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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 (1991년-1992년)

달려라! 차돌이!!
If you can dream it , you can do 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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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에는 강 경대를 시작으로 십수명의 분신행렬이 이어지던 때었다. 죽음, 죽음, 죽음... 한 고개 죽음을 넘어서면 또 죽음이 있었다. 또 한고개 넘어서면 또 죽음, 죽음, 죽음. 91년 4월 5월은 거리에서 살았다. 거리에서 밥을 먹고, 투쟁하고, 잠을 잤다. 시민들이 주는 빵을 먹고 우유를 마셨다. 쇠파이프를 쥔 논에서 피가 흐르도록 싸우고 또 싸웠다. 밤이 되면 시내 컴퍼스에 모여 내일의 계획을 세웠고, 강의실 한쪽 구석에 라면박스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을 깨면 또 한명의 죽음이 까마귀처럼 날아왔다. 진달래 만발한 그해 4월을 우리는 죽음이라 말했고, 목련이 피고 진 그 죽음을 지나, 철쭉과 연산홍이 붉은 꽃망울을 피어 올릴 그 5월을 우리는 죽음이라 했다. 이 땅에 모든 꽃들이 죽음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죽음으로 절규했던 염원이 있었다. 목숨을 건 사랑이 있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한발씩 한발씩, 너무나 더디게 오고 있었다.

 

 

귀정이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와 최류탄에 힘겨운 들숨을 마실 때 고향에서는 아버님이 돌아 가셨다. 당료4기 간경화에 간암 말기, 육신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병균들에게 내 준 바 되어, 가장 아끼는 자식이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이놈의 눈물은 마르지도 않았다. 귀정이를 마지막으로 묻고 오던 날 죽음의 기운이 나를 휩싸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한달 내내 방안에서만 있었다. 한달 내내 눈물만 흘렸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詩를 썼다. 한달 내내. 간간이 무사히 살아 있는지 확인하러(?)오는 후배 몇몇이 있었다. 단 한잔의 술도 않마시고 나는 내속에 있는 모든 울분과 한을 긁어내서 詩를 썼다. 초고를 후배들에게 보여 주면 詩를 읽던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던 그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지금 돌아보면 생짜 초보인 나의 詩에서는 어설프고, 거친 표현은 있을지언정 말장난이 없었다. 살아 있는 느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문학하던 친구들 평 : 야생마가 울부짖는 것 같다!)

 

 

91년은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이 많았고, 많은 이별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곤 했다. 이별에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질 무렵, 또 한편의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고난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을이 되면서 컴퍼스에 조직사건이 터졌다. 내가 연류된 사건이었다. 본래 조직 사건은 그룹단위로 이루어지는데 같은 모임에서 활동하던 동기, 선배, 후배 13명이 하루 아침에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는 그날밤 다른 모임관계로 안산에 있을 때었다. 아침에 후배가 신문을 들고 왔는데 참 어이가 없었다. 만류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학교로 달려왔다. 항의 방문을 조직했으나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이미 요주 인물인 나의 안전을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퍼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의 눈물이 없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을 둘러 보았다. 서러움같은 것이 밀려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 달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詩를 한편 썼다.

 

혀를 자르는 연습을 한다.

우리의 혓바닥에서 나오는 정보는

동지의 생명,

그 조직적 생명은 우리 미래의 희망둥이

연습을 한다

싹뚝 깨물어

불어 터진 라면 가락을 깨물어

기득권의 환상과 현실 안주의 나약함을 깨물어

고통으로 다시 나는 연습을 한다

프로가 되는 연습을 한다

혀를 자르는 연습을 한다


독을 품는다

저들의 비계살에만 통하는 독을

전사가 될 것이다

독을 품은 전사가 전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되돌아 올 것이다

어쪄면 깃발로

어쪄면 사랑으로

적을 자를 도끼를 들고

적을 태울 기름을 들고

 '비록 지금 우리' (91. 8月)중에서

그날부터 내리 3일 연속으로 비가 왔다. 나는 그 비 속에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전환을 잡아낸다. 민족의 현실 앞에 당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무수한 젊은 주검 앞에, 아버지의 주검 앞에, 그리고 면회조차 갈 수 없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면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그 3일간의 빗속에서 한 편의 시와 한 장의 휴학원서를 썼다. 형식은 달랐지만 휴학원서는 자퇴원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詩란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속에서,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것 같은 절대한계상황에서 쓰여지는 것인가 보다. 이 詩로 나는 심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다시는 詩를 쓰지 않게 되기를 소망했다.

