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전통문화론」박전열·이영 공저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9 |
저자인 박전열교수와 이영교수는 일본에 유학하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며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박전열(朴銓烈) 교수는 쓰구바 대학의 역사인류학 연구과를 졸업한 문화인류학 전공 박사로서 현재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는 「日本人の原風景」, 「門付けの構造」,「日本文化」,「일본의 문화와 예술」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이분야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내었다. 이영(李領)교수는 동경대학의 종합문화연구과에서 일본사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국방송대학교의 교수로 있으며 그의 저서로는 「日本文化史」,「中世倭人의 世界」등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전통문화를 깊이 이해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이 분야의 전공자들이나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진 소수 의 엘리트층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보편적인 신지식인들이라고 하면 거의 예외없이 일본적 인 문화 유산이라든지 전통예술에 접해보고 싶어 한다. 일본의 경우 전통문화는 그들이 정신적인 동질성을 느끼는데 있어서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이를 보호,장려 육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책의 내용은 일본인들의 미의식이나 생활양식과 조화를 이루는 실천적인 영역에 대한 것 들을 담고 있다. 다도(茶道), 꽂꽂이(華道), 4대 전통 연극인 노(能), 교겐(狂言), 가부키(歌舞 伎), 분라쿠(文樂),일본정원, 일본화, 스모, 연중행사로서의 마쓰리에 대한 이야기와 재료들이 담겨 있다. 「茶道」는 차노유(茶の湯)라고도 한다.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한국인이나 중국인들과 마찬가 지로 차를 마시기를 즐겼다. 차는 약용으로,부처님에게 공양물로, 참선하는 스님들이 정신을 맑게 하는 음료로 애용되어 왔다. 다도는 다실을 꾸미고 다도구를 준비하여 차를 끓이고 마 시며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전체의 과정을 가리킨다. 차의 종류에는 찻잎을 잘게 썰어서 말려 열탕에 우려서 마시는 전차(煎茶)와 찻잎을 곱게 갈아 열탕에 풀어서 마시는 말차(抹 茶)가 있다. 다회의 시기와 목적에 따라서 크게 7가지 경우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낮다회(정오에 식사를 곁들여) ②겨울밤에 여는 밤다회 ③여름날 아침의 여름다회 ④동이 트는 새벽의 정취를 맛보며 여는 새벽다회 ⑤귀한 손님이 다녀간 후에 그의 정취를 맛보며 여는 자취다회 ⑥불시에 찾아온 손님을 위한 불시다회 ⑦그 해에 새로 딴 잎을 차단지에 넣 어 두었다가 개봉하여 대접하는 개봉다회등이 있다. 다실은 소박하게 보통 초가지붕으로 꾸미고 작은 문을 통해 손님이 들어간다. 한 차례의 다 회는 4시간 이내로 하고 다실에서는 세속적인 잡담은 금하고 시(詩)나 차에 과한 이야기를 나눈다. 다실은 족자와 꽂꽂이로 장식한다. 일상생활과 예술세게를 연결짓는 완충지대와 같 은 곳으로 시중에 있는 산거(山居)와 같이 생각한다. 일본의 꽂꽂이는 「화도(華道)」라고 하여 이에모토(家元)제도(이에모토라는 시조가 있고 문 하생에게 예능을 전수하고 각 등급의 면허를 주는)로 계승되어 지고 있는 점에서 다도와 공 통되는 전통예술이다. 원래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들어갔다. 초기에는 다테 바나(立花)라 했고 에도 초기에 양식이 완성되어 릿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반드시 나무를 세워야 신령이 그 나무로 강림한다고 믿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전에 바치는 공화(供花)의례가 사찰에서 시작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송나라로부터 원예기술이 들어와서 귀족들 사이에서는 저택에서 꽃을 가꾸고 감상 하게되어 종교적 목적 이외에 예술로서의 의식이 싹텄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귀족이나 무사 들 그리고 여유있는 승려들이 놀이의 일부분으로 꽃을 장식하고 경쟁하게 되었다. 귀족들이 칠서날 어전에 꽃을 헌상함에 있어서도 서로 다투어 진귀한 꽃을 모양좋게 꽂아서 바치고자 하는 심미적인 풍조가 싹텄다. 교토에 있는 정법사라는 절의 경내에 이케노보라는 승방이 있다. 그곳은 성공한 상인들의 사교장소로도 이용되었고 상인들의 후원을 얻게 되면서 쇼군 으로부터 이에모토라는 칭호를 받음으로 이케노보류라는 유파가 생기게 되었다. 