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어공주를 위하여......

5. 인어공주를   위하여 ......

대학로를 다녀온 후 우리들은 더욱더 친해질 수 있었고,

급기야, 아예 6명이 스터디를 만들게 되었다.

태욱이는 항상 은원이 옆자리에 앉아 ,

주위 남학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세희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날이 갈수록,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주로 현수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모두들 좋은 아이들 같았다.

언젠가, 저녁 시간에 태욱이와 노래방에 갔다가,

테잎에 녹음을 해 온적이 있었다.

자습 시간에, 우리는 복도에 나와서 그 테잎을 들으며,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같이 듀엣으로 불렀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을 갔다 오던 세준이가 우리 쪽으로 오면서 물었다.

" 무슨 음악 듣고 있니 ?   어디 나도 한 번 들어보자....."

세준이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 어 ? '이오공감' 라이브 앨범 벌써 나왔니 ? "

이 무심코 던진 세준이의 농담 한 마디에,

우리는 곧바로 듀엣을 결성하고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근 일주일 동안 4번 이상 노래방을 들락거려 결국 테잎이 완성되었다.

그 테잎엔 조용필의 '친구여' 부터, 당시 최대의 히트곡 '하여가' 까지,

정말 주옥같은 명곡들이 실려 있었다.

우리 듀엣의 이름은 'Patience' 라고 정했다.

이 녹음 테잎을 10개를 복사해 와서,

다음날 반 아이들에게 1200원에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 팔릴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어느 누구도 테잎을 사려하지 않았다.

세준이 조차도....

나중엔 할 수 없이, 공짜로 나누어준다고 하자,

아이들이 못이기는 척 테잎을 받았다.

' 이런 나쁜 놈들.. 내가 나중에 대학가요제에 나갔을 때,

아는척 하기만 해봐라.... '

데뷔 앨범이 실패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우리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성미였다.

" 건우야 ! 태욱아 !   patience 2집은 언제 나오니 ? "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는 성미를 데리고 매점으로 가서 과자와 바나나 우유를 사주며 말했다.

" 너 우리 팬클럽에 들어올래 ? "

" 팬클럽 ? "

" 응... 지금 들어오면 너가 회장 될 수 있어... "

태욱이가 옆에서 말을 이었다.

" 팬클럽이 되면, 우리 앨범 나올 때마다, 공짜로 줄께.... "

" 정말 .... ? "

" 그럼... "

" 대신..뒷면 마지막 곡까지 들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해... "

" 근데... 팬클럽 이름은 뭐야 ? "

성미가 물었다.

"   patients ..... "

8 월 20 일 .....

이례적으로 푹푹 찌는 더운 날씨에, 대학 입학 시험이 있었다.

이름하여, ' 제 1차 대학 수학 능력 시험 '

찍은게 많이 맞았는지, 생각보다 점수를 잘 받을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난 후 열흘간은 여름 방학이었다.,

가끔 우리들은 도서관에 간다는 명목으로 만났고,

종점은 늘 어느 술집이거나, 까페였다.

같이 '쥬라기 공원'을 보러 갔다 온 적도 있었다.

누군가 우리들이 재수생인걸 알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2학기 개강을 한지도 몇주일이 지났다.

개강을 한 후론, 세희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지, 늘 우울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와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며칠 전 부턴 자율학습도 하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럴때마다, 난 자율학습 시간에 멍하니 앉아있게만 되었고,

왠지 모르는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세희의 그러한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만 만족을 느껴야 하는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난 더욱더 괴롭고 힘들어져만 갔다.

나는 세희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 그래... 비록 세희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해도...

고백하는 거야.... 나의 마음을.....사랑은 쟁취야....'

다음날 오후...

수업이 끝나자, 세희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세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오늘도 일찍 갈려구 ? "

" 응... "

세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세희야... 나랑 얘기 좀 할래 ? "

" 왜 ? "

"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우리는 'forget-me-not'에서 빨간 양초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초에 불을 붙인 후, 얼마 동안 말없이 촛불만 바라보았다.

" 요즘 ..무슨 안 좋은 일 있니 ? "

침묵을 깨고, 세희에게 물었다.

" 왜 ?   내가 그렇게 보여 ? "

" 물론이지... 요즘 왜 그렇게 심각해..? 걱정되잖아.... "

" 후훗.. 그래 ? "

" 왜 그러는 거야 ?   정말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 "

" 건우야 ! "

" 응 ? "

" 우린 친구지... "

" 그럼... 우린 친한 친구지.... "

" 내 고민 들어줄 수 있니 ? "

" 그럼.... "

“ 아무한테도 말 안할 자신 있어 ? ”

“ 그래 ... ”

세희는 잠시 한 숨을 쉬었다.

