나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원배(遠配)되었다. 그후 풀려나와 경기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1608년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의 일파로 제주에 유배(流配), 1612년(광해군 4) 능지처참(凌遲處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귀(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응암(凝菴), 시호는 문충(文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현령(懸令) 계(계)의 아들. 윤근수의 문인.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행재소(行在所)에가서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황 신(黃 愼) 등과 함께 뽑혀서「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좌랑(佐郞),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 집의(執義)·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병조 참지(參知)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했다.
1598년 명나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 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파직시켰다.
귀국 후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자주 관반(館拌)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명나라에 갔을 때는, 그 곳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다.
1623년(인조 1)에 예조 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에 왕을 공주에 호종, 1627년 정묘호란 때도 병조 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란하여 화의를 반대했다.1628년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代 문장가(文章家)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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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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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귀 묘                                                          이정귀 필적

이희건(李希建) ? ∼1627(인조 5)

조선의 무신. 자는 중식(仲植), 시호는 장렬(壯烈), 홍평군 종장(宗張)의 아들. 무과에 급제, 안주 목사로 한때 견책되어 평안도 우후(虞侯)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선천(宣川) 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용천(龍川) 부사로 있을 때 이 괄(李 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 장 만(張 晩)을 따라 적을 안현에서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으로 홍양군에 봉해지고, 임지에 돌아가 용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비, 백성을 동원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쌓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의주·안주가 함락되고 용골산성이 포위되자 부하를 이끌고 분전 하다가 전사했다. 뒤에 부민(府民)들이 그의 산성 축조의 공덕을 찬양하여 비를 세웠다. 좌찬성에 추증, 숙종 때 용처의 충렬사,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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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직(李時稷) 1572(선조 5)∼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시호는 충목(忠穆),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조호익·김창생의 문인.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별제(別提)가 되고, 이 해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에 호종했다.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을 거쳐 1635년 正言(정언)·掌令(장령)·弼善(필선) 등을 역임하고 장악원정(掌樂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낸후,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 주부(司僕寺주부(主簿)) 송시영의 뒤를 이어 자결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 강화의 충렬사,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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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직 필적

이창정(李昌庭) 1573(선조 6)∼1625(인조 3)

조선의 문신.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무궁옹(無求翁), 정언 주(澍)의 아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은율 현감이 되고,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1611년 순천 부사, 1613년에 동래 부사, 1616년 양주 목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듬해 이괄의 난에 인조를 공주에 호종했다. 이해 명장(明將) 모문룡과 의견충돌을 일으킨 함경도 관찰사 권반(權盼)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군대의 약탈행위를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1625년 선위사(宣慰使)로 안변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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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담(李時聃) 1584(선조 17)∼1665(현종 6)

조선의 문신. 자는 현충(玄忠), 호는 사우당(四友堂),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서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형을 도와 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 감찰(監察)·사직서령(社稷署令) 등을 지낸 후 충주 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려 명관으로서 이름났고 순창·능주 등지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서예에 능했고,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호조 판서에 추증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현(李 示玄 ) 1584년(선조 17)∼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장(子章), 호는 탄옹(灘翁)·월탄(月灘), 시호는 충정(忠定) 판서 광정(光庭)의 아들, 영의정 유영경의 사위.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612년 유영경이 추죄(追罪)를 당할 때 삭직(削職) 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었다.이어 호조·형조·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장령(掌令)에 승진, 1631년 정언(正言)을 거쳐 1634년 순천 부사로서 잘 다스려 가자(加資)되고, 이해 충청도 양전사(量田使)로 나갔다가 1635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해도·평안도의 관향사(管餉使)로 공을 세워 연안군에 봉해지고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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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의(李景義) 1590(선조 23)∼1640(인조 18)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방(子方), 호는 만사(晩沙), 부사(府使) 상민(尙閔)의 아들. 어머니는 전주이씨 북청판관 학수(鶴壽)의 딸이다.1616년(광해군 8) 진사가 되고, 161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인조반정(1623) 후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 1627년(인조 5) 평안도 순안어사(巡按御史)·수찬(修撰), 이듬해 장령(掌令)을 지냈다.
1630년 경상도 암행어사·부교리·집의·부응교, 이듬해 교리를 역임,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흩어진 군진을 수습하여 어가를 호종했다.
1638년 홍주(洪州) 목사·호조 참의, 이듬해 승지, 이조의 참의·참판을 거쳐 1640년 행호군(行護軍)이 되었다. 문장가로 일가를 이루어 당대 명문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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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李時白) 1592(선조 25)∼1660(현종 1)