화도에는 ‘릿카’는 엄격한 양식에 따라큰 화기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꽂는다. 한편 ‘나게이레’ 스타일은 릿카에 대한 반발로 자연 상태 그대로 병에 가지를 길게 옆으로 꼽 아 다실에 장식했다. 그러나 당시의 신흥 상인들은 이보다 더 화려한 스타일을 원했다. 19세 기 초에는 ‘세이카’라는 유파가 생겨났다. 그 골자는 유교사상이 반영되어 천(天) 지(地) 인(人)의 3요소를 고려해서 가지와 꽂을 꽂는데 있어서 3개의 큰선을 배치와 구도에 살렸다. 메이지유신 이후 이케바나는 한동안 외면시되었으나 1890년대에 일기 시작한 국수주의의 풍 조와 더불어 일본의 고유 전통예능으로 인정되어 여학교의 정규과목에 편입되어 재봉, 편물, 다도와 함께 널리 보급되었고 러·일전쟁 후에는 서양으로부터 다양한 꽃들이 들어와 새로 운 전기를 맞게되었다. 오하라(小原)운신은 새로운 생활환경과 다양한 소재와 색채를 바탕으 로 꽃의 키를 짧게 잘라 수반에 꼽는 화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냈고 당시의 서양식 주택에도 어울리는 장식예술로 발전 시키는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현재는 일본의 꽂꽂이는 대중예 술로서보편화되었고 소재와 화기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다고 말 할수 있을 정도로 대담 하고 환상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상징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 예술성을 추구하고 있다. 「노가쿠(能樂)」 또는 「노(能)」라고도 하는 가면극은 원래는 신사의 경내에서 신을 즐겁 게하기 위해서 공연했다. 이렇게 야외극으로 시작한 무대가 현재는 시내에 자리잡고 건물도 현대식으로 짓는다. 그러나 내부의 무대는 신사에 있던 무대형식을 그대로 보존하려고한다. 무대 정면에는 큰 소나무를 그려 놓고 배우들은 중앙 부분의 ‘혼부타이’에서 연기하고, 보통 4명의 악사들이 ‘아토자’에 자리잡고 앉아서 피리, 고스쯔미, 오쓰쯔미, 다이고 등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한다. 그리고 무대의 오른쪽에 무대의 중앙을 향하여 6명에서 10명의 ‘지우타이’들이 2줄로 앉아서 노의 진행과정이나 주제의 설명, 정경묘사, 시간의 경과나 후일담을 노래로 들려준다. ‘고켄’이라는 역할은 주인공의 의상을 갈아입히고 소도구를 가져다 놓기도하고 주인공인 ‘시테’가 갑자기 사고로 쓰러지거나 하면 대신 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나 그 이외의 시간에는 소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노는 음악성이 강조 된 가면 연극이다. 「교겐(狂言)」은 풍자적으로 가볍고, 즐겁고, 일상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연극이다. 별도의 전용 극장이 없이 노(能)와 같은 무대에서 공연한다. 현재 상연되고 있는 레퍼토리는 약 260편이 된다. 교겐의 배우를 「교겐시」라고 한다. 의상은 약 400년 전당시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꾸민다. 배우들은 부채를 가지고 경우에 따라서 칼, 붓, 톱, 주걱, 술잔, 주전자, 숟 가락등의 상징물로 쓰기도하며 춤을 출 때에도 소도구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교겐은 궁중과 막부등 주로 귀족들을 관객으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전에 공양을 드린 다는 뜻으로 사원에서도 연회했다. 교겐시들은 쇼군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 공연에 임할 수 있도록 막부의 주위에 대기하고 있었다. 막부의 해체로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된 교겐시들 은 공연할 기회와 스폰서를 동시에 잃고 말았다. 그 후에도 봉건적인 사회 분위기와 군국주 의의 대두로 웃음과 풍자를 내용으로 하는 교겐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변하고 나서 교겐시들은 노와 교겐을 한극장에서 번갈아 공연해왔던 과거와 는 달리 현재는 근대적 감각을 가지고 교겐만을 단독으로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교겐의 대사는 알아듣기 쉽고, 새로운 레퍼토리의 창작과 연출로 대중에게 친숙한 전통예능으로 접 근하고 있다. 「분라쿠(文樂)」는 에도시대에 시작된 인형극으로 약 300년간이나 전승되어져 내려오고 있 다. 인형을 ‘조루리’라는 노래 형식에 맞추어 조작한다. 분라쿠는 인형의 섬세한 동작과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볼거리로 한다. 원래에는 한두 사람이 간단한 이동식 장치로 된 인형을 들고 각지를 유랑하며 소규모로 하 는 인형극이 있었다. 한편, 조루리라는 형식의 장편 서사시를 노래하며 유랑하는 ‘다유’라 는 예능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샤미센이라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각지를 유랑하는 ‘샤미센 히키’라는 예능인들이 있었다. 