" 내가 예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지 ? "

가슴이 두근거렸다.

" 응 ... 그..그래.... "

" 그 사람 우리 반이 었어... 삼수생 오빠.....

그런데, 학원을 그만뒀어 몇달 전에.... "

‘ 내겐 잘 된 일이잖아 ...’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 왜 ? "

" 수능 시험만 본다고 학원을 옮긴다 그랬데... "

" 그랬구나 ...... "

" 그 땐 겉으로 내색을 안했지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못 견딜 정도로...... 짝사랑이란게 결국 그렇더라구... "

" ....... "

" 근데... 그때 당시, 현수가 그 오빠랑 친해서 그 사실을 알아 버렸어...."

" 현수가 ? "

다시, 웬지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 응.... 그 오빠가 떠난 후 현수가 옆에서 위로해주고,

금방 잊을 수 있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어.... "

' 현수가...!!'

" 현수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시험도 제대로 못 봤을꺼야... "

" 그랬구나......."

" 내가 왜 이러는 걸까.... ? 얼마전, 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

현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 그 .... 그럼 ...? '

" 후훗... 나 웃기는 애지 ?   하지만 난 모르겠어...

요즘엔 계속 마음이 불안하고, 현수를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힘들어.... "

" ....... "

" 건우야 ? "

" 응 ?   응..... 그래 ..... 현수 정말 괜찮은 녀석이지..

내가 얼마나 아끼는 친군데.... "

" 맞아... 현수 나이에 비해 참 어른스러운 것 같아.... "

" 세희야. 너무 불안해하지 마..... 그냥 ,니 감정에 솔찍하면 되지......."

" 그럴까 ? "

" 아마 현수도 너를 좋아하고 있을 꺼야.....

그녀석, 어쩐지 너 한테만 특별히 더 잘하는 것 같더라..."

" 후후.. 정말 ? "

" 그럼, 세희야 ! 잘 될꺼야 ...

재수생이라고 남을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 그래.... 고마워......"

" 나도 너희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 응....."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 아참 너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다고 했지 ? "

" 응 ? "

" 아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

" 아... 그거 ? "

" 그래......"

" 힘내라구 ........ 하하 ... 세희 화이팅 !! "

“ 고마워 .. ”

“ 후후 ..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일로 우울한 표정 지으며 다니거나 ..

  자율학습 안하고 집에 일찍 가고 그러지마 ... “

“ ........ ”

“ 너를 아끼는 친구들이 널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데 ... 알지 ? ”

“ 후후 ... 그래 ..... 안 그럴게 ... ”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세희를 먼저 보내고, 카페로 다시 들어왔다.

재수 시작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깊게 빨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유행가의 가사들........

후후 ... 다 ... 위선이다.....

단지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닌,

1% 라도 자기에게 돌아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계산 된 거짓말이다.....

' 후후.... 현수랑 잘 되기를 바란다고 ?   후후 ...

건우야 ! 니가 무슨 동화 속의 인어공주라도 되니 ?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만 보다가, 끝내 물거품으로 날아가버린........ '



6. 저물어 가는 계절 끝에서 ......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나 .....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도,

운이 나빠서 그랬겠지 하며, 스스로 위로를 했던 나 .....

그러나,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쓰린 패배감을 느꼈고,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것보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사실에

더 괴로워하다니....

내가 정말 세희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 '

며칠이 지났지만,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희에 대한 나의 감정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닌, 단순한 집착일 것이라며, 내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았다.

나의 이런 아픈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 입시 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건우야... 은원이가 오늘 한 마디도 안했어....... "

집에 돌아가는 길에, 태욱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 한 마디도 안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

" 글쎄... 아침에 인사해도 본 척도 안하더니...

무슨 안 좋은 일 있냐고 물어 봐도 대답도 안해....."

" 설마.... 은원이가 그랬을까.... ? "

" 정말이야... 나도 그것 때문에.. 오늘 공부 하나도 못했어..."

" 그래 ....? "

" 응..... 혹시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

" 아닐 꺼야....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시험도 얼마 안 남았으니, 신경이 곤두섰나 보다....."

다음날 아침...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현수가 나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 건우야.. 큰일났어... 어젯밤에 은원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 은원이가 무슨 일로...? "

" 어떡하지....."

" 왜 무슨 일인데...? "

" 은원이가 그 사실을 알아 버렸어...

태욱이가 지신을 좋아한다는..... 친구 이상으로 말이야..... "

나는 깜짝 놀랐다.