조선의 문신.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시방(時昉)의 형이다. 이항복·김장생의 문인.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연양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군사를 모집, 그 공으로 수원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1629년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던 죄로 품계가 깎이고, 이듬해 양주(楊州) 목사를 거쳐 1631년 병조 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직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城)을 수비했고, 이듬해 병조 판서에 특진했으나 1638년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아들 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자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후 탄로되어 파직, 중도부처(中途府處)되었다.
곧 풀려나와 총융사(摠戎使)에 보직되고, 1642년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뒤 1645년 공조 판서, 이어 병조 판서, 1649년 이조 판서를 거쳐 1650년(효종 1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 해 진주사(陳奏使)로, 이듬해 좌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 1653년 다시 사은사로 각각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양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655년 영의정에 올랐다. 1658년 김육의 건의를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고,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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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초상

 

이시백 필적

 

 이시방(李時昉) 1594(선조 27)∼1660(현종 1)

조선의 문신.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 시호는 충정(忠靖),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 1623년 인조 반정에 아버지와 함께 가담,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는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1625년(인조 3) 서산 군수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에 피란하기에 앞서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강화의 군비를 정비했고, 인조 도착 후에는 군량미 조달 임무를 맡아 보았다. 이듬해 전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고, 이해 광주 목사(廣州 牧使) 겸 남한산성 방어사가 되었다.1632년 한성부의 좌·우윤(左·右尹)을 역임하고 인목대비가 죽자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1636년 나주 목사·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이 해 겨울 전년의 병자호란에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상경하지 않은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고, 1640년(인조 18) 풀려 나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제주도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殮襲)했고, 그 뒤 광주 수어사·병조 참판을 지내고, 호조 참판으로 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종 때 형조·호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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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방 필적

이명한(李明漢) 1595(선조 28)∼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시호는 문정(文靖), 좌의정 정귀(廷龜)의 아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좌랑에 이르러 앞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이에 참여치 않았다 하여 파면되었다.
인조반정(1623) 후 경연시 독관(經筵侍 讀官)이 되고, 이괄의 난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8도(道)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여러 조의 참의, 대사간·부제학을 지내고 1639년(인조 17) 병조 참의·도승지를 거쳐 1641년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이 되고, 이해 대사헌·도승지 겸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 1645년 이경여·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라 하여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해 세자 이사(世子 貳師)가 되어 볼모로 잡혀 간 세자를 모시러 심양에 갔으며,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하는 자문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 나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심양까지 잡혀 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首)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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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한(李昭漢) 1598년(선조 31)∼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좌의정 정귀(廷龜)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15세로 진사가 되고, 1621년(광해군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인조반정(1623) 후 정자(正字)·정언(正言)· 교리(校理)를 지냈다.1626년(인조 4)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헌납·응교를 거쳐 승지에 올랐다. 1632년에 인조의 사친 추숭(私親 追崇)을 반대하여 충원(忠原) 현감으로 좌천, 이어 사직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조 참지·예조 참의·진주 목사를 역임했다.
1643년(인조 21)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호종(扈從), 돌아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판 겸 비변사 당상(備邊司 堂上)에 이르렀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아버지, 형 명한(明漢)과 함께 송나라의 삼소(三蘇:순(詢)·식(軾)·철(轍))와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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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한 필적

이소한 묘

이돈오(李惇五) ?∼1637(인조 15)

