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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 (1987년-1990년)

달려라! 차돌이!!
If you can dream it , you can do 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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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대학의 건축공학과를 들어갔다. 누나 曰 : 거기서 하나님 궁전 짓는 기술 배워라. 당시에는 너무나 어이없고 희한한 말로 들렸음. (나중에 안 일인데 누나가 나를 시골에 그냥 두면 안될 것 같아 서울로 올라오게 해달라고 엄청 기도했다고 함).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기타만 쳤다. 그때 기타를 안쳤으면 아마 미쳐 버렸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는 게 재미없었고, 시대가 허무했다. 사르트르를 만난 것이 이때였던 것 같다. "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권리이다"."실존(實存)은 본질(本質)을 앞선다"... 암호 같은 이 말들을 되풀이 하며, 87년의 6월을 향하고 있었다. 6월 항쟁이 있기 직전의 그 분위기는 태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간간이 학생시위가 있었고, 전투경찰이라는 무리를 처음 보았고, 돌맹이와 체류탄이 오가는 그 충격의 현장이 나를 당황케 했다. 그때 도서관에서 내가 본 책이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사진으로 보는 조선의 근대사였고, 시대별 10대 사건 사고 기록집이었다.

 

 

그해 5월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이 과정도 참 재미있음(?))
독학으로(요것은 더 재미있음(?)) 재수 시작.
이때 나는 참으로 외로웠다. 외롭다고 말할 사람조차 없었다. 처음 겪어 보는 서울 생활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사람과 도시는 너무나 차가웠다. 차라리 영어나 수학책이 더 따뜻했고, 친근감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첫 대면을 하는 셈이었다.

88년에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입학. 입학식 다음날 '성균민속연구반(탈)'에 가입, '하나의 탈을 벗기 위하여 하나의 탈을 쓴다'는 패러독스를 역설한 탈패는 당시 운동권 동아리로 완전히 낙인이 찍혀 있는 곳이었는데 1학년때는 완전히 술로 세월을 보냈다.(2학년 1학기까지) 정말 목숨을 걸어 놓고 술을 마셨다. 왜냐구? 할 일이 없어서.

 

 

나를 휘어잡는 것이 없었다. 누구도, 무엇도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술만이 나를 감동시켰다. 술마시고 해롱해롱. 나는 오로지 술을 통해서 진실해 질 수 있었다. 나의 원초적 갈증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술만 마시면 눈물을 마신날이 없었다. 어쩌면 술 취한 정신이 재정신이었다.

1학년 겨울이 지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이 '문학'이었다. 정확히는 詩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詩를 통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생이고, 인간이고, 삶이고 이런 따위의 말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1년의 술타령 끝에 내가 도달한 소결론이었다. 사실 좀 창피했다. 삶이고, 인생이고, 문학이고.... 하는 따위는 중고등학교때 다들 한번씩은 고민해 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고민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재수까지 하고, 대학교에 와서야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도 못했다. 누가 들어면 비웃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생각만 하고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대생인 나는 한번도 詩라는흘렸다. 왜냐구? 그건 나도 몰라! 내 지난 20년의 세월이 송두리째 눈물로 변해 있었다. 하루도 술을 안 것을 써 본 기억이 없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냥 슬펐다. 이런 방법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멀기만한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현실이 슬펐다. 왜 이 시대의 젊음들은 공부도 못하고 이렇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밥조차 굶어가며 싸워야 하는지... 엄마 아버지 얼굴이 스쳐간다. 등꼴이 휘이도록 농사일해서 등록금 마련하시는 부모님. 방울방울 슬픔이 맺혀 들었다. 가슴속으로 흘러 들었다. 8일간의 단식으로 바보같이 순진한 나의 가슴에는 '현실'이라는 단어 하나를 세겼다. 나의 고향, 그 가난과 노동의 현실, 분단의 민족현실, 손가락 잘리고 손목이 잘리고,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졸다가 손가락을 미싱질 해도 피해 보상 한번 재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 머리카락과 함께 머리가 말려들어가고, 오징어 같아 눌려 버린 동료의 시체를 삽으로 ?어 내야만 하는 현실....

 

 

2학년때도 술마시는 것은 여전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후배들이 들어왔다는 것이 한 가지고, 나에게도 화두(話頭)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었다. '한과 신명'. 이것은 풍물속에 들어 있는 우리 민족 공통의 정서었다. 특히 탈춤을 추다 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정서를 읽을 수 있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눈물밖에 안나오는 정서었다. 그런데 그것이 신명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즉 한과 신명은 같은 정서이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서는 우리 나라 고대사에서부터 현재까지 민족사의 줄기 줄기마다 골작골작마다 서린 정서이다. 언젠가 말했던 것 같은데, 농활 갔을 때 우리가 농촌 현실에 대한 창작 탈춤을 공연하면 할머니들이 좋아서 박수를 치는데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들이 흘러 내는 아이러니 같은 정서가 그런 예일 것이다.

1학기 중간쯤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전대협 주최로 전국 대학생 단식 궐기가 있었다. 전국 대학에서 올라온 수백명의 대학생들이 명동성당 바닥에 드러 누워 굶기 시작했다. 올림픽 후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산재해 있을 때 었는데, 10일 정도 계속되었다. 나는 이틀 늦게 동참하게 되었는데, 5일이 지나면서 체력이 떨어진 사람들은 탈진으로 기절하기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노태우 물러가라!고 시민들에게 선전을 했다.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한명 두명씩 쓰러져 갔다. 의대생들이 막사를 만들고 환자를 돌보았다. 그때까지 한번도 TV 방송을 하지 않던 이땅의 언론에 대해 절망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들 다 죽이겠다며 여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문마다 명동성당 집단 단식투쟁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2학년 여름방학때 단독 지리산행을 했다가 완전히 죽을 뿐 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 동료들과 후배들을 사랑으로 모두안아야 한다는 느낌 하나를 소득으로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게 맨바닥에서 '사랑하자!'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수도자도 아닌데 뜻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2학기때 탈패 회장직을 맞으면서 인격적으로 좀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또 그때 정치조직과 연결되어 사상적으로도 훨씬 강도높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준비 기간이었던 것 같다.

3학년 1학기 4.19집회때 연행, 구속되었다. 하지만 나의 정신적인 흐름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감옥 갔다와서 얻은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경험 한가지 더한 것밖에. 석방되고서 탈패 일 보다는 정치활동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곧 바로 민중당 건설 준비를 했다. 컴퍼스에서 준비위원장을 맞으면서 민중당 창당 때까지 컴퍼스와 전국회의를 오가면서 나의 시야가 전국으로 확대되던 시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