 

휴 학 원 서

박 차 진

3일째 내리는 비를 맞으며

4학년이라 적힌 휴학원서에 도장을 찍는다

한 평생을 파헤친 땅이건만

묻혀만 가는 당신의 희망을

자식의 합격통지서로 되찾은 당신의 희망을

휴학원서로 꺾어 버리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 속에서

담배를 물었다

4년전,

"아버집니꺼, 저 붙었십니더"

"애썼다, 얼른 내리오거라"

기다렸다는 듯 전해오는 묵직한 믿음은

어쩌면 생애 못다한 당신의 염원

하기에 자식에 거는 기대

아니 매달리는 절박함

그리고 지난 5월,

노태우의 학정속에서

죽음으로 길을 밝힌 열사들의 영정을 들고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부친위독 급귀가]

투쟁 역할을 분배하고 도착한 집

저곡가와 소외의 현실마냥

당신의 몸 둥아리에는

간암에 황달까지 달라 붙어

저승꽃이 피어 있었다

이승에 피어 있는 저승꽃

"차진아, 너그 아버지 봐라 너 아버지 다 죽었다"

어머니는 울먹이고 계셨다

"밥을 먹는지도 모르고 똥을 싸는지도 모르고……

하루만 더 빨리 오지 하로만 더…"

실성한 사람처럼 흥얼거리고 계셨다



불러도 보지만, 흔들어도 보지만

가쁜 들숨만을 어렵게 잇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불쌍한 아부지야, 차진이가 왔는데…

그렇게 찾던 차진이가 왔는데…

알아 먹지도 못하고… 알아 먹지도 못하고…

이 불쌍한 영감아"

눈만 뜨고 계셨다

뭐 아쉬운게 있는지

뭐 볼것이 더 있는지

눈만 뜨고

눈만 뜨고

그리고 귀정이가 떠나던 날

비 내리는 황토길을 떠나셨다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악착같이 달라 붙는 어머님의 말씀위로

지 한몸 잘 살면 그뿐이라는 말씀위로

도장을 찍는다

4년의 대학 생활에 도장을 찍는다

무섭게 달라드는 현실안주의 도락에

시뻘건 불도장을 새겨 넣는다

아직은 짙은 먹구름이 비를 뿌리고

전에 없던 시베리아의 흙먼지가

온 천지를 진흙탕으로 만들고…

혼돈스러운 만큼의 원칙과 정도를 밝혀야 한다

'해봐야 별수 없다'는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서서,

더이상의 나약한 눈물에 아버지의 희망으로 찍는다

모든 안락의 환상이

아름다운 투쟁의 기억으로 되살아 올 때까지

모두의 희망으로 찍는다

새살을 일구어가는 투쟁으로

찍어낸다

후려친다

휴학원서 전문(91. 9月)

91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진흙탕 연못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연꽃이 피었다고 하던가. 완전히 진창이 된 절망과 폐허속에서 나는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며 나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겨냈다.

그해가 가고 92년 봄에는 14대 총선이었다. 난 그때 안양에서 노동자 후보를 추대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등록금은 당연히 선거자금으로 들어갔다. 그때 선거 기획을 담당했었는데 학생회 선거하던 수준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기획한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 아니라 대통령 선거라도 필요하면 기획을 해야 할 일이다.

 

 

총선이 끝나고 한편의 詩를 썼다.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마라톤 회의에 들어갔다. 보름, 한달 가까운 시간 동안 회의가 계속되었다. 남한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과 문화예술의 현단계에 대한 진단을 해 내면서 '혁명의 예술혼'을 제창하며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냈다. 학생문예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제끼자는 내용의 조직건설 구상안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벗들!

      개나리는 왜

      열매도 맺지 못하는 꽃을 피우는지 아는가?

      왜 그토록 짙은 생명의 빛깔로 봄을 노래하는지 아는가?

      샛노란 봄의 빛깔은 인간의 것이지 개나리의 것은 아니다

      떨어지는 꽃잎에 아쉬움을 떨구는 것은

      자연 현상에 태연하지 못한 인간의 조급함이라

      혁명이 한순간

      절망과 분노의 폭발이 아님은…

      더 절망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 분노하고 절규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활의 구석 구석에서

      죽음의 습한 냄새가 풍기도록까지

      일상을 혁명으로 조직하는 것은

      더 깊은 패배와 무기력을 조직하는 것 아니겠는가

      개나리는 왜

      열매도 맺지 않는 꽃을 피우는가?

      개나리꽃은 져서 푸른 잎을 남기고

      뿌리를 나누며 그 뿌리를 이어

      들판을 지키고 섰다

      개나리는 왜, 열매도 맺지 않는 꽃을 피우는가(92. 5) 중에서

       

집에는 92년 8월로 입영통지서가 날아와 있었다. 당연히 군대는 갈 수 없는 상태였다. 병역기피(일명 군도바리)의 상태로 나는 문학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풍물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사진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 ...등등 전국 컴퍼스의 예술쟁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치조직과 연결되어 있었음으로 일일이 찾아 다니는 수고스러움은 없었다. 그리고 철학적 인식론과 예술적 방법론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에 대한 풍부하게 공부하고 교육했다. 이렇게 대통령 선거가 있던 12월까지 가시덤풀을 헤치는 듯한 심정으로 조직 건설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이 기간동안 최고의 리더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맛 보았다. 3시간 4시간 잠을 자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이었을까? 계획하고, 회의하고, 집행하고, 확인하고, 평가하고, 다시 집행하고, 평가하고...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는 NO!라고 말할 것이다. 후회가 없이 살았으므로. 내가 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다. 그래서 가장 크게 회상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되돌아 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도 하다.

92년 겨울에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나는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눈 덮인 빨치산의 고향 지리산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