조선의 순절자(殉節者). 자는 자전(子典), 시호는 충현(忠顯), 기설(基卨)의 아들.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진)의 딸이다. 4대에 걸쳐 정문(旌門)이 세워진 가문에 태어났다. 천거로 선공감(繕貢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제릉 참봉(齊陵 參奉)·사섬시 봉사(司贍寺 奉事)·시직(侍直) 등을 지내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評)이 되었고, 이어서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36년(인조 14) 사직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친과 함께 강화에 가서 훈련 도감 낭청(訓鍊都監 郎廳)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했고, 강화에 침입한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좌참찬에 추증, 숙종 때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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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정(李時程) ?∼1653(효종 4)

조선의 문신. 자(子)는 중화(仲和), 형조 정랑 윤(贇)의 아들. 유생으로서 1618년(광해군 10)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향리에 은퇴했다가 1623년 인조 반정 후 성균관 재임(齋任)이 되고 대사성 정엽(鄭曄)에게 건의하여 앞서 광해군 때 협박에 못이겨 폐모론에 추종한 자들은 유적(儒籍)서 빼지 않도록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경상도로 피란, 명유 정경세(鄭經世)에게 수학하고 이듬해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를 거쳐 의금부 도사(都事), 후에 남별궁(南別宮) 감조관(監造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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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李壽仁) 1601(인조 2)∼1661(현종 2)

조선의 문신.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惺菴), 현감 태길의 아들 강진출신. 1624(인조 2)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 1632년 현릉(顯陵) 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권지정자(權知正子)가 되었다. 정언(正言)에 이르러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오직 학문에만 뜻을 두고 전적(典籍).지평(持平)·사간(司諫)·전한(典翰) 등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경사(經史)·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sign_left_18_15.gif

이극인(李克仁) 1602(선조 35)∼ ?

조선의 문신. 자는 사안(士安), 호는 송정(松汀), 복길(復吉)의 아들. 해남(海南)출신.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639년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완 (李 示完) 1604(선조 37)∼1649(인조 2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완(子完), 1639년(인조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자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 이를 시행하게 했다.
이어 병조 좌랑을 거쳐 옥구(沃溝) 현감에 보직,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예조·병조의 정랑, 정언·직강·지평 등을 역임하고, 1645년 대기근으로 진휼청(賑恤廳)을 두게 되자 각도의 운미선(運米船)을 보내어 비축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했고, 1648년 지평에 재임되자 권신 김자점(金自點)이 뇌물을 받고 기강을 문란시킴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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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李 示會 ) 1607(선조 40)∼1666(현종 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방(子方), 관찰사 창정(昌庭)의 아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과 6조의 낭관(郎官), 3사(司)의 벼슬을 거쳐 주군(州郡)을 다스렸다.1648년(인조 26) 강릉 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 도(李 示周 ) 1609(광해군 1)∼1639(인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주(子周), 호는 하석(霞石), 판서 광정(光庭)의 아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3년 증광문과(贈廣文科)에 장원(壯元), 1635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갑과로 급제, 수찬(修撰)이 되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반대했다.
이듬해 교리를 거쳐 1638년 이조 정랑(吏曹 正郞)에 전직, 다음해 헌납(獻納)에 올랐다가 교리가 되어 왕에게 잠(箴)을 지어 올려 상으로 호피(虎皮)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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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李一相) 1612(광해군 4)∼1666(현종 7)

조선의 문신.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시호는 문숙(文肅), 영의정 정귀(廷龜)의 손자, 이조 판서 명한(明漢)의 아들. 1628년(인조 6) 17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연소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있다가 1633년 설서(說書)가 되고, 검열(檢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정언(正言)으로 화의를 반대하다가 이듬해 척화죄인(斥和罪人)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1654년(효종 5)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수립에 도움을 주었다.
1657년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實錄修正廳) 당상(堂上)이 되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랐으며, 1659년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 당상(堂上)에 차출되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1660년에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이조와 예조의 참판, 대제학을 지내고, 그 후 우참찬·한성부 판윤·동지경연사·지의금부사·지춘추관사·호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러 죽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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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 필적

이일상 묘

 

이가상(李嘉相)  1615(광해군 7)∼1637(인조 15)