" 아니 !!   어떻게....?    그래서....? "

" 은원이 말로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데.....

우리는 단지 친구일 뿐이라며.

그 이상의 감정을 갖는다면 너무 부담스럽다고..... "

" 이런..... "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이젠 태욱이가 자기 근처에 오는 것조차 기분 나쁘데.... "

" 아니... 그런 말까지 했어.. ? "

" 글쎄 말야.... 어떡하지... ? "

" 하긴... 시험 한 달전에 그런 사실을 알았으니, 부담스럽기도 하겠다....

하지만.... "

" 태욱이 자식.. 충격이 꽤 클텐데...."

"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

" 하긴 해야지..

오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은원이 옆자리에 앉으려고 할텐데...."

“ 큰일이구나....... "

뜻밖에도, 태욱이는 이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짐작을 했었다는 듯이, 그냥 웃으면서, 괜찮다고만 했다.

하지만, 난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전에 그랬듯이.....

다음날 태욱이는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와 현수는, 맥주를 사 들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 너희들 여기까지 웬일이야....? "

" 웬일이긴 ?   요거 같이 마실려구 왔지...."

현수가 병 하나를 꺼내 흔들면서 말했다.

" 술.....? "

" 그래.... "

" 난 괜찮다니까......   그냥 몸이 안 좋아서 학원 안간 거야..."

" 그게 아니고, 오늘이 33일 전 아니니.... 삼땡주 마셔야지.... "

나는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봤다....

내가 만약 작년에 대학에 붙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지난 1년 동안, 즐거웠었던 일... 슬펐던 일....

모두모두 소중한 추억들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세희 ...........

모두들 쉴틈 없이 계속 술을 마셔, 상당히 취해 있었다.

우리는 술을 가득 부은 후, 마지막 잔을 들었다.

" 그래.... 사랑은 모두 헛거야....... 다 잊어버리자....

하지만, 우리의 우정만은 변치 말아야 해.... 알겠지... ? "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세희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친구들에겐, 이제 부턴 시간 낭비하지 않고,

집앞 독서실에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했지만,

태욱이와 은원이 일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았다.

" 얘들아... 연락 자주해... 내가 독서실 전화 번호 가르쳐 줄께...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끝나고 꼭 다시 만나는 거야.... "

친구들은 끝까지 같이 공부하자며 세희를 말렸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 그래....세희를 보지 못하게 되면, 금방 잊을 수 있을꺼야... '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다.

명동 거리는 온통 수많은 연인들과 가족들로 붐볐지만,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J 학원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날 밤 세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 정말 오랜만이야... 왜 연락도 안했어.... ?   "

나는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다소 흥분해 있었다.

" 그런 너는 왜 안했니.... ?    잘 지내고 있지...? "

" 하 ~~ 난 너가 바쁠 줄 알았지.. 공부는 잘 하고 있어..?"

" 그냥 그래.... 다른 애들은.....? "

" 응.... 잘 지내고 있어.... "

" 태욱이랑 은원이는..... ? "

" 둘이 화해(?)했어.... 그냥 자연스럽게 그전처럼 돌아왔어..."

" 잘 됐구나..... "

" 세희야... 너 원서는 냈니....? "

" 아니.... 아직.... 나   Y 대 쓸려구.......   너는 ? "

" 나는 아직 결정 안했어....

태욱이랑, 현수랑, 은원이는 어제 S대에 원서 넣고 왔어...

소진이는 말을 안해서 잘 모르겠고...... "

" 그렇구나..... "

" 세희야 ! 과는 정했니...? "

" 응..... 어렵겠지만, 치대 쓸려구...집에서도 원하고......"

" 그래.. ?   열심히 해..... 너라면 붙을 수 있을꺼야....."

" 그래... 고마워 ... 너두 열심히 하구.. 또 연락할게 .... "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 건우야.... 너 올해 어디 볼 생각하고 있니.....? "

" 예...?   저 Y 대 써 볼까해요..... "

" Y 대 ? 과는 ? "

" 치대를 볼까 생각중이예요...."

" 치의예...? 왜 의대는 무섭다고 싫다고 했잖아 ? "

" 그래도...치대는 좀 덜하겠죠....... "

" 너 재수 하면서 성적이 많이 올랐니 ? 거기 써도 괜찮겠어 .... ? "

" 지금으로선 많이 힘든거 같지만, 한 번 해 볼려구요 ... "

" 아무튼 잘 됐다... 우리 집안에서도 의사 한 명 나오는구나..."

" 아니에요 ...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도 아니라 .... "

“ 그래 .... 삼수는 안되니까 ... 잘 생각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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