이 세 부류의 예능인들이 합세하여 대규모의 새로운 인형극 을 만들게 되었다. 분라쿠의 무대에는 배우와 인형과 인형의 조정자, 인형의 대사와 극의 내용을 노래로 전개 하는 다유, 샤미센으로 다유의 노래의 반주와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샤미센히키들이 함께 어 우러져서 역할분담으로 연기에 참여한다. 인형은 매우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손발과 몸체, 그리고 머리의 여러 가지 장치로 다양한 표현을 해 낸다. 인형조정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인형을 조정한다. 「가부키(歌舞伎)」는 노래와 춤과 연기가 어우러지는 종합 연극이다.16세기말 일본의 호사 가들 사이에서는 멋대로 행동하거나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가부쿠모노’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노래와 춤이 주로 기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가 부키의 시조는 이즈모 지방 출신의 모쿠니라는 무녀가 그 지방의 큰 신사인 이즈모대사라는 큰 절의 증축을 위한 순회 모금 염불에서 춤을 춘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종교적인 춤 이었으나 이전과는 다르게 흥행성을 띄움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오쿠니는 샤미센을 들 고 포르트갈의 남자 천주교도들의 차림을 하고, 커다란 십자가를 목에 걸고, 화려하게 장식 한 큰 칼을 차고 관객들에게 나타나 대중들을 매혹시켰다. 이렇게 시작된 가부키가 갑자기 너무 성행하게 되면서 매춘의 문제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마침내 가부키 발생 26년 째가 되 던 1629년에는 금지령이 내렸다. 그 후 가부키 과계자들과 애호가들이 남자 배우만을 무대 에 세우겠다는 조건으로 관청의 허가를 얻게되어 미소년들이 여장을 하고 새로이 가부키를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주로 춤과 중세부터 전해 내려오던 노(能)와 교겐(狂言)을 각 색하여 연출한 것이었다. 가부키는 동작 위주의 연극이라기보다는 무용을 중심으로 아름다 운 미모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에도시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도 이들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652년에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다시 전면적인 금지령이 내렸다. 그 후 소년 배우들을 머리 모양과 복장등으로 청년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구체적인 스토리를 엮어서 연기하도록 한다는 조건을 달고 가부키는 1653년에 다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가부키는 대사와 동작을 주로 하는 본격적인 연극으로 재출발하게 되 었고 남자 배우가 여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기위해서 노력했고 더 장대한 스토리를 엮어 내는 다막극의 창작과 ’하나미치’라는 새로운 무대 양식을 창안해내기도 하였다. 하나미치는 배우와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 질 수 있도록 주인공이 이 통로를 통해 등장한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무대 중간에 회전무대를 설치하여 장면 전환을 신속하게 함과 동시에 관 객들로 하여금 장면의 전환까지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배우들의 드라마틱한 분장에 서 붉은색칠을 한 인물은 선량한 사람이나 영웅이며, 악인이나 유령은 푸른색으로 나타낸다. 배우는 남자역, 여자역, 어릿광대역, 그리고 남자악역등으로 나뉘어진다. 「정원(庭園)」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연못을 파고 그 주위에 감상거리를 만드는 ‘지센식 정원’ 둘째, 바닥에 잘게 부순 돌이나 흰모래를 깔아 수면을 연상케 꾸미는 가레산스이식 정원’ 셋째, 다실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로지식 정원’이 있다. 일본정원의 사상적 배경은 일본 고유의 토속 신앙, 불교, 도교에 있고이러한 종교적 상징과 사상을 정원의 구성에 담고 있다. 「일본화」는 메이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와 구별하기 위해서 쓰이는 명칭이다.천연 산 물감과 먹으로 헝겊이나 종이 위에 붓으로 표현한다. 그 기원은 1만년전부터 기원전 3세 기까지의 조몬시대에 사용되었던 토기의 표면에 새겨진 선이나 새겨진 표현들이 나타난다. 그 후 3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의 고분시대에는 고분벽화가 많이 나타나며 특히 한반도로부 터 들어간 벽화들에 기하학적 문양, 방패, 활, 칼등의 무기, 가옥, 배, 동물, 인물화등을 볼 수있다. 