자는 회경(會卿), 호는 빙헌(氷軒), 판서 명한(明漢)의 아들. 척화신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의 딸과 혼인하였다.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피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탈출, 또 피란 중 적에게 쫓겨 어머니만 숨기고 자신은 체포되었다. 아내 나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섬으로 피신, 그 후 풀려나온 그는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 적진을 헤매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내도 상심 끝에 죽었다. 인조의 명으로 효자 정문이 세워졌고, 현종 때 교리에 추증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은상(李殷相) 1617(광해군 9)∼1678(숙종 4)

조선의 문신.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시호는 문량(文良), 정귀(廷龜)의 손자, 소한(昭漢)의 아들. 어머니는 여주이씨로 좌찬성 상의(尙毅)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1660년(현종 1) 교리(校理)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1663년 승지(承旨), 1666년 대사간, 1668년 도승지를 지냈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논할 때 형조 판서로서 대공제(大功制 : 滿 9개월)를 주장했다
이해 8월 현종(顯宗)이 죽자 애책문(哀冊文)을 찬진(撰進)했고, 송시열이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가 이어 서인(西人)들이 실각하자 삭출(削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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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신도비

 

이관징(李觀徵) 1618(광해군 10∼1695(숙종 21)

조선의 문신.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시호는 정희(靖僖). 심( )의 아들. 1639년 (인조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천거(薦擧)로 참봉이 되고, 1653(효종 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장령(掌令)에 승진했다.
1660년 제1차 복상문제 때 송시열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 滿 1년)에 대해 만 2년설을 주장하다가 쫓겨난 남인(南人) 허적(許籍)·허목(許穆)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 도사(都事)로 좌천되었다.
1664년(현종 5)다시 장령(掌令)이 되고, 1674년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남인의 득세하자 이듬해 대사성 대사헌을 역임, 한편 경연관(都憁管)이 되어 숙종의 신임을 받았다.
1680년 동지사(同知事)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89년 예조판서·보양관(輔養官)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甲戌)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기사환국(己巳換國) 때의 발계인(發啓人)으로 삭출(削黜)되었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김생(金生)의 필법(筆法)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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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징 필적

 

이유상(李有相) 1623(인조 1)∼1673(현종 14)

조선의 문신·명필. 자는 세경(世卿), 호는 동둔(東芚), 형조 참판 소한(昭漢)의 아들. 1642년(인조 2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1660년(현종 1)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663년 부교리가 되고, 응교(應敎)·예조좌랑(禮曹佐郞)·헌납(獻納)을 역임했다.
시문을 잘 했으며, 특히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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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상 필적

 

이익상(李翊相) 1625(인조 3)∼1691(숙종 17)

조선의 문신. 자는 필경(弼卿), 호는 매간(梅磵), 시호는 문희(文僖), 좌의정 정귀(廷龜)의 손자, 소한(昭漢)의 아들. 1652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정자(副正字)가 되어 「효종실록」편찬 때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 이어 대교·사간·지평·이조정랑·승지·응교·필선 등을 거쳐 1672년(현종 13) 대사간이 되었다.현종이 죽자 빈전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고, 1675년(숙종 1)한성부 우윤·대사헌을 역임, 1679년 도승지로서 송시열의 예론을 공박하는 곽세건(郭世健)을 논척(論斥)했고 경연에 나가 윤휴·허목을 면박했다.이듬해 대사헌에 전직되었으나 경신 대출척(庚申 大黜陟) 때 강릉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681년 대사성·부제학을 지냈다.다음해 도승지·이조 참판을 역임하다가 대신들의 공박을 받아 한때 개성부 유수로 전직되고, 1687년(숙종 13) 공조 판서, 이듬해 우참찬·제학·이조 판서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에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sign_left_18_15.gif

이익상 필적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9)∼1669(현종 10)

조선의 문신.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 서호(西湖), 시호는 문정(文貞), 대제학 명한(明漢)의 아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장원,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 대교 · 봉교 · 부수찬 · 교리등을 거쳐 이조 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후에 대간을 거쳐 청풍 부사를 지내고 1658년 응교가 되었다. 그후 인천 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 양주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1664년 (현종 5) 집의가 되고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西筵官)을 겸했다.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임영등의 쟁쟁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 양주(楊州)의 석실서원, 인천의 학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단상 필적

 

 이후정(李后定) 1631(인조 9)∼1689(숙종 15)

조선의 문신. 자는 정숙(定叔), 호는 만안당(晩安堂), 장령 기설(基卨)의 손자. 1660년(현종 1) 생원이 되고, 1675년(숙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부수찬·헌납을 지냈다.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에 병조참지(兵曹參知)로서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후에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봉징(李鳳徵) 1640(인조 18)∼1705)(숙종 31)

조선의 문신.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해봉(海峰), 지평 완(示完)의 아들. 1675년(숙종 1) 생원이 되고, 이 해에 증광문과에 장원, 수찬·사인·부제학을 거쳐 1691년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9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파직, 1698년 형조 참판이 되고, 1701년 행부사직(行副司直)으로 희빈 장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지도(知島)에 위리안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오(李  敖頁) 1641(인조 19)∼1698(숙종 24)

조선의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관징(觀徵)의 아들. 1660년 예조좌랑을 지내고, 1670년 정언·지평이 되고, 1675년(숙종 1)홍문관에 등용된 후 헌납·이조 좌랑·응교·사간·우부승지 등을 역임했다.1677년 부제학이 되었다가 이듬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 속하여 송시열을 종묘에 고하여 극형에 처하자고 주장다가 탁남의 영수 허적 등의 반대로 사직, 북청에 유배되었다.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 나와 승지에 등용되고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692년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 관(李 慣) ? ∼1692(숙종 18)

조선의 문신. 자는 중습(仲習), 판서 시방(時昉)의 아들. 어머니는 이수검(李守儉)의 딸이다.진사가 된 후 여러 벼슬을 역임, 만년에 이르러 판결사·형조 참의 등을 지내고 1685년(숙종 11) 공홍도(公洪島) 병마절도사가 되었다.이어 한성부 좌윤을 거처 1688년 총융사·공조참판을 역임, 이듬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나주 목사·안동부사 등의 외관직을 지내다가 사임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원(李萬元) 1651(효종 2)∼ ?

조선의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형(泂)의 아들.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지평을 지내고 1689년 정언으로서 기사환국에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헌납이 되고, 이어 이조 참의·수원 부사,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상주 목사 등을 거쳐1700년(숙종 26)충청도 관찰사, 뒤에 공조와 이조의 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연릉군을 습봉하였다.청백하기로 이름이 났고, 공주의 부용당 영당(影堂)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1724(경종 4)

조선의 문신. 유학자.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간암(艮菴), 시호는 문간(文簡), 부제학 단상(端相)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 그 뒤 전설별검(典設別檢)을 지내고 의금부 도사·공조 좌랑을 거쳐 진천 현감 때 선정을 베풀었다. 1694년(숙종 20) 이후 인천 현감·서연관·지평·천안군수·장악원정 등을 역임, 1707년(숙종 33) 장령을 지내고 해주 목사로 있을 때 석담에 있는 이 이(李 珥)의 유적을 찾고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 171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이조 참판을 거쳐 찬선·좨주를 지내고, 1719년 다시 대사헌,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 철산에 이배 도중 정주에서 죽었다.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영조 즉위 후 유생들의 상소로 신원(伸寃)되고, 좌찬성에 추증, 인천의 학산서원,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식(李 拭) 1659(효종 10)∼1729(영조 5)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숙(敬淑), 호는 외재(畏齋), 제헌(齊憲)의 아들. 이 황(李 滉)·이 재(李 縡) 의 학통을 이어받아「사칠부화(四七附話)」를 저술, 숙종 때 천거로 3차례나 군읍(郡邑)을 다스렸고, 1722년(경종 2)과 1727년(영조 3) 각각 익위(翊衛)를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해조(李海朝) 1660(현종 1)∼1711(숙종 3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동(子東), 호는 명암(鳴巖), 우의정 정귀(廷龜)의 증손, 대제학 일상(一相)의 아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694년 왕후가 복위된 후 빙고 별검(氷庫 別檢)이 되고, 1702년 전주 판관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으며, 정언·부교리·집의·대제학을 역임하고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부 때부터 3대가 모두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여 김창습으로부터 천재라는 격찬을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해조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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