일본의 아스카(593-710)시대는 불교와 함께 대륙으로부터 수준높은 불교미술이 전 래되었고 이 시기에는 백제의 화공들이 일본회화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나라시대 (719-784)에는 사원 내부를 장식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또한 건축, 공예, 조각등의 조 형활동도 크게 발전했던 시기였다. 9세기 말부터 12세기에 이르는 헤이안시대에는 불화(佛 )와 야마토에가 나타난 시기이다. 헤이안의 후기에는 세속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가마쿠라 (1185-1333)시대에는 무사들의 활약시대이므로 전투장면을 묘사한 ‘갓센에’나 소설의 내 용을 소재로 한 ‘모노가타리에’등의 그림 양식이 생겼다. 에도(1603-1867)시대는 오랜 기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시기였으므로 초기의 ‘우키요에’(가 부키 배우등을 육필화로 그린 그림) 나 스모(일본 씨름)의 인물화나 풍속도, 풍경화등으로 전개되어 갔다. 1946년 이래 일본미술전람회는 매년 열리며 5개부문으로 나뉘어 전국적으로 공개 모집하고 심사하여 전시작품을 뽑고 있다. 「스모(相僕)」는 체격이 무척 큰 장사들이 알몸에 ‘미시와’라는 샅바를 두르고 ‘도효’ 라는경기자안에서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이다. 원래는 신전에서 거행하던 한 의례였고 궁 중에서 스모대회를 열어 감상하기도 했다. 신사나 절의 건립이나 수리에 필요한 자금을 모 으기 위해서도 ‘간진스모’를 열기도 했다. 당시에는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성행하다 가 1750년을 전후하여 에도(도쿄)로 그 주도권이 옮겨 졌다. 농촌에서도 ‘호노스모’라 하 여 마을의 수호신을 위해 제사의식으로 스모를 열기도 했고 ‘쿠사스모’라고 하여 농민들 이 힘겨루기놀이로서 즐기기도 했다. 일년에 정기적으로 6차례 열리는 큰 대회를 ‘혼바쇼’라고 한다. 신년을 맞이하여 1월에는 도쿄(하쓰바쇼라고 함)에서, 3월에는 오사카에서 하루바쇼, 5월에는 도쿄에서 나쓰바쇼, 7월 에는 나고야에서 나고야바쇼, 9월에는 도쿄에서 아키바쇼, 11월에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규슈 바쇼가 열리며 한번 열리면 15일간 경기가 계속된다. 스모는 등급(반츠케)에 따라 아침에는 낮은 등급, 한낮에는 중간등급, 저녁에는 중량급 리키 시들의 대전이 이어진다. 대진표는 미리 짜놓지 않고 그날의 시합 결과에 따라 다음날의 대 진표를 짜게 된다. 씨름판인 ‘도효’에 요코즈나가 앞치마 모양으로 복장을 하고 칼을 든 두 리키시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하여 바닥을 힘차게 밟기도하고 손을 힘차게 올렸다 내렸다 한다. 이럿은 땅과 하늘의 신에게 도효에 부정이 타지 않도록 비는 의식이다. 그리고 나서 리키시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갈라진다. 선수들이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가 힘껏 내리는 동작은 몸의 긴장을 풀 고 정신을 집중시키려는 몸짓이다. 모서리에 놓여 있는 물통에서 국자로 물을 떠서 입을 헹 구는 것은 몸을 깨끗이 한다는 상징이다. 소금을 한 주먹 쥐어 허공에 뿌리는 것은 소금으 로 도효의 부정을 씻어 낸다는 의식이다. 이런 준비 동작 후에는 구획선 앞에서 몸을 낮추 고 주먹을 바닥에 대고 준비태세를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호흡이 맞지 않거나 상대의 호흡 을 흐뜨리기 의해서 준비태세를 풀고 김빼기 작전을 하기도 한다. 제한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격돌하게 되는 것을 ‘다찌아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몸의 일부분이 먼저 땅에 닿거나, 도 효 바깥으로 나가도록 밀어내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심판은 ‘군배(부채 모양의 지시 봉)’로 이긴쪽 리키시를 가리키며 어떤 수를 써서 이겼는지를 힘차고 확실하게 선언하고 나서 군배에 상금을 얹어서 전달하면 리키시는 오른손을 펴서 좌, 우, 중앙으로 흔든 다음 상금을 집어든다. 그것은 승리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한다는 몸짓이다. 일본스모협회가 지정 한 기마리테(승부를 가리는 기술)는 현재 총 70수이다. 선수들은 승부에 크게 집착하면서도 감정의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며 관중 앞에서 들뜨지 않으며 심판의 판정에 따른다. 지금까지 다양한 전통예술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하였으나 다른 책들에 비해서 장 황하게 되었다. 이 책은 교과서식으로 설명과 자료가 사진과 삽화로 잘 소개되어 있다. 그리 고 마지막 부분에는 연